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이 있어 풍부한 공동체, 끝이 있어 소중한 공동체

일 공동체 ‘피스오브피스’를 개인 박현주는 어떻게 느끼는가에 대한 이야기.

몇 년 전 일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을 끊임없이 풀어냈던 특별한 인연 몇 명에게 ‘너의 말을 모두 이해하고 함께할 수가 없으니,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나눌 수 있고 함께할 수 있는 동료를 찾아라.’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게 어쩜 그렇게 서운하고 섭섭한지, 커다란 지구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도 그들에게 감당하기 힘든 개념의 배설물을 퍼붓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을 혼자 해내기엔 나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도 알았다.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과 하고 싶은 것(지금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또한 찾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렴풋이 이를 알았던 과거의 나를 칭찬한다. 그렇기 때문에 쪼그라들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이 사람들이 나를 힘들어하면 나를 힘들어하지 않는 이들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였다. 또 다른 동료를 찾았다.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나눌 수 있고 함께할 수 있는 동료를 찾아라.’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by Mimi Thian 출처:
https://unsplash.com/photos/ZKBzlifgkgw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나눌 수 있고 함께할 수 있는 동료를 찾아라.’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진 출처 : Mimi Thian

현재 나는 피스오브피스라는 콜렉티브에서 일과 작업을 하고 있다. 콜렉티브가 무엇인지 모르고 시작했는데 벌써 3년차다. 찾으라던 그 동료들을 만났다. 학창 시절 친구들은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라고 할 만한 이야기에서 꼬리를 물고 실질적인 무언가를 만들어 간다. 만들어낸 결과물이 생각보다 근사해서 ‘봐~! 이거 된다고 했잖아’하며 거들먹거리기도 한다. 만 2년이 지나는 동안 내가 지난 10년 동안 한 일과 작업보다 더 많은 포트폴리오가 쌓였다. 같이 밥을 먹고 일을 하고 놀기도 한다.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만나고 가족의 이야기나 주변 친구 이야기도 서슴없이 한다.

피스오브피스는 나의 6번째에서 7번째의 친밀한 ‘공동체’이다. 어렸을 때부터 소수의 몇하고만 어울리는 사람이었던 나는 적게는 2명, 많게는 10명 미만의 사람들하고만 2~3년의 시기를 보냈다. 극단적인 시기에는 사회생활이라는 것이 전혀 없이 2~3명의 사람하고만 만나고 생활했다. 성인이 되어 만난 공동체는 일을 같이하기도 했다. 운이 좋게 극단적으로 싸우거나 서로 심한 말을 하고 헤어지지는 않았지만, 그토록 친하다가 아예 잃어버린 인연들도 꽤 많다. 다행인 건 몇 번의 같은 실수를 하다가 나의 어떤 점이 좋지 않은 결과를 낳았는지 알게 된다는 점이다. 헤어짐에서 새로운 관계의 실마리를 찾는다. 이러한 결과들로 더는 일은 같이하지 않지만 둘도 없는 친구로 관계가 변하기도 한다. 일하다가 헤어진 친구와는 다른 친구와 이해할 수 있는 분야가 있어 몇 달 만에 이야기를 나눠도 막 어제 만난 듯 이야기 할 수 있다. 당시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머릿속을 꽉 채울 정도로 심각한 일이었던 친구와의 관계에 대한 고민이, 이제는 그게 뭐였는지조차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설픈 경험들 속에서 나는 분명히 성장하고 있었고, 다음에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배워가고 있다. 이러한 경험은 피스오브피스 활동을 하면서 효과적으로 발휘된 듯하다. 하지만 배움엔 끝이 없다고 했던가, 내가 아무리 부족하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지점들을 미리 고치고 예측하고 피해 봐도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들을 마주한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돼서도 서로 응원하고 종종 함께 하는 미래를 생각하면 그냥 든든하다. by Zach Reiner 출처: 
https://unsplash.com/photos/K4XHVhJk6kw
할머니, 할아버지가 돼서도 서로 응원하고 종종 함께 하는 미래를 생각하면 그냥 든든하다.
사진 출처 : Zach Reiner

