[나의 간디학교 일지] ➄ 답을 할 수 없기에

앞서 ‘관계’를 주제로 쓴 3개의 글에 이어서, 이번 글부터는 ‘배움’을 주제로 연재를 이어갑니다. 그 첫 번째로 학교에서 수업을 신청하고, 수강하던 모습을 더듬어 써보았습니다. 간디학교에서 수업은 어떤 시간이며 공간이었는지 떠올려 봅니다.

이 학교에서는 누구나 스스로 수업시간표를 짠다. 여러 개의 수업을 신청하는 사람도 있고, 정말 하나도 신청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사진 출처: Eric Rothermel

아 배고파. 계단을 내려가 1층 현관에 도착하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친구들이 하나 둘씩 나타난다. “밥 먹으러 가자” “어디 있다가 왔어?” “나 암실에서 사진 수업” “아 맞네.” “너는 소강당?” “응.” 두 줄로 서서 밥과 반찬을 담고 빈자리를 골라 앉는다. “나 먼저 일어선다.” 달리기 하듯 밥을 먹고 일어나는 친구다. “아 점심에 회의야. 화요일이 바빠.” “나는 4시에 기숙사 올라 갈라고.” “저녁은 어떻게 하고?” “안 먹어. 조금 잘라고.”

하루 일과는 저마다 다르다. 회의며 수업이며 시간표에 빈틈이 없는 친구가 있는 반면,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공간을 찾아내어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는 친구도 있다. 식사를 마친 지 꽤나 지났지만 다들 엉덩이가 무거워져 일어나지 않는다. 식당 벽 중앙에 걸린 시계를 빤히 보던 친구가 말한다. “아 오후 수업 드롭할라고. 버겁다.” “그니까 수업을 왜 그렇게 많이 들었어.”

무엇을 배울까?

학기 초에 수업설명회가 있었다. 수업설명회에서는 교사들이 방학 동안에 구상하고 준비한 수업을 소개한다. 그중에는 자립을 위한 기초 수업, 프로젝트 수업, 철학, 경제, 작업장 등 필수로 들어야 하는 수업이 있고, 나머지는 스스로 선택해서 들을 수 있는 수업이다. 무미건조하게 수업 내용을 읊듯이 소개하는 교사가 있는 반면, 어때? 재밌겠지? 하고 적극 어필하는 교사도 있다. 나는 강당 뒤쪽에 앉아 마음속으로 말한다. “흠, 수강할 만한지 어디 좀 볼까!?” 준비하고 노력한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마다 교사들에게 날카로운 피드백을, 혹은 심드렁한 반응을 받게 될까 겁내던 나는, 수업설명회에서만큼은 뒤바뀐 역할에 통쾌함을 느낀다.

수업설명회가 끝난 후 수강신청 시간, 이것저것 여러 수업을 신청하는 사람도 있고 정말 하나도 신청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신청자가 많이 몰려서 누군가는 포기해야 하는 수업, 신청자가 너무 없어서 사라지는 수업도 있다. 내가 듣는 비틀즈 노래 부르기 수업은 다행히 3명이 신청해서 없어지지 않았다. 같이 가사를 더듬어가며 노래를 부르는 2명의 후배와 평소 나와 많은 대화를 나누거나 함께 뭔가를 해보지 않았는데, 수업을 같이 하다 보면 평소에 가졌던 인상과는 사뭇 다른 그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들의 노래를 듣다 보면 평소 알던 것과는 다른 목소리를 알게 된다. 수업은 평소 잘 만나지 않던 선후배를 만나는, 비슷한 흥미를 가졌음을 알게 되는 시간이다. 이번 학기에는 비틀즈 노래부르기를 포함해 페미니즘 수업, 연극 수업까지 총 세 개의 선택수업을 신청했다. 1학년 때처럼 호기심에 많은 수업을 신청해버리는 실수를 이제는 하지 않는다. 정말 듣고 싶은 수업만 신청을 한다. 이 수업 듣는다고 하면 멋져 보일 것 같은 수업 말이다. 수업은 멋있는 걸 배워서 멋있어지려 하는 욕망이, 쏟아지는 수면 욕구와 충돌하는 결투장이기도 하다.

거기서 뭘 배우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동네에 사는 친구들, 명절에 만난 친척들, 머리자르다 만난 미용사가 묻기도 한다. 나는 매번 얼버무리곤 하는데, 비틀즈 노래를 부르는 게 배움이 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서, 정작 나도 그것이 인정받을만한 ‘적절한’ 배움인지 확신을 못해서 그렇다. 공교육 학교에 다니는 동네 친구들은 자신들이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배우는 어려운 수학공식, 영어문법과 비교하며 코웃음 칠 것 같고, 친척들은 겉으로 티는 안 내도 속으론 혀를 차며 나의 미래를 걱정할 것만 같다. 동네 친구들이 하는 공부는 계단처럼 층이 이어져 있다. 고등학교 1학년 국어를 듣고 나면, 그 다음에는 난도가 올라간 고등학교 2학년 국어를 공부하는 것, 인정받을 만한 배움의 과정은 아마 그런 것이다. 수업설명회에 소개되는 수업들은 매번 비슷하기 보다는 변주와 새로움이 있었다. 비틀즈 노래 부르기 수업, 산야초를 채집하여 음식 만드는 수업, 프랑스 자수 수업, 업사이클링 수업도 있다. 가끔은 교사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혼자 하려니 재미없어서 수업을 연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조금 중구난방처럼 보이는 수업들은 이곳저곳에 흩뿌려진 먹 자국들 같다. 그 자국들 사이에서 나는 나아가고 있을까, 표류하고 있을까.

