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간디학교 일지] ② 너 내 이름 알아?

나의 10대를 고스란히 함께 보낸 곳은 ‘제천간디학교’, 대안학교입니다. 그곳의 냄새와 소리와 공간과 시간과 사람이 만든 사건들을 풀어내 보려 합니다. 이야기를 전하듯이, 적당히 재미나게 읽을 수 있도록 말이죠. 그러면서 묻습니다. 나는 무엇을 배웠을까? 대안학교를 졸업한 나는 대안적인 인간이 되었을까?

첫 만남

-2월 23일 일요일

커다란 트렁크 가방을 차에서 내리다가 가방에 안 챙긴 것이 없는지 집을 나올 때까지 몇 번씩이나 확인하던 집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사진 출처: Erol Ahmed
커다란 트렁크 가방을 차에서 내리다가 가방에 안 챙긴 것이 없는지 집을 나올 때까지 몇 번씩이나 확인하던 집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사진 출처: Erol Ahmed

첫 만남부터, 아니 만나러 가는 길부터 좋지 않았다. 2시간 반 버스를 타고 충주에 도착했지만,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덕산까지 버스로 1시간 더 가야 했다. 하루에 몇 대 없는 버스에는 사람이 가득 차서 앉은 만큼의 사람들이 서서 가야 했고, 구불구불한 산길에선 버스가 줄곧 커브를 돌았기 때문에 당장 창문으로 탈출하고 싶을 정도로 속이 안 좋았다. ‘집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하던 참에 겨우 도착했다. 마중 나온 학교의 봉고차를 타고 10분가량 더 들어가는 길, 창밖으로 앙상한 가지의 나무들이 줄지어 지나간다. 그 너머로 보이는 냇가에는 물이 녹아 다시 흐르고 있지만, 냇가 건너 조각보 같은 밭들에는 녹지 않은 눈들이 희게 남았다. 길었던 겨울을 매듭지어야 할 2월은 자신이 맡은 일을 착실히 하여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지 이곳은 아직 많이도 춥다.

회색 봉고차 문이 열리니 차 안에 가득하던 저마다의 걱정과 설렘이 학교 운동장 위로 입김처럼 흩어졌다. 커다란 트렁크 가방을 차에서 내리다가 가방에 안 챙긴 것이 없는지 집을 나올 때까지 몇 번씩이나 확인하던 집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겨울 동안에 머무는 이가 없었던 탓인지, 맨발로 들어선 학교 안은 썰렁하고 차분했지만 복도를 지나 식당에 가까워지니 왁자지껄한 대화소리가 커졌다. 식당에 들어서자 떠들던 이들이 고개를 돌려 내 쪽을 쳐다보다가 이내 다시 대화에 집중한다. 잠깐의 낯선 시선을 느낀 후부터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다. 어색하게 퍼담은 밥을 구석에 앉아 급하게 먹어치우고 밖에 나오니 이미 해가 지고 주위가 어둑어둑해질 즈음이었다. 눈이 조금씩 쌓여있는 길을 따라 언덕을 올라가니 창문마다 빛이 새어나는 밝은 기숙사가 보인다.

트렁크 가방을 끙끙대며 이끌고 방 배정표에서 내 이름을 찾아 105호 문 앞에 섰지만, 쉽사리 들어가지 못하고 주위를 살핀다. 복도를 오가는 이름 모를 사람들, 방문 너머에서 웅성웅성 떠드는 사람들, 이곳이 불편하지 않은 듯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 나를 위한 자리는 없는 듯하다. 오늘 아침, 걱정 가득한 표정을 하고 줄곧 나를 귀찮게 했던 집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짧은 침대 위에 베고 누운 베개에서, 얼굴 밑까지 올려 덮은 이불에서 그새 그리워진 집 냄새가 난다. 밤이 깊어서도 수다를 떠는 이름 모를 선배들이 있는 방 한쪽에서 애써 잠에 들어본다.