어쩌다 보니 하나, 둘 모여 일곱이 됐다. 사람 일곱은 나에겐 너무 많은 수여서 생각하면 머리가 왕왕 울린다. 거기다 각자 다른 생각으로 콜렉티브를 시작하고 유지하고 있다. 어차피 시작한 거 각자 좋은 것만 하면 좋겠는데 쉽지 않다.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니 갈등의 골이 깊어 싸움도 한다. 손절은 당해 봐도 싸움은 안 했었는데 놀랍다.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일방적으로 화를 내고 바로 다음 날 사과를 한 적도 있다. 서로를 놀리고 장난도 친다. 투닥거리며 정도 쌓는다. 누군가는 불편한 것을 말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하고, 누군가는 하는 것도 듣는 것도 정말 싫어한다. 이렇게 다른 우리가 건강한 관계를 지속할 수 있을까도 의문이다.

하루에 몇 번씩 ‘누구 하나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이렇게 힘들 거면 이거를 왜 이렇게까지 하고 있을까?’ 고민한다. 그런데도 우리가 한 작업이 인정을 받아 이전보다 조금씩 크고 재밌는 일이 벌어지면 즐겁다. 어떤 작업은 하는 중에 그렇게 신이 난다. ‘이런 게 바로 내가 하고 싶은 거였지’ 하며 바로 몇 시간 전에 화내던 나를 잊는다. ‘내가 하는 말이 뭔지 모르겠다’고 했던 이전 인연들과 달리 일곱 중 적어도 하나는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안다. 싸우고 부딪히면서 ‘이렇게 안 맞으면 같이 안 하는 게 더 낮지 않겠냐’라고 마음에서 우러나온 소리도 한다. 다들 혼자서도 잘하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그냥 원래대로 돌아갈 뿐이니 그것도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동시에 한쪽으론 누구도 이 공동체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생각한다.

지금의 굴러가는 꼴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아 조치를 취해본 것이 여러 차례다. 그 여러 차례와 여러 시도가 수포가 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하지만 그 실패로 보이던 시도들이 쌓여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요청했던 싫어하는 부분을 고치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모습을 본다. 그 노력이 고마워서 정말 화가 나도 화를 내지 않으려 노력한다.

이것은 비단 나만의 경험은 아니다. 모두가 조금씩 아주 싫어하는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서로 조심한다. 하지 않으려 하는데 무심결에 누군가를 힘들게 만들면 그 상황을 이해하는 사람이 중재자가 되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하고 시도한다. 이는 사람이 일곱 명이나 돼서 조명되지 않는 부분이 적기 때문에 가능한 지점이다. 사람이 많아 다행인 점도 있다니 신선하다. 서로를 이렇게까지 이해하는데도 불구하고 부딪히고 변화하는 관계가 공동체라면 우리는 진정한 공동체의 궤도에 들어선 것 같다.

이 인연들이 각자 다른 길을 가게 되어도 그건 그것대로 괜찮을 것 같다. 과거의 나에게 ‘동료를 찾아라’라고 말했던 인연이 지금은 다른 형태의 인연이 되어 있듯, 우리도 지금과는 다른 관계의 모습이어도 제법 괜찮지 않을까 싶은 믿음이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돼서도 서로 응원하고 종종 함께 하는 미래를 생각하면 그냥 든든하다. 이런 공동체에 과연 끝이 있기는 한 걸까.

박현주

동양화, 판화를 전공하고 시각작업과 제작업을 하고 있는 박현주입니다. 실질적인 삶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적절하고 적당한 영향을 주고받음을 목표로 합니다. 공동체, 비예술인과의 소통을 중요시하는 활동을 많이 합니다. 그러한 작업과 활동에 영향을 받아 창작작업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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