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사상가] 주체성 생산은 왜 생태주의적인가? –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

가타리는 주체성을 탐색하고 대안적인 주체성이 생산되는 과정을 생태학의 과제로 보았다. 기존 생태철학과 같이 미리 책임주체가 할당되거나 역할을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어떻게 생태적 주체성 생산을 도모하고 조직해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과 사상을 드러내보인다. 이를 통해서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삶을 재창조하고 분자혁명을 이룰 수 있는 생태적 주체성 생산의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서론 : 가타리의 생태운동과 카오스모제의 위상

피에르 펠릭스 가타리(P.ierre-Félix Guattari)는 1930년 4월 30일에 태어나 파리 북서부의 노동자계급지역인 비예뇌브-레-샤블롱에서 태어났다. 그는 소르본에서 학사학위조차도 포기하고 장 우리 박사와 함께 대안적인 정신의학을 실험하였던 보르드 병원의 설립과 운영을 함께 했다. 그는 유럽을 히키하이크로 돌아다니다가 이스빠노집단과 접속하였고, 68년 5월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3, 22운동을 주도했다. 68혁명 당시 실험적인 정신의학의 설립을 위해 라캉과 결별하고 들뢰즈를 만나 『앙띠 외디푸스』와 『천개의 고원』을 함께 썼다. 70년대 가타리는 독일녹색당의 도움으로 페드낭 우리와 함께 프랑스 녹색당 씨앗조직을 만들었다. 1980년 말 신자유주의가 시작되면서 운동이 위축되었던 ‘인동의 시대’라고 가타리가 규정한 시기에 그는 생태운동에 참여하여 전국적인 형태로 극좌파를 결집해 적록연대를 창출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결실을 보지 못했다. 1980년대 후반 가타리는 생태주의적 문제의식을 더 발전시켜 『카오스모제』(동문선, 2002)와 『세 가지 생태학』(동문선, 2002)을 집필하였다. 가타리는 〈프랑스 녹색당〉의 당원(이중가입)1으로서 이론적, 실천적 활동을 정열적으로 수행했으며, 1992년 3월에 실시된 프랑스 지방의회선거에서 생태파 후보리스트의 끝에 들어가기도 했다.

펠릭스 가타리 저, 윤수종 역, 『세 가지 생태학』 (동문선, 2003)
펠릭스 가타리 저, 윤수종 역, 『세 가지 생태학』 (동문선, 2003)

『세 가지 생태학』은 생태주의가 자연주의나 금욕주의라는 세간의 오해로부터 벗어나 보다 입체화될 수 있었던 전환점이 된 책이었다. 이 책은 일종의 ‘생태운동의 전략지도’와 같다고 표현할 수 있다. 펠릭스 가타리는 이 책을 통해 마음, 자연, 사회를 포괄하는 생태학의 구도를 그려낸다. 이러한 구도는 자연보호를 주장하는 우파생태주의와 사회변혁을 주장하는 좌파생태주의를 포괄하는 것이었으며, 생태운동을 보다 입체화시켜서 사회생태주의, 근본생태주의, 환경관리주의를 포괄하는 구도로 그려진다. 보통 ‘생태’에 대해서 말하면 자연생태를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가타리는 우리의 마음과 사회적 관계까지 확장시켜서 본다. 펠릭스 가타리의 마음생태, 사회생태, 자연생태라는 세 가지 생태학의 정치적 함의는 생태운동이 이 사회의 등대처럼 1%의 땅뙈기로도 99%를 비추어야 한다는 점을 밝히는 것이다. 이 책은 생태주의의 전략지도처럼 마음생태에서는 ‘주체성 생산’의 문제를, 사회생태에서는 ‘사회적 관계’의 문제를, 자연생태에서는 ‘인간과 자연간의 관계’의 문제를 동시에 말하고 있다. 특히 가타리는 마음생태를 강조하는데, ‘주체성 생산’을 통해서 다른 생각과 다른 삶이 구축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생태에 대한 탐색은 그의 또 다른 책 『카오스모제』의 주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펠릭스 가타리가 녹색운동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비해서 그의 생태적인 사상이 조명되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저작들이 갖고 있는 난해함 때문이다. 특히 가타리는 생태주의자들 중에서 욕망을 긍정하는 특이한 위상을 갖고 있으며, 이 욕망에 대한 긍정은 다른 생태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욕망=자본주의적 욕망’이라는 공식에서 벗어나 있다. 욕망(desire)의 어원은 별(sire)에서 떨어져 나온(de)로서 특이성을 생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욕망이라는 개념은 탐욕(貪慾)과 갈애(渴愛)의 중간좌표에 위치한다. 욕망의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작용으로 대안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은 자본주의적인 도착적 욕망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는 혁명적이고 대안적인 욕망을 겨냥하고 있다. 가타리는 “욕망은 일단 권력의 감시에서 벗어나면 현재의 계획자들과 행정가들이 지닌 미쳐 날뛰는 합리주의보다 더욱 현실적이고 현실주의적인 더욱 훌륭한 조직가이자 더 능숙한 엔지니어로 드러난다. 과학, 혁신, 창조는 기술관료들의 의사합리주의에서가 아니라 욕망에서 증식한다.”(1998, p.278)와 같이 말하면서, 욕망의 미시정치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욕망의 미시정치는 거시정치와 달리, 구조가 변화해야지 사회가 변화한다는 공식이 아니라, 삶과 생활의 변화에 대한 근본적인 약속을 담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노출된 생활의 모든 부분을 정치적인 영역으로 사고하게 된다. 생태운동에 있어서 욕망을 긍정한다는 것이 갖는 의미는 공동체의 활력과 생명에너지를 우리 신체 속에서 무한히 생산되는 욕망으로부터 찾는 것을 의미하며, 이를 통해 생태운동이 금욕주의라는 혐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가타리의 에코소피(eco+philosophy=ecosophy)의 탐색 중 생태적 주체성 생산의 문제의식은 『카오스모제』라는 활동가를 위한 가이드북에 압축되어 있다. 특히 이 책은 분열, 기계, 이질발생 등의 난해한 개념이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에 개념적 맥락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는 파악하기 어려운 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가타리는 양자역학과 현대 물리학에 입각해서 주체성 생산을 설명했던 『분열분석적 지도제작』이라는 책도 『카오스모제』에 압축해 놓아서 더 난이도를 높였다. 그의 후반 사상은 함수론적 질서인 자본주의를 넘어서서 확률론적인 ‘경우의 수’와 ‘주사위 던지기’가 통용되는 양자의 세계처럼 사랑과 욕망에 의한 생태운동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타진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생태적인 주체성 생산에 대한 사고에서 주체성이라는 개념이 근대적 책임주체가 아니라, 관여적 주체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즉, 관계망 속에서 뜻, 지혜, 아이디어가 모여 ‘어느 누군가’의 행동을 촉발한다는 구도를 갖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가타리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물리학이나 정신분석학 등을 적용한다. 그리고 분열분석이라는 지도그리기의 방법을 통해서 ‘듣보잡’과 같은 주체가 어떻게 튀어나오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했다.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
사진출처 : Na5069wv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
사진출처 : Na5069wv