오지랖 장관

-2월 27일 목요일

학교에 오고서 첫 가족회의가 있는 날이다. 작은 강당 안에 학생, 교사가 모두 모였다. 강당 한 쪽에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니, 온 지 며칠 지났음에도 처음 보는 선배들, 교사들이 앉아있다. 회의 안건이 적힌 화이트보드로 눈을 돌리니 사람의 이름도 보인다. ‘시원 불참, 명규 외출’. “시원은 누구고, 명규는 누구야?” “그 명규형 있잖아 4학년. 키 좀 크고 202호” “그거 동원이형 아니야?” “동원이 형 착해. 자기한테 존댓말 쓰지 말래.” “부럽다. 우리 방 주형이 형은 무서워 말도 없어.” “너 103호 아냐? 주형이 형은 106호고, 너네 방은 주영이 형일걸?”

입학한 나에게 주어진 첫 번째 과제는 이곳 사람들의 이름을 다 외우는 것이다. 초등학교에서는 같은 반 친구들 이름만 외우면 되었는데… 여기서는 선배든 후배든 선생님이든 서로의 이름을 알고 불러준다. 나는 아직 동기 17명의 이름도 다 외우지 못했으니 가능할지 모르겠다. “너 내 이름 알아?” 마주칠 때 짓궂게 묻는 낯선 선배들은 가끔 내 이름을 물어주기도 한다. “저요? 이재형이요.” “헐 얘 이주형이랑 초성이 똑같네” “킥킥 얼굴도 비슷하네. 너 걔랑은 친해지지 마라” 뭐가 재밌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따라 하하 웃는다. 이러면 친해지려나… 같이 걸어가다가 마주친 선배와 살갑게 인사하는 동기가 사실 너무 부럽다. 같은 방을 쓰는 형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내 행동이나 표정이 맘에 안 드는 게 아닐지, 혹시 동기들도 나를 별로 안 좋아하면 어떡하지 매일 긴장 속에서 지내고 있다.

회의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어 딴 생각에 빠져있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순서인 알림 시간이다. “회의 끝나고 1학년 칠판 앞으로 모여요!” 5학년 선배가 손을 들고 말한다. “우리 남으래?” “우리 왜?” 그 이유가 얼굴에 쓰여 있기라도 한 듯 나와 동기들은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회의가 끝나고, 나와 동기들이 쭈뼛쭈뼛 모여 있는 칠판 쪽으로 고등부 선배들이, 거대하고 멀기만 한 그들이 다가왔다. “안녕. 나는… 큼흠! 나는 오지랖 장관이야” 오지랖 장관이라니. “오지랖에서 신입생 멘토, 멘티를 해요. 음… 멘토랑 멘티랑 잘 지내봐요.” 오지랖 장관이라는 이름 치고는 설명이 참 간략하다고 생각하던 내게 먼저 와서 인사하는 나의 멘토는 4학년 선배였다. 무섭게 생기지는 않아서 내심 마음이 놓였다. 멘토가 해야 할 미션이 있는 건지, 가끔 간식을 가져다 주기도 하고, 설거지를 해주기도 한다. 마주치면 인사도 건네주고 짧은 대화도 나눴다. 자기가 속한 동아리에 들어오라고 하는 말을 거절하지 못해 관심이 없었음에도 들어가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 가까워진 선배가 생긴 것 같아서 기쁘다.

아! ‘오지랖 장관’에서 오지랖은 학생회의 부서 중 하나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름처럼 오지랖 부리기 위해서, 학생들이 오지랖 부리게 하려고 만들어진 부서였다. 학교에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나이도 생각도 성격도 다른 사람들이 100명이 넘게 있고, 20명의 교사들도 있으니 이 120명의 사람들이 서로 만나고, 이야기하고, 잘 지낼 방법을 고민하고 준비하고 시도한다고 한다. 학기 초에는 전교생 마니또를, 기숙사에선 자신의 방을 소개하는 오픈하우스를, 가끔은 학년을 섞어 밥을 같이 먹는 이벤트를, 학기 말에는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나누는 간담회를 진행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너가 재형이지? 이거 마니또가 전해주래. 좋은 하루 보내래!” 마니또 편지를 받는 동기들을 부러워하던 중에 나에게도 마니또로부터 편지가 오는 날은 늦은 밤까지 스탠드 밑에서 편지를 썼다 지운다. 글씨를 잘 쓰는 친구에게 가서 부르는 대로 써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내 편지 내용을 들키기가 민망해서 늦은 밤에 혼자 쓴다. 고맙다는 말을 전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겨우 다 쓴 편지를 이불 밑에 넣고 잠에 든다. 마니또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누군지 이름을 들어도 그 주인이 누구인지 모를 수도 있지만 이렇게 한 명, 한 명과 관계를 맺어가는 일들이 조금씩 내일을 기대하게 만든다. 베개에 밴 집 냄새가 조금씩 옅어지고 있다.

