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의 마주보기] ① 지친 노랑을 품은 초록

새미(솔빈)는 숲정이의 딸이다. 숲정이는 새미의 엄마이다. 엄마는 딸이 살아가는 사회를 자연답게 가꾸기 위해 평생 동안 시민운동을 하였다. 정성스레 선과 정의를 지키려 노력하지만 좌절과 허탈은 점점 커져만 간다. 의지를 잃은 엄마가 그동안의 경험과 생각들을 딸에게 이야기한다. 딸 새미는 지친 엄마, ‘숲정이’를 위로하고 ‘엄마’를 바라본다. 이것은 주고 받는 “마주보기 이야기 글”이다.

새미에게

새미1야.

지하철 안에서 복대를 파는 아저씨를 만났다. 희끗희끗한 흰머리가 무겁게 내려앉은 걸 보니 엄마 또래 같더라. 온열도 되면서 요추도 잡아준다더구나. 만원이면서 기능이 짱짱하여 솔깃하였단다. 볼끈 동여맨 또래 남자사람의 허리를 유심히 보게 되더구나. 아직도 지하철 객차를 돌며 장사를 하는 사람이 있네. 저 남자사람의 고향은 어디일까? 지하철 칸칸을 헤매는 사연은 무엇일까? 엄마에게도 허리를 불끈 동여매는 복대가 있는 까닭일까? 갖가지 생각들은 세로로 세워지는 미간 사이 주름살이 되었단다. 다음 칸으로 이동하는 남자사람의 뒷꼭지가 머쓱하더구나. 저 남자사람에게도 새미 또래의 아이가 있을까?

새미야!

엄마는 삶이 허탈하단다. 허망하단다. 얼마 전, 2022년의 끝자락에서 절망적인 마음으로 권정생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새미야, 기억나니? 선생님 집 뒤뜰, 지붕 골 따라 돌나물을 심었잖아. 선생님 집 앞뜰로 개나리며 산수유가 노랗게 피어날 때, 뒤뜰의 돌나물 별꽃도 빗물 마시며 고요하게 피었을까? 「우리 집 마당에는 고인돌이라고 하는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다. 밤에 이 바위에 올라앉아 하늘을 보면 별빛이 한없이 반짝인다. 밝을 땐 보이지 않다가 어두워지면 나타나는 별세상엔 불을 밝히지 않아야만 할 때도 있는 것이다.」2라고 선생님은 말씀하셨지만 엄마의 세상엔 밝을 때도 어두울 때도 반짝이는 별빛이 없는 것 같다. 권정생 선생님 집을 빙 둘러선 가죽나무, 회화나무, 느티나무, 복숭나무, 뽕나무, 느릅나무, 찔레, 싸리나무, 앵두나무, 두충나무, 뜰보리수, 명자나무, 구기자나무들은 사계절을 지키며 시절을 버티지만 엄마는 도저히 현재를 견딜 수가 없구나. 선생님 집 옆, 도랑물이 반듯한 옹벽을 가진 직선의 하천이 되어버린 현실도 견딜 수가 없구나. 자연으로 하늘에서 흐른 물을 나무뿌리가 머금었다가 또다시 자연으로 흘러가 땅이 내어 준 길 위로 도랑이 또랑또랑 흘러가면 얼마나 좋겠니. 꾸불꾸불한 그 도랑에서 고마리 꽃을 피우고 가재가 숨바꼭질을 하면 사람도 돌멩이를 밟고 건너 정겨운 동무를 만난다면 또 얼마나 즐겁겠니! 일자로 그어진 하천 위의 콘크리트 다리가 생명살이를 평등하게 이어줄까? 평등이란 “고르다.”라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고른 생명살이 하기에는 사람이 개입하는 선택적 불평등이 고통이다. 엄마는 사람들이 강제하는 개입들에 절망한다.