1992년 가타리는 생태파 후보로 나서기도 하고, 『세 가지 생태학』과 『카오스모제』를 집필하면서, 열정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찾아온 심장발작으로 그가 평생을 함께 했던 현장이었던 보르드병원에서 세상을 떠난다. 그의 정열적인 삶은 유한자의 실존좌표 속에서 그려져 있었고, 그의 삶의 시간은 유한했다. 그러나 가타리는 유한성을 응시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욕망을 통해서 삶을 강건하고 치열하게 만들었던 삶이었다. 그는 어느 책에서인가 광기, 욕망, 죽음 등 유한성을 응시하는 순간, 신, 국가, 아버지와 같은 초자아의 수용좌표와 같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닌 실존적인 강건함을 얻을 수 있다고 서술하였다. 그가 정열적으로 서술한 『카오스모제』를 통해서 생태적 주체성 생산이라는 색다른 의미를 찾아보기 위해서 먼저 필요한 요소는 활동가적 마인드로 이 책을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아카데미와 학자연한 방법으로는 이 책은 더 난독증을 더할 뿐이며, 마치 가타리라는 활동가가 활동의 노하우와 철학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읽는다면 그것의 의미는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생태계를 설명하는 카오스모제

카오스모제(chosmose)는 혼돈을 의미하는 카오스(chaos)와 질서를 의미하는 코스모스(cosmos), 그리고 상호침투를 의미하는 오스모제(osmose)의 합성어이다. 카오스 이론은 혼돈으로 가득 찬 우주를 보였지만, 그것이 혼돈을 일으켜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으로는 나아가지 못했다. 보수적인 시각에서는 혼란과 아노미와 같은 영역이 기존 질서를 허물어뜨리고 파괴하는 힘이라고 인식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생태적 전환이라는 색다른 과제 앞에 우리의 삶은 아파트, 텔레비전, 자동차, 육식 등 스테레오타입화된 삶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생태계의 구도를 통해서 사회와 제도에 변화를 주기 위해서는 생태계가 정적인 연결망이 아니라, 어떤 특이성에 의해서 혼란과 질서, 상호침투를 오가며 역동적인 구도를 그리는 것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카오스모제는 생태계에 대한 색다른 구도를 그려낸다. 가타리는 “세계는 가령 주체의 위치성이 구현되는 중심[배꼽점]이, 파괴, 탈전체화, 탈영토화의 지점이 존재한다는 조건에서만 구성될 뿐이다”(p.109)라고 말하면서 근대 주체의 신화가 아닌 역동적인 생태적 주체성을 사유한다.

카오스모제를 설명할 때 가타리는 기상학자 로렌츠의 ‘이상한 끌개’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이상한 끌개는 저기압과 고기압이 교차될 때 기압골 사이에서 어떤 끌개 유형의 그림이 그려지는 구도를 그리는 것이다. 로렌츠는 “북경의 나비가 허리케인을 일으킨다”라는 나비효과로 유명한 기상학자이기도 하다. 이상한 끌개는 무질서로 보이는 영역에 어떤 동역학이나 사회화학적인 역동적인 구도가 그려진다는 점을 잘 설명할 수 있는 구도를 보여준다. 여기서 ‘1+1=2’라는 함수론적인 방식으로 설명되는 질서는 공동체, 생태계, 네트워크를 전혀 설명할 수 없는 개념이다. 그것들의 역동성이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비합리주의적이라고 여겼던 독특한 구도를 그려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혼돈 속의 질서 속에 있는 주체성의 관점에서 보면 ‘나’란 사람도 고정된 자아로 이루어진 딱딱하고 정체가 분명한 사람이 아니다. 광기, 욕망, 사랑이라는 공동체의 관계 맺기 방식에서 보여주는 ‘나’의 모습은 타자처럼 느껴지는 이질적인 것들의 복수성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음성을 녹음해서 다시 듣기를 해보면 아주 다른 사람이 얘기한다는 느낌을 받는 것도 그런 타자에 대한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가타리는 “나는 하나의 타자이다, 즉 모든 부분에서 개별화된 정체성 및 유기체를 넘쳐흐르는 부분적 언표행위의 구성 요소들의 교차점에 구현된 복수적인 타자이다”(P.113) 정신질환에 걸린 사람들은 마치 다른 사람들처럼 폐색되고 협착된 사람들로 변해 버린다. 그런 상황은 누구나 직면할 수 있는 우리 안의 광기를 보여주는 것으로, 광인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내재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여행을 떠나면 낯선 공간에서 이방인이 되어 버린 자신을 금방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타자로 치부되었던 아이, 동물, 광인, 이주민, 장애인 등은 우리 안에 내재하며, 우리를 구성하는 타자들의 복수성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음악에 대해서 전혀 모르다가도 피아노 앞에서 굉장한 광상곡(狂想曲)을 두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타자성의 실존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아가 아닌 타자들을 내재한 주체성에 대한 탐색이 이 책의 중요한 컨셉인 이유는 공동체 내에서 아주 색다른 주체성을 생산하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가타리는 이질적이고 특이한 주체성이 만들어지는 것을 설명하는 것에서 정신병이나 분열자를 특권화하지는 않는다. 물론 분열자들은 우리 안에 타자의 잠재적인 측면을 드러내주기는 하지만, 아주 색다른 주체성이 생산되는 다양한 타자들의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가타리는 “문제는 분열자를 탈근대 시기의 영웅으로 만드는 것이 결코 아니며, 무엇보다도 정신병의 과정 안에서 유기적, 신체적, 상상적, 가족적, 사회적인 체계의 구성요소들이 지닌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카오스모제적 내재성과 궁지에 대결하게 되는 구성요소 상호 간의 억제 효과를 측정하는 것이다.”(P.114)와 같이 말한다. 즉, 정신병은 자본주의 정상생활이라는 불리는 정상성에 대해서 의문을 표시하고 의미좌표를 흔드는 모습을 보인다. 사실상 가타리는 지속가능하지 않는 삶의 형태를 보이는 기존 삶의 방식을 뒤바꿀 수 있는 여지를 분열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표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타자의 실존은 정신병에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에서 열정적인 힘에 의해서 예술, 과학, 혁명의 사유와 실천이 드러나는 것도 타자의 실존이 내재해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네트워크 사회나 공동체에서는 아주 작은 변화가 눈덩이 효과처럼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이에 따라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가능하다는 점도 여기서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특이한 생각을 만들 것인가가 매우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카오스모제적인 내재성으로서의 공동체에 잠재되어 있는 타자들을 눈뜨게 하여 긴 잠에서 깨어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해진다. 그리고 똑같은 삶을 재생산하고 반복하는 자본주의적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이질적인 타자를 생성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졌다. 공동체가 긴 시간 동안 토론하고 사유하는 이유는 동일한 생각을 향해서 모이기 위해서라기보다 우리 사이에서 다른 삶과 다른 생각이 발생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질발생에 따라 대안적인 삶을 구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가타리는 “망상, 꿈, 정열에 대한 정념적 파악 속에서 알아야 할 것은 존재론의 화석화, 즉 특별한 스타일에 따라 드러나는 현존재의 이질발생에 대한 실존적 젤리화[응고화]는 다른 주체화 양태에 항상 잠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존재론적 화석화는 카오스모제적 구성요소들의 다성성[다성음악]속에서 자신의 토대(혹은 저음부) 위치를 드러내며 동시에 상대적인 역능을 강화하는 정지화면 같다.”(P.110~111)라고 말한다. 카오스를 일으키는 열정과 정념은 코스모스의 질서를 함께 갖고 있어서 어떤 다른 스타일이나 응고된 주체와 같은 형태로 느껴질 때가 있지만, 이것은 카오스모제라는 집단의 다성성 속에서 발아한 것이다. 생태 위기에 직면한 사람들이 오히려 좌절과 고뇌, 멘붕, 비관 등으로 향하는 것은 응고되어 있는 정지화면에 사로잡히는 것과 같지만, 그것을 뛰어넘어 예술과 과학, 놀이, 창조, 기획, 협동 등 분열적 카오스모제로 나아갈 수 있는 여지는 풍부하다. 막대한 생태위기에 대한 좌절과 고민의 정지화면은 이따금 등장하며 토대를 구성하지만 활발하고 발랄한 창조적인 활동으로 나아가면서 생명에너지를 발산하며 자율성의 토대가 된다. 여기서 생태계에서와 같이 섬광과 같은 분자혁명이 가능한가에 대한 대답으로 분열적 카오스모제를 사유할 수 있게 된다.