너 나 알아?

-다음 해 2월 22일 일요일

창밖으로 지나가는 앙상한 나무들, 길 곳곳에 희게 남은 눈들.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다. 봉고차 안은 시끌시끌, 두 달 만에 만나 할 얘기들이 많은가 보다. 멀어진 시간만큼 다시 이곳이 어색해진 나는 조용히 풍경에 눈을, 냄새에 코를 적응시킨다. 아무래도 추위는 적응이 안 된다. 서늘한 학교 복도에서 익숙한 냄새를 맡으니 방학이 끝났다는 게 실감이 난다. 방학이 끝날 무렵, 방바닥과 한 몸이 되어 번데기 같은 삶을 사는 것도 이제 지겨워. 라고 느낀 것도 잠시, 학교에 오니 사무치게 그립다. 따듯한 밥 냄새를 따라 식당에 들어서니 반가운 얼굴들이 보인다. 오! 그새 이미지가 확 바뀌어서 온 사람도 있네. 밥을 들고 모여앉아 방학 동안 있던 일들을 얘기하다가 겨울 새 조금 달라진 학교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때 쭈뼛 쭈뼛 식당으로 걸어오는, 처음 보는 얼굴들이다. “오! 1학년들인가 봐” “헐! 애들 엄청 어려” “너가 가서 인사해봐” “아, 뭐래” 잠시 1학년들을 향했던 고개를 거두고 못 다 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밥과 반찬을 담는 1학년들의 몸짓에는 낯설음과 어색함이 묻어있다. 기숙사 복도에서 커다란 트렁크 가방을 손에 들고, 어쩔 줄 몰라 두리번거리는 1학년들이 안쓰럽고 귀엽다. 그래 이제 2학년이 된 거다. 처음으로 후배가 생겼기 때문에, 같은 방에 들어온 1학년 후배에게 좋은 선배가 되고 싶다. 근데 어떻게 해야 하지… 작년에 선배들이 썼던 방법을 떠올려본다. 침대 2층에서 이불을 펴고 있는 후배에게 말을 걸었다. “너 내 이름 알아? 설마 몰라?” 말을 걸까, 말까 고민하다가 장난스레 던진 질문을 받은 후배가 적잖이 당황하고 미안해하는 바람에 나도 놀랐다. 헐 방금 나, 학교에 처음 왔을 때 무섭고 낯설던 선배들이랑 똑같네.

120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외워가며 그들과 아주 얇은 실이라도 이어보려 애썼던 시간들을 지나, 어떻게 좋은 관계를 만들어가고, 유지할지 고민이 시작되고 있다. 아침 열기 시간, 담임쌤이 흑판에 백묵으로 탁 타닥 써간 문장은 ‘너와 나에 대한 이해’, 2학년 교육과정의 주제였다. 칠판에 적힌 그 말이, 왜 한 해의 교육과정씩이나 되는 것인지 차츰 알아간다. 120명의 사람들, 2층짜리 학교와 기숙사. 이 적은 사람들과 작은 공간에서 매일 마주하며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이재형

안녕하세요. 이재형입니다. 된장찌개 참 좋아합니다. 그러면 밥은 두 그릇을 먹습니다.

댓글 1

  1. 호그와트로 다시 들어가는 해리처럼 긴 방학을 마친 간디인들은 다시 학교로 향하고…
    일년을 먼저 산 선배들은 1학년 후배가 귀엽고…
    재형님의 맛갈스런 이야기밥…
    잘 읽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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