이름이 없는 수업

수강신청서를 잘 들여다보면 이름이 없는 수업이 하나 있다. 대신 그 수업이 임시로 가진 이름은 ‘개인 프로젝트’다. 개인프로젝트는 내가 배워보고 싶은 수업을 직접 여는 것이다. 개인이라고 해서 꼭 혼자 하지는 않아도 되고, 같이 하고 싶은 사람을 몇 명 모아서 함께 해도 된다. 수업의 교사는 학교 교사를 찾아가 초빙하거나, 근처 마을에서 알아보고 구하기도 한다. 물론 교사가 꼭 어른일 필요도 없다. 개인프로젝트를 만든 이유와 모습은 다양한데, 스스로 공부하고 싶은 내용이 생겼거나, 지난 학기에 좋았던 수업이 이번 학기에는 개설되지 않았거나, 듣고 싶었던 수업이 신청인원으로 인해 없어지는 경우 개인프로젝트로 직접 열곤 한다. 피아노, 가야금 수업을 만드는 사람도 있고, 서예 수업이 이번에는 열리지 않아서 직접 연 사람들도 있다. ‘나 이거 해보고 싶은데, 혼자 하면 어렵거나 외로우니 모여서 같이 하자! 목요일 10시, 미술 교실에서.’ 한편으로 수업은 함께하기 위한 시간과 공간이다. 일상의 무료함을 벗어나려는 놀이이기도 하다. 수업의 다양한 시간과 공간 속에 계단처럼 단계별로 놓인 길은 없다. 다만 흩뿌려진 먹 자국은 때로 엷은 가장자리를 서서히 넓혀 간다. 호기심에 들은 수업이 다른 호기심이나 관심이 되어 개인프로젝트가 만들어지고, 때론 소모임으로 이어진다. 캘리그라피 수업 신청 인원이 많아진 탓에 수업을 못 듣게 된 학생들은 소모임을 만들어, 정해진 수업 시간 밖에서 서로-배움의 가능성을 모색해본다. 종이비행기 개인프로젝트를 만든 학생들은, 며칠 전에 운동장에서 종이비행기 날리기 대회를 열어 일상의 무료함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넓혀간다.

답을 할 수 없기에

학교 현관 벽에 모자이크처럼 모여 커진 포스트잇들.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는 짧은 문장은 결코 짧고 작지 않았다. 이것이 내가 페미니즘 수업을 듣게 된 계기다. 사진 출처: Kelly Sikkema

나는 페미니즘 수업을 듣는다. ‘페미니즘’ 네 글자는 첫 수업에 갔을 때에도, 사실 지금도 나에게 생소한 말이다. 작년 여름, 학교 현관 벽에는 색색의 작고 네모난 포스트잇이 붙기 시작했다. 어느새 모자이크처럼 모여 커진 포스트잇들.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는 짧은 문장은 결코 짧고 작지 않았다. 나에게도, 남들에게도 자연스럽고 엇비슷하게 주어지는 줄 알았던 일상과 죽음에 대해서 물음을 가지라는 하얀 목소리가 있었나 보다. 그렇지 않았으면 생소한 네 글자에 이끌려 수강을 신청할 일은 없었을 테다. 강의도 듣고 영상도 봤지만 졸면서 들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수업 때 메갈리아의 미러링 전략에 대해 토론했던 시간은 머릿속 한 칸에 자리한다. 여성혐오를 거울처럼 반전시켜 드러내는 미러링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나누었다. 옳은 걸까? 옳지 않은 걸까? 둘 사이에서 수업을 함께 들은 사람들과 나는 이리 저리 움직이고 헷갈렸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했을 때 나는 교사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래서 정답이 뭔가요?’ 하는 얼굴을 하고. 실망스럽게도 그는 정답이 없다고 했다. 분명 그는 그의 답을 알고 있는 표정을 하고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그 수업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정답을 모르는 질문을 가지고 교실을 나선다. 점심시간에 회의가 있는 탓에 후다닥 밥을 씹어 넘기며 가져온 질문들도 차츰 잊는다.

졸업을 하고 1년이 지났을 때, 나는 인천에 위치한 도서관에서 청소년들과의 독서모임을 운영하고 있었다. 무슨 주제로, 어떤 책을 매개로, 어떻게 모임을 할 것인지 계획하고 준비하는 일은 보기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하는 것은 수업이 아니었고, 함께 모임을 꾸려나가는 것임에도 한자 뜻풀이처럼(授 줄 수, 業 업 업) 무엇인가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자꾸 했다. 때문에 모임 속에서 나의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함께 자료를 찾아보고 토론을 해보고 나서도 나는 내용을 정리하려 많은 말을 붙였다. 모임을 함께 하는 청소년들의 표정에서 따분함이 느껴졌다. 모임에는 활기가 없고, 진행하는 나 역시 부담감에 힘이 들었다. 그 즈음 몇 년이 지난 페미니즘 수업의 장면이 다시 떠오른다. 찜찜하고 허무했던, 정답이 없던 수업이 떠오른다. 한편으로 수업에는 정답이 없다. 정답이 없는 수업들, 혹은 정답을 찾지 않는 수업들이 있기 때문에 나는 엉뚱한 상황에서, 집어 든 책 속에서, 누군가의 흘러가는 말 속에서 그 수업들을 다시 생각한다. 이렇게 수업 시간 속에서 끝나지 않는 수업들이 있다. 그곳에서, 그 수업에서 무엇을 배우냐는 질문에 나는 매번 쉽게 답하지 못했지만, 어쩌면 답을 할 수 없기에 나는 이 글을 쓰게 된다. 흩뿌려진 먹 자국은 지금까지도 엷은 가장자리를 서서히 넓혀 가는 듯하다.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이재형

안녕하세요. 이재형입니다. 된장찌개 참 좋아합니다. 그러면 밥은 두 그릇을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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