생태적 주체성 생산

근대는 사법적인 책임 주체(subject)로서 ‘나, 너, 그’를 만들었다. 책임주체는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강건한 자아를 가진 사람이고, 이념과 제도의 호명 앞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 가타리는 주체성(subjectivity)라는 개념을 등장시킨다. 주체성은 관계망 속에서 탄생하고 생성되는 ‘어느 누군가’라는 비인칭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 가타리는 “주체성은 사실 미하일 바흐친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원적이고 다성적이다”라고 말한다. 즉, 고정된 자아와 의무적인 위계관계에서 딱딱하게 화석화된 사람이 아니라, 공동체와 사회적 관계망에서 출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제 대안적이고 생태적인 뜻과 지혜와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을 우리 안에서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쟁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사회구조와 원자화되어 분해된 무기력한 개인이라는 대당적인 한 쌍을 만들지 않고, 관계망 속에서 생태적 지혜와 집단지성, 사랑과 욕망의 흐름에서 표출되는 주체성에 대해서 주목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체성 생산은 합리적인 주체의 자유의지나 행동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가타리는 무의식구성체와 분열 등을 탐색하면서 주체성 생산을 그려내려고 했다. 특히 테크놀로지와 기계적 설비 속에서 주체성 생산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대해서 주목하였다. 이를 통해 주체화가 이루어지는 구성요소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가족, 교육, 환경, 종교, 예술, 스포츠…에 걸쳐 나타나는 기표적인 기호학적 구성요소들, 2) 매체산업, 영화 등에 의해 만들어진 요소들, 3) 정보적 기호 기계들을 움직이게 하고, 그것들이 의미작용들과 함축적 의미들을 생산하고 운반하며 그래서 적합한 언어적 공리계들에서 벗어난다는 사실과 병행하여 그것과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비기표적 기호학적 차원들”(P.13)

이에 따르면 주체화의 구성요소로 의미가 고정되어 정상성을 운반하며 정상생활을 구성하는 기표화된 자본주의 질서가 먼저 사유될 수 있다. 자본주의는 기표에 따라 “책상은 책상이다” 혹은 “이것은 내 것이다”라고 의미화되어야 등가교환이 가능한 사회이며, 고정관념으로서의 기표가 장악한 사회이다. 이 속에서 가족생활이나 아카데미 등은 기표를 유지하고 전승하고 재생산하는 데 복무한다. 주체화의 다른 구성요소로 대규모 미디어나 소규모미디어, 영상산업의 영상-이미지의 흐름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영상-이미지 등은 기계가 분비하는 환상이라고 사유되며, 신체-욕망을 넘어선 기호-욕망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영상-이미지의 흐름은 사랑과 욕망의 흐름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고독한 개인들의 환상의 흐름은 무의식구성체 속에서 주체성 생산에서 모종의 관계를 갖는다는 점은 분명하다. 다음 주체화의 구성요소로 비기표적 기호작용을 사유할 수 있는데, 비기표적 기호작용으로서의 음악, 색채, 냄새, 몸짓, 표정 등은 대면적 인간관계의 핵심적인 구성요소이자, 동물의 기호작용의 핵심이다. 이러한 비기표적 기호작용은 기표와는 달리 의미의 고리에서 벗어난 기호-흐름을 작동시키며 특이성을 생산하여 공동체적 관계망을 성숙시키는 기본 소재가 된다. 예를 들어 SNS상에서 언어를 통해서 논쟁을 하던 사람이 직접 대면 관계를 통해서 색채, 표정, 음향, 몸짓 등과 만나면 비언어적 공감대를 형성하여 오해를 풀리는 사례를 들 수 있다.

가타리의 정신생태학은, 보르드병원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주체성 생산을 풍부하게 사고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보르드 병원에 정신질환자가 찾아오면 “문제는 환자의 주체성을 정신적인 위기 이전의 상태로 단순히 재모델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독자적인 [주체성] 생산이다. 예를 들어 가난한 농촌환경에서 온 어떤 정신병 환자들은 조형 예술에 참여하거나, 드라마, 비디오, 음악 등을 하도록 권유받을 것인데 그때까지 그들은 이러한 세계를 몰랐었다. (중략)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표현 소재와의 대면만이 아니라 개인-집단-기계 사이의 복수적 교환들이라는 주체화의 복합체(complexion)들을 구성하는 것이다”(P.16) 가타리의 이러한 정신생태학에 대한 탐색은 고립되고 세상과 연결될 수 없는 무기력한 광인이 아니라, 언표행위의 집단적 배치라는 공동체적 관계망에 접속해 있고, 각종 기계(=반복)에 의해서 재창조된 삶을 조성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주체성이 아니라, 창조되고 자기생산하며 생산되는 주체성을 사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가타리는 주체성이 무엇인가라는 숱한 질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의미화를 하며 정의를 시도한다. “개인적 그리고/혹은 집단적인 층위들이 그 자체 주체적인 타자성과 인접한 혹은 한정하는 관계에 있는 자기준거적인 실존적 영토(territoire)로서 등장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들 전체”(P.19)라고 말이다. 즉, 그는 근대의 통합적인 자아의 이미지로부터 벗어나 복수적 타자가 내재하거나 이를 대면하는 주체성을 사유하며, 동시에 준거체제를 신, 국가, 아버지와 같은 초자아적인 것에 두지 않고 유한한 자신의 실존의 영토 속에 두는 자기 준거성과 자율성을 주체성이라고 사유한다. 준거는 자신이 가치나 윤리의 기준으로 삼는 것으로써 흔히 성공주의/성장주의는 강남아줌마를 준거집단으로 삼는다고 말한다. 이에 반해 자기 준거를 자신의 유한한 삶의 가치와 윤리로 두는 사람들은 흔히 스피노자의 의미로 보면 ‘예속인이 아닌 자유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가 암시한 유한자의 실존좌표는 자기-준거적인 주체성에 적합한 개념이다.

여기서 ‘집합적’이라는 말에 대해서 주목해 봐야 할 것이다. 가타리가 말한 언표행위의 집합적 배치의 개념은, 집단의 강렬도 속에서 무언의 춤을 추듯 발언이 생성되고 언표행위가 이루어지는 과정에 대해서 개념화한 것이다. 집단은 자본주의의 고정관념인 기표라는 의미화, 모델화, 정의(definition)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문제제기들의 강렬도에 맞추어서 화용론적인 맥락에서의 언표행위를 수행하게 된다. 이는 집단이 어떤 실체가 분명한 군인집단, 죄수집단, 우익집단 등이 아니라 강렬도를 전달하고 관계성좌에 따라 말을 통해서 춤추게 하는 공동체집단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강렬도만 전달할 뿐 병풍처럼 아무 말을 안하고 경청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이며, 그들은 언표하지는 않지만 강렬도라는 측면에서 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가타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집합적이라는 용어가 여기서는 개인을 넘어서서 사회체 쪽에서 전개되는 만큼 동시에 사람의 안쪽에서 잘 한정된 집합체의 논리보다는 오히려 정서의 논리에 관련되는 언어 이전의 강렬도의 방향으로 전개되는 복수성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P.19)

또한 공동체적 관계망은 독특한 리듬과 화음을 갖고 있어서 식생, 문화, 삶의 방식, 생활습관 등에서 다른 공동체와 다른 특이성을 드러낸다. 이것은 반복이 갖고 있는 화음이며 리토르넬르(ritournelle)라고 불린다. 이러한 화음은 공동체라는 실존적인 영토에서 생산되는 반복이 주는 재미이며 흥이다. 공동체는 시, 음악, 색채, 향기가 교차하면서 흥과 리듬에 따라 색다른 영토나 생태사회로 이행하는 탈영토화를 수행하는 과정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에서 고립되고 무력화된 개인의 의미가 아니라, 관계성좌에 따라 화음을 만들고 그 흥에 따라 변이와 이행, 횡단으로 향하는 것이 주체성 생산의 또 다른 특성이다. 가타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실존적 리토르넬르라는 범주에 넣고 있는 그러한 선분들의 작동을 보는 것은 시와 음악의 틀에서만은 아니다. 주체화 양식의 다성성(P.olyphonie)은 실제로 시간[박자]를 맞추는 방식의 복수성에 일치한다. 그러므로 다른 리듬적인 것들은 자신들이 구현하고 특이화하는 실존적인 배치들을 결정화하는 데로 나아간다.”(P.28) 이러한 리토르넬르를 통해서 사람들의 정서나 감각, 지각작용이 바뀌고 세상을 재전유하고 재창조할 가능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완전히 다른 감수성으로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것 – 즉, 주체성 생산-이 리토르넬르라는 화음에 따라 탈영토화하는 흐름에 따라 조성될 수 있다. 마치 안데르센 동화의 ‘피리 부는 사나이’에 이끌린 아이들처럼 말이다.

이러한 주체화 양식을 통해서 주체화의 돌연변이를 통해서 완전히 다른 실존과 삶이 개방될 수 있다. 마치 예수를 단지 목수의 아들로만 알고 있었던 갈릴리 사람들이 놀라워하는 것처럼 삶의 색다른 재창조가 주체성 생산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이 합리적으로 분석되고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타리는 이 책에서 다채로운 개념을 등장시킨다. 가타리가 수행하는 분열분석은 의미를 고정시키고 화석화하여 정지화면처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러한 분석 관념에서 시간은 참아내야 할 존재가 아니다. 시간은 움직이고 방향 지으며, 질적 변화[돌연변이]의 대상이다. 분석은 더 이상 이미 실존하는 잠재적 내용의 기능에 따라 증상을 전이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을 분기시킬 수 있는 새로운 촉매적 핵심지대를 발명하는 것이다.”(P.32) 주체성 생산을 분석하려는 시도는 질적 변화와 돌연변이를 촉매하고 고무하며 도모하는 색다른 시도에서 비롯된다. 이를 통해서 돌연변이처럼 등장하는 역사적 주체성을 그려낼 수 있으며, 이를 분석하여 현재의 역사와 사회의 변혁을 도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기계적 이질발생과 생태계

펠릭스 가타리 저, 윤수종 역, 『카오스모제』 (동문선, 2003)
펠릭스 가타리 저, 윤수종 역, 『카오스모제』 (동문선, 2003)

이 책 『카오스모제』에서 가타리가 언급한 기계는 반복을 의미한다. 기계에 대한 발견은 프로이트로부터 유래하여 라캉의 소문자 대상 아(objet a)에서의 부분충동으로 등장한다. 프로이트는 포르트 다(fort-da)라는 아동기의 놀이를 유심히 관찰하는데, 이는 반복에 반응하는 있다-없다 놀이와 유사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 가타리는 아주 길게 설명하고 있다. “아이의 놀이는 실 끝에 달린 실패를 가장자리에 커튼이 달린 침대 밖으로 던지는 것이다. [아이는] 실패가 사라지면 ‘우우우우’라는 소리를 내는데, 프로이트는 이 소리를 독일 어른의 말로 ‘사라진(Fort)’으로 옮겼고, 실패가 다시 나타날 때 아이가 내는 ‘우우우우’하는 소리는 ‘저기에(Da)’로 옮겼다. (중략) 프로이트는 대체로 그것을 자신이 사디즘, 마조히즘, 양가성, 공격성, 그리고 대부분의 신경증 속에서 작동 중인 반복 강박이라는 부른 것의 탓으로 돌렸다.”(P.99~100) 이러한 반복강박은 죽음충동과 같이 부재와 결핍에 대한 반응으로 형성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계에 대한 사유는 가타리에게는 기계학적(mechanic) 기계로 언급된다.

반면 들뢰즈는 반복에 대한 새로운 사상을 『차이와 반복』이라는 책에서 언급하였다. 이는 보편-특수-개별의 변증법에 의해서 포섭되지 않는 특이성이 작동하는 반복에 대한 철학이었다. 이로 인해 생태계의 낮과 밤, 아침, 점심, 저녁, 밀물과 썰물, 사계절 등의 반복이 그저 동일성 반복의 연속이 아니라, 차이 나는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유가 가능해졌다. 그러나 들뢰즈의 차이의 형이상학은 차이가 어떻게 강렬해지고 생산되는지에 대한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하여 가타리는 들뢰즈와의 만남 속에서 욕망하는 기계라는 개념을 통해서 ‘자신의 욕망이 작동하여 원하는 순간 반복은 시작된다’라는 사상으로 발전시킨다. 들뢰즈의 차이나는 반복으로서의 기계는 기계론적(machinic) 기계로 정의되어지며 『카오스모제』의 기계적 이질발생의 소재가 된다.

구조주의는 어쩔 수 없고 영원한 구조를 설정한다. 이러한 불변항으로서의 구조의 설립은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다”라는 방식의 슬로건에서도 잘 드러난다. 어쩔 수 없는 구조는 무기력하고 자율성이 없는 개인을 호명하거나 틀 지워서 자동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구도를 드러낸다. 그리고 이러한 자동주의에 따라 예속된 사람들이 가족, 국가, 집단의 영원성에 따라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방식이 현재의 자본주의 문명의 기획이다. 그러나 네트워크 사회로 이행한 현재에 있어, 사회의 변화는 구조적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작은 기계부품의 기능연관에 따라 네트워크가 움직이듯이 기계적인 차원으로 내려와 있다. 네트워크는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작은 기계부품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의 혁명은 작은 분자단위의 변화가 전체사회에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주는 분자혁명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구조변화에 착목하는 좌/우파들은 사실은 집단과 가족의 영원성에 예속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가타리는 “영원성에 대한 욕망이 구조에 붙어 있다. 반대로 폐지에 대한 욕망이 기계를 만들어 낸다. 기계의 출현은 고장, 파국, 죽음의 위협과 겹쳐진다.”(P.55)라고 말한다.

기계학적 기계는 닫히고 코드화되고 폐쇄된 기계이다. 그래서 전태일 열사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라는 발언을 했던 기계나 기계파괴자인 러다이트나 프랑크푸르트학파인 네오러다이트들이 사물화나 물신주의를 유발하는 기계문명을 말할 때의 기계는 기계학적 기계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기계론적 기계는 네트워크와 같이 열리고 자기생산하는 기계를 의미한다. 이는 사이버네틱스 기술에 따른 사물-기계-인간의 색다른 상호작용을 포함하여, 기술 매개적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해적당의 조류들이나 기계 매개적인 정보공유를 주장한 오픈 소스운동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가타리는 이 책에서 기계를 생태, 생명, 생활을 포괄하며, 신체와 기술기계를 포괄하는 것으로 사고를 진전시킨다. “사회 집합체[집단]들 또한 기계들이고, 신체는 기계이며, 과학적이고 이론적이며 정보적인 기계들이 있다. 추상기계는 이러한 모든 이질적 구성 요소들을 관통하지만, 무엇보다도 통합하는 모든 특징을 벗어나서 불가역성, 특이성, 필연성의 원칙에 따라 그 구성요소를 이질화시킨다.”(P.57)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서로 상이한 기계(반복)이 서로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에 있다. 이에 대해서 가타리는 추상기계라는 보이지 않는 반복의 작용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구체적인 기계들의 연결접속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작용하는 횡단하며 이행하는 추상기계에 대해서 말한다. 그래서 기계적 이질발생이라는 개념이 형성된 것이다.

바렐라는 생명을 자기생산으로 사유했는데, 사회체계, 기술기계, 결정 체계들은 타자생산으로 사유한다. 이에 대해서 가타리는 “기술 기계들로서의 제도는 타자생산의 외양을 띠고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가 기술 기계로서의 제도들을 인간 존재들과 함께 그것들이 구성하는 기계적 배치의 틀에서 고려할 때 그것들은 사실상 자기생산적이게 된다.”(P.58)라고 말하면서 자기생산에 기술기계를 포함시킨다. 이를 통해서 기계론적 기계의 자기생산하며 열린 기계의 의미는 사회시스템과 기술시스템으로 확장시켜 사고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 즉, 자신의 뼈와 살을 만들어내는 생명과 공동체의 자기생산 활동처럼 자기생산하는 기계들로 네트워크와 사회, 기술 등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기술기계를 자기생산으로 포함시키자 문제가 생기는데, 어떤 자기생산의 모습을 보이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 가타리는 계통발생과 개체발생의 측면에서 기술기계의 자기생산을 보여주는 기술의 진화적 리좀의 사례로 “예를 들면 증기 기관의 산업적 출발은 중국에서 그것을 아이들 장난감으로 사용했던 수세기 이후에 일어났다. 사실상 이러한 진화적 리좀은 기술 문명을 일괄하며 횡단한다.”(P.59)라고 언급한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된다. 이질적인 기계들이 연결되고 접속되고 기능연관되어 작동되는 경우는 허다하다. 예를 들어 인간과 기계, 기계와 기계, 생명과 인간, 사물과 기계 등의 경우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작동하는 추상기계는 어떤 기호적 원리에 따를까? 가타리는 이러한 기계적 이질발생에도 불구하고 기계 설비들을 횡단하며 통섭적으로 작동하게 만드는 원리를 도표적 가상성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설명한다. 도표는 자유롭지만 고도로 조직된 기호작용으로 기표와 같이 고정관념으로서 고도로 조직된 기호작용과 구분되는 음악의 기보법, 로봇의 통사법, 수학의 미적분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도표는 이것일 수도 저것일 수도 있는 것으로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지는 못하지만 고도로 조직된 규칙을 내부에 갖고 있다. 도표는 마치 우리 어머니들이 요리를 할 때 양념을 “적당히” 넣어야 한다는 것처럼 자유롭지만 고도로 조직된 기호작용이다. 가타리는 도표적 가상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도표적 가상성들은 우리들을 제한된 통일성이 없는 더욱 집합적인 기계 현상으로 향하게 만드는데, 이 집합적 기계 현상의 자율성은 타자성의 다양한 지지물들에 순응한다.” 즉, 도표적 가상성은 탈영토화하는 횡단적인 좌표를 보여주면서 이질적인 것 사이에서도 가상적인 상호작용을 통해서 연결시키고 접속시키고 작동시키는 추상기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가타리의 생각은 가상성의 영역을 잠재성의 확장으로 보았던 들뢰즈의 생각을 생명, 인간, 사물, 기계부품 간의 연결과 접속으로 확장한 것으로도 평가받는다. 이러한 기계들은 타자성으로써 이질적이고 서로 다른 것이기 때문에 가상적인 것을 통해서만 연결 접속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기계적 이질발생의 복잡화가 이루어지면 기계류를 무한히 횡단하는 프랙털 기계를 생각할 수 있게 된다고 가타리는 사유한다. 즉, 수많은 기계와 상호작용하면서 무한히 조립되고 연결되며 무한계수로 횡단하는 색다른 실존좌표의 등장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비디오 게임기와 카세트테이프, 인터넷, 사진기 등등을 횡단하면서 동시에 생명, 동물, 식물, 광석, 미생물 등을 횡단하는 기계의 가능성마저도 타진하는 것이 프랙털기계라고 할 수 있다. 프랙털 기계는 요새 말하는 스마트 기술이나 빅데이터 등을 미리 예감하는 가타리의 사유를 보여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은 생태계나 공동체 속에서 유한한 생명들이 무한히 연결 접속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우리는 자기 자신과 동일한 존재가 아닌 – 이전, 이후, 여기, 그리고 다른 어디에서나 있는 – 존재, 자신의 가상적 조성을 활성화하는 무한 속도에 따라 무한히 복합한 직조들로 특이화할 수 있고, 과정적이고 다성적인 존재의 존재방식을 재발견할 필요가 있다.”(P.74) 즉 여기서 이질발생은 해체되고 와해된 상태가 아니라, 다르고 특이한 것 간의 마주침을 통해서 공동체와 생태계가 무한하게 재특이화되어 풍부화될 수 있는 지점에 있으며, 이는 프랙털기계의 실존좌표이기도 한 것이다.

분열 분석적 메타모델화의 의의와 구성요소

여기서 분열분석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분열분석은 주체성 생산이 이루어지는 섬광과 같은 순간에 대해서 파악하기 위한 방법론이다. 분열분석은 정신분열증처럼 의미좌표가 흔들려서 아주 색다른 주체성의 언어와 실천이 발생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처럼 가족 내에서 머물며 어떤 고정관념에 따라 기표화되고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무의미하다고 여겨졌던 음악, 색채, 향기, 몸짓, 표정 등의 흐름 속에서 갑자기 출현하는 주체성에 대한 탐색이다. 공동체의 구성원 사이에서 갑자기 이전에 기억에 없던 사람들이 출현하여 색다른 지평을 개방하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인데,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사고나 탐색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생명의 발아와 창조발화의 순간에서 이루어지는 창조적 분열에 대한 지도그리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를 떡갈나무 혁명이라고 부른다. 이 혁명은 아주 작은 도토리가 떨어지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이를 주워 모은 다람쥐들이 실수로 식량 창고의 장소를 잊어버릴 때 갑자기 그곳에서 떡갈나무가 발아되는 것이다. 이는 생명과 생태, 식물과 동물의 우발적이라고 할 수 없는 고도의 행동양식으로부터 유래되는 것이다.

가타리는 분열분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분명히 분열분석은 정신분열증을 흉내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분열증처럼, 화석화된 모델화 체계를 바꾸는 유일한 방식인 비기료적 주체화의 핵심지대에 접근하는 것을 가로막는 무의식의 장벽을 뛰어넘는 데 있다. 분열분석은 무의식 구성체로 들어가는 실용적인 진입로를 알맞게 확장하는 것을 의미한다.”(P.94) 가타리는 정신분열증 환자들이 보여주는 의미화의 모델이 흔들리고 와해되는 것에 대해서 착목하면서, 틀 지워지고 꽉 짜여진 자본주의 문명의 생활방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삶이 재창조될 수 있다는 예감에 따라 탐색된다. 이를 테면 60년대 쿠바의 경제봉쇄 이후의 주체성 생산에 대해서 상기할 필요가 있다. 쿠바는 에너지 위기와 자원봉쇄조치라는 초유의 상황에 직면해서 전체 사회와 다양한 공동체들에서 대규모의 주체성 생산을 이룩한다. 이들이 만들어낸 유기농혁명은 놀랍기만 하며, 좌절과 붕괴의 전반적인 침체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주 색다른 녹색혁명을 이룩하고야 말았다.

가타리는 주체성 생산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분열생성이라고 규정하며, 이를 분석하기 위해서 『분열분석적 지도제작』이라는 주저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주체성 생산은 섬광과 같이 세상을 재창조하며, 기존의 의미의 틀을 해체하고 색다른 질서를 개방한다. 그러한 상황은 정신분열증에 걸린 사람들에게도 나타나는 색다른 세상의 재창조와 같은 순간으로 묘사된다. “그때 부엌은 작은 오페라 무대가 된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모든 종류의 도구를 이용하여, 즉 물과 불, 과일 파이와 쓰레기통, 특권관계와 복종 관계를 이용하여 말하고 춤추고 논다.”(P.95) 마치 정신분열자가 흐름에 따라 감응하듯이 비언어적인 흐름이 공동체를 감싸고 그 강렬도 속에서 색다른 주체성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색다른 주체성은 근대의 책임주체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갖고 있다. 근대의 책임주체는 식별가능하고, 자유의지를 갖는 강건함과 정체성으로 자신을 표시하는 딱딱한 자아의 층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또한 책임주체는 남성-여성, 주체-대상 등의 이분법에 의해서 구분되어지고 식별되어 역할을 할당받는다.

가타리는 색다른 주체성의 가능성에 대해서 다니엘 스턴의 출현적 자아(emergent self)에 대해서 주목하는데 그것은 책임주체와 달리 이행하고 경계를 횡단하며 융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유아들이다. 이러한 유아들의 인지과정과 유사하게 성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아이되기라는 역행적인 변용에서 찾아지며, 아이처럼 흐름의 강렬도에 따라 무언의 춤을 추듯 탈경계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고 보았다. 가타리는 “다니엘 스턴이 출현적 자아라고 부른 첫 번째 주체화 배치는, 태어났을 때에 이미 분명하게 나타나고 2개월까지 전개된다. 모든 언어적 판별성 혹은 신체적 판별성을 벗어나 출현적 자아는 운동 및 수의 형태들, 강렬도들에 대한 초기의 인지 세계를 발전시킨다. 이 추상적이고 무양태적인 형태는 다양한 인지적 등록기에 횡단적으로 설치되며, 유아는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그리고 서로) 이해하는 것을 보고 느끼는 비범한 능력을 지닌다. 분위기적이고 정념적이며 융합적이고 이행적인 출현적 자아는 주체-대상, 자아-타자, 그리고 물론 남성성-여성성이란 대당들을 무시한다.”(91) 출현적 자아는 어머니의 젖에 대한 구강성을 통해서 자신의 반복성의 기계를 작동시키면서 자신의 우주적 되기인 어머니에 준거하여 행동한다. 이러한 출현적 자아라는 개념은 인간이라고 불리던 책임주체나 언어적 주체 이전에 기계적 주체성이 실존하고 있었음을 검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체성 생산을 이루는 욕망의 작용에 따라 완전히 다른 반복(=기계)을 창조할 수 있는 욕망하는 기계를 작동시킬 수 있는 여지가 모두의 기억의 배후에 잠재되고 내재해 있는 것이다.

가타리는 분열분석적 메타모델화를 말하는데, 여기서 메타모델화란 의미화된 모델의 상위모델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마을 만들기가 하나의 모델을 이식하고 복제하는 것에 머문다면, 마을마다의 특이성과 차이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이렇듯 모델화에 머무는 것을 기표화된 질서라고 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 상위모델인 메타모델을 구축함으로써 완전히 다른 방식의 지도그리기가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 가타리의 진단이다. 가타리는 “여기서 메타 모델화하는 것으로서 기술되는데, 이것의 본질적 목적은 다양한 현존의 모델화(종교적 모델화, 형이상학적 모델화, 과학적 모델화, 정신분석학적 모델화, 물활론적 모델화, 신경증적 모델화……) 체계가 자기-준거적 언표 행위의 문제를 거의 항상 우회해 가는 방식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분열분석은 다른 모델화를 배제하고 하나의 모델화만을 선택하지 않는다.”(P.85) 가타리는 프로이트의 콤플렉스와 같이 하나의 모델이나 의미에 환원되고 해석되는 방식을 추구하지 않는다. 대신 복잡화된 지도제작법에 따라 각각의 모델화가 모두 함께 작동하면서도 그 모델화(=의미화)를 횡단하는 방식에 대해서 주목하였다.

가타리가 『카오스모제』에서 보여준 ‘네 가지 존재론적 기능소들의 배치’는 가장 논란거리를 갖고 있는 지도그리기의 유형이었다. 이를 통해 세계, 기계적 계통, 흐름, 영토라는 네 차원을 포괄하고 횡단하는 구도를 그리려고 했다. ‘기계적 담론성’은 대안운동이 기계(반복)을 설립하고 강건해지면서 색다른 삶을 창조할 가능성에 대해서 말하였고, 또한 ‘에너지-공간-시간 담론성’은 가장 국지적이고 유한하며 가까운 로컬 영역에서 활동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무형의 복합성’은 혼자 꾸는 꿈이 아닌 여럿이 꾸는 꿈과 상상은 현실이라는 명제를 드러내며, ‘카오스모제적 구현’은 주체성 생산이 화음과 리듬에 따라 흥과 재미를 가지면서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말한다. 이러한 네 가지 존재론적 기능소들의 배치를 통해서 주체성 생산이 이루어지는 마을, 공동체, 협동조합, 생태계 등을 보다 입체적이고 다채롭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분열분석적 메타모델화의 목적은 ‘주체성 생산’이라는 대안적인 활동과 생태운동의 색다른 과제를 입체적으로 그려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생태학적미학적 패러다임

사람들은 기계(=반복)와 기계 사이를 넘나들며 이를 연결하는 가상실존적인 차원에서 감속하거나 가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상실존적인 차원에서의 주체성의 미학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이 매우 중요해졌다. 그것은 가시적인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윤리와 미학의 차원에서 사유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가 금융자본주의라는 추상화되고 가상적인 체계를 작동시키면서도 그로 인해 가상성과 관련된 지대는 매우 더 중요해졌다는 점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타리는 이질적인 기계들이 마주쳐서 색다른 것을 낳는 과정을 기계적 이질발생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면서도, 이것이 어떻게 가상적인 실존양상으로 연결되고 접속되는지에 대해서 후반부에서 다소 길게 서술하고 있다. 사실 사람들은 눈에 보이고 실체가 분명한 존재라기보다는 도표적 가상에 의해서 횡단하며 이행하고 변이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해질 수도 있다. 아침에는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출근해서 회사에 출근을 해서 일하다가 저녁때는 동창회에 참석을 하며 토요일에는 들과 바다로 기계작동을 바꾸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기계들을 연결하는 가상성이 어떻게 형성되는가가 매우 중요하듯이 말이다. 그것을 우리는 윤리, 가치, 상상력, 꿈, 사랑, 욕망 등으로 설명해왔다. 그러므로 공동체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삶을 연결할 수 있는 공통의 꿈과 욕망이 발생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공동체는 실체가 분명해 보이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영역의 문제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신체와 생명을 포함한 모든 기계와 기계간의 연결을 등가교환이라는 동질발생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등가물로 이루어진 이러한 자본주의는 지독하게도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고, 전 세계를 매끄럽게 흐르면서도 자신의 기표라는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시스템이다. 가타리는 자본주의의 등가교환이 갖는 기계적 동질발생과 구분되는 사랑, 욕망, 정동, 상상 등에 기반한 기계적 이질발생을 말하였다. 가타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더 이상 강조는 다른 등가물들 (자본, 에너지, 정보, 기표)와 같은 자격으로 과정을 전개하고 폐쇄하고 탈특이화하는 일반적인 존재론적 등가물로서의 존재에 두어지지 않는다. 이제 강조는 존재의 방식, 현존재를 생산하기 위한 기계화, 이질성과 복잡성이 지닌 생산적인 실천에 두어진다.”(P.145) 자본주의의 등가교환의 시스템은 늘 똑같고 반복강박에 따라 기계화된 일상을 만들어낸다. 이 속에서 생활세계는 무료하고 지루하며 재미를 쫓아 분열될 수밖에 없는 스테레오타입화된 삶이다. 이에 반해 기계적 이질발생은 기계와 기계 사이에서 완전히 색다른 기계작동을 만들어냄으로써 기존에 기억에 없었던 삶을 창조하고 인식, 성애, 지각작용의 재창조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과의 교환과 거래가 이루어지는 시장보다 공동체가 더 닫히고 폐쇄될 위험에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람들이라면, 공동체 내부에 존재하는 소수자를 사랑할 때, 외부의 이방인에 대해서 열리게 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더 나아가 공동체는 유한한 실존좌표 속에 있으면서도 서로 연결되고 접속함으로써 무한한 접촉경계면을 구성할 수 있으므로, 가상적인 연결 속에서 감속과 가속의 과정을 거쳐 무한 속도로 횡단하는 색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가타리는 “카오스모제적인 전개 동안에 실존적 영토들이 지닌 감각할 수 있는 유한성과 실존적 영토들에 엮여 있는 준거세계들이 지닌 횡단 감각적인 무한성 사이의 접촉경계면이 설치된다.”(P.147)라고 말한다. 즉, 공동체가 무한한 가능성을 갖는 이유는 유한한 생활 속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직조되고 연결됨으로써 무한히 변용되어 횡단할 수 있는 조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공동체가 갖고 있는 카오스모제라는 혼돈 속의 질서는 복잡계 유형의 메타 공동체인 마을과 같은 유형으로 발전할 수 있는 여지는 풍부하다.

통합된 세계자본주의는 세계 어느 곳을 가나 마트, 백화점, 호텔, 편의점이 있는 동질발생적인 공간을 만들어냈다. 또한 똑같은 방식으로 일하고 공부하며 놀고 즐기는 유형의 삶의 방식과 텔레비전, 아파트, 육식, 자동차로 균질하고 편편하고 중화된 삶의 세계를 구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산의 영역에서의 강력한 변화는 사회적 차원을 변형시켜서 네트워크 사회가 되도록 강제했다. 그런 의미에서 분자적인 차원에서의 심원한 변화에 매우 민감한 네트워크 사회이면서도 동질발생적인 삶을 직조한다는 이율배반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생태주의자들은 분자적인 삶의 차원을 변화시킬 주체성 생산을 통한 변화의 전략을 추구해야 할 시점이다. 이는 주체성의 재특이화를 통해서 기성의 질서에 없었던 사건, 상황, 주체성을 만들어감으로써 서로 연결되어 있는 네트워크에 비가역적인 변화를 초래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에 따라 주체성 생산은 생태주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전략 중 하나가 되었으며, 이를 통해서 완전히 다른 세상을 재창조함으로써 생태위기와 생명위기 시대를 맞이하고 붕괴와 위기의 상황에서 고통을 최소화하면서 연착륙시켜야 한다는 임무를 갖고 있다.

주체성 생산은 나이, 성별, 계급, 지위, 명예 등의 위계화된 지층을 넘어서 사랑과 욕망의 탈지층화된 흐름을 전달함으로써 무한한 증식과 변이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공동체를 지층을 횡단하도록 만들어서 욕망과 사랑을 전달하여 사회화학적인 변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마을 만들기는 하나의 지층에 고착된 중산층이 끼리끼리 노는 놀이터나 폐쇄된 공동체가 아니라, 지층을 넘나드는 횡단의 되기(=becoming)의 과정으로 보인다. 공동체가 형성될 때 욕망이 등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주체성 생산의 증후라고 할 수 있다. 욕망이 공동체를 활성화하는 활력이 될 뿐만 아니라, 지층화된 질서를 탈지층화하고, 자신의 거주지인 영토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탈영토화하여 이동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욕망의 되기는 생태적 주체성 생산의 과정에서 필수적인 구성요소라고 할 수 있다. 아이되기, 여성되기, 소수자되기, 동물되기 등은 열린 공동체를 만들고 사랑과 정동, 욕망이 순환되고 재생되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내부역량이라고 할 수 있다.

가타리는 예술을 삶과 연결시키고 실존적인 변이와 횡단을 만드는 소재로 본다. 그래서 가타리는 “이러한 실존적인 기능이라는 각도 – 즉 의미작용이나 명시적 의미와 단절하여 –에서 볼 때, 통상적인 미학적 범주화는 대부분 타당성을 읽는다. ‘자유로운 형상화’ ‘추상화’혹은 ‘개념 체계’에 존거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떤 작품이 하나의 돌연변이적인 언표 행위 생산에 효과적으로 이르는지를 아는 것이다.”(P.170) 즉 가타리는 의미화되고 전형화된 예술작품과 이에 따른 통속적인 향유와 단절해서 삶의 좌표를 바꾸고 돌연변이를 만들어낼 만큼 강력한 예술 작품을 요청한다. 이는 해석적인 차원이나 의미적인 차원의 문화향유적인 행위양식의 속물스러움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색다른 삶을 재창조할 때 예술활동이 큰 역할을 한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쿠바의 경우에도 대규모 주체성 생산이 이루어질 동안 예술이 창조발화하면서 춤, 노래, 흥에 따라 공동체가 움직였던 것을 보더라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결론 : 카오스모제와 주체성 생산

가타리는 주체성을 탐색하고 대안적인 주체성이 생산되는 과정을 생태학의 과제로 보았다. 기존 생태철학과 같이 미리 책임주체가 할당되거나 역할을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어떻게 생태적 주체성 생산을 도모하고 조직해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과 사상을 드러내보인다. 이를 통해서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삶을 재창조하고 분자혁명을 이룰 수 있는 생태적 주체성 생산의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이는 가타리가 동년에 썼던 『세 가지 생태학』에서의 정신생태학을 더 최대한 끝까지 밀어붙인 결과로부터 연원한다. 가타리는 “그리고 주체화 배치들의 느린 재조성 끝에 – 배치들 사이에서 과학생태학, 정치생태학, 환경생태학, 그리고 정신생태학을 접합하는 – 생태철학에 대한 카오스모제적 탐구는 사회적인 것, 사적인 것, 시민적인 것을 잘못 구분하고, 정치적인 것, 윤리적인 것, 미학적인 것 사이에 횡단적으로 관통하는 결합을 근본적으로 정립할 수 없던 낡은 이데올로기를 대체하자고 이제야말로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고 힘 있게 말하였다.

생태적 주체성 생산은 ‘이상한 끌개’와 같이 설명하기 무척 어려운 개념으로 묘사되지만, 우리 사이에서 특이한 생각, 아이디어, 뜻, 지혜를 가진 사람이 갑자기 생겨나는 것을 한번이라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주체성 생산은 그런 의미에서 특이성 생산이며, 동질발생에 의해서 직조된 통합된 세계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생태주의자들의 실천원리라고 할 수 있다. 생태주의라면 금욕주의나 자연주의와 동일시 될 수 없으며, 활력과 상상력, 욕망과 사랑의 흐름에 따라 색다른 생각을 만들어내고 공동체를 풍부하고 다양하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다시 정의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가타리의 생태적 주체성 생산의 개념을 배태한 『카오스모제』는 색다른 생태주의자들의 전략지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생태적 주체성 생산의 탐색에 대한 마무리는 아무래도 가타리의 말미의 글을 통해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속에서는 가타리가 쓴 이 책의 의미와 과제가 녹아들어 있다.


  1. 당대 프랑스 생태주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강령을 주장한 〈프랑스녹색당〉과 좌파적이면서도 원전을 찬성하는 〈생태세대〉로 양분되어 있었다. 이 두 세력으로부터 뭇사람의 지지를 받은 유일한 사람은 가타리였다.

*이 글은 신승철의 책 『철학, 생태에 눈뜨다』(2015, 새문사)에 수록된 글입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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