노랗게 슬픈 세월호의 상처가 치유도 없이 이태원의 절규로 되살아났다. 사진 출처 : Republic of Korea
노랗게 슬픈 세월호의 상처가 치유도 없이 이태원의 절규로 되살아났다.
사진 출처 : Republic of Korea

「노랑나비 노랑꽃에 노랑꽃물 먹고 노오랗게 닮아 버렸다.」 엄마도 노랑이 되고 싶어라. 얼마 전 발생한 이태원 아픔은 다시 또 얼마나 비참하니. 엄마는 할로윈이란 문화에 인색했단다. 굳이 남의 것에 열광해야 할까 했지. 그러나 이미 할로윈은 우리 사회에 스며든 문화다. 실재하는 현상을 관념적 사상으로 거부하는 것은 옹성의 보수처럼 배타적 민족주의나 국수주의 아닐까 판단되었단다. 엄마는 흐르는 강물로서 사회현상을 바라보자 결심했어. 끝나지 않는 코로나로 짓눌린 감정이 할로윈이란 기회를 만났으니 즐거워야지. 즐거움을 향한 들뜬 갈망은 ‘아름다운 집중’이라고 생각한다. 청년들의 드글드글 끓는 집중은 순수하여 더욱 아름답잖아. 아름다운 그 찰나, 푸른 빛 청춘들이 새까맣게 죽어야만 하는 세상이 슬프다. 아름다움을 잃는 것에 아파하지 않는 사회. 미친 세상 아닐까? 아름다움을 격려하고 소중하게 가꾸어야 하는 사회가 아름다움을 소외시키다니 이 사회는 제정신이 아니다. 아름다움이 마음으로 파고들었을 때 희열로써 살아갈 의지가 생긴단다. 즐거움을 추구할 권리, 아름다움을 느낄 권리를 뺏는 사회는 미친 사회다. 노랗게 슬픈 세월호의 상처가 치유도 없이 이태원의 절규로 되살아나다니, 우리 사회가 절망스럽다. 미친 세상에서는 미친 사람들의 위선만이 즐거울 수 있단다.

네 언니랑 동갑이었던 세월호의 아이들을 떠올리면 엄마는 여전히 눈물을 끊을 수가 없다. 죽은 아이들을 위해 절이나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은 착한 일이지만 교육으로 학교에서, 사회에서 이야기하지 말라는 부모집단의 주장이 있었다. 서슴없이 엄마에게 집단 폭력까지 해대는 그들에게서 엄마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단다. 아, 이렇게나 다를 수 있는가. 아이들의 죽음 앞에서 ‘차이’로 분리되어 섞일 수 없다니. 차갑게 좌절하였단다. 하지만 용기를 가진 우리는 촛불로 저항했었다. 힘 있게 나의 자리를 지키며 촛불을 들었지. 허리를 불끈 동여맸다. 너와 함께 창동 거리에서 세월호 리본을 나누며 ‘우리’를 호소했던 순간, 우리 세 모녀와 다른 시민 한분, 이렇게 달랑 네 명이 ‘가만히 있으라’ 검은색 행진을 했던 시간들은 지금도 뿌듯하다. 드디어 우리는 박근혜 정부를 “이게 나라냐?” 따져 물으며 새 정부를 열었다. 벅찬 감동이었지. 벚꽃잎 따라 엄마는 하늘로 날아가는 기분이었단다. 그러나 “이게 나라다!”라며 출범한 대한민국 국가는 그래서 제대로 진상규명 했니? 엄마는 시절을 살아내면서 ‘어쩔 수 없었다’란 변명을 자주 듣는다. 건설현장 관계자들은 늘 목구멍이 포도청이란다. 정보과 형사들도 먹고 살려고 하니 어쩔 수가 없단다. 국방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외교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경제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촛불정부는 어쩔 수 없었다며 위풍당당하지만 어디 그게 나라니? 무엇이 잘못되었다면 허물어 버리고 하나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지 않겠니? 그 과정에서 아까운 것도 있고 아쉬운 것도, 갈등도 있겠지만 ‘정의로 오소서’ 희망하며 국민이 국가에게 권력을 줬잖아. 얼떨결에 획득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어중간한 간보기의 정치행보가 결국은. 아, 정말. 엄마는 참으로 ‘지친 노랑’이 되어 버렸다.

「골목길에 우물이 혼자 있다. 엄마가 퍼간다. 할매가 퍼간다. 순이도 퍼간다. 돌이도 퍼간다. 우물은 혼자서 물만 만든다. 엄마도 모르게, 할매도 모르게. 우물은 밤새도록 호비작호비작. 혼자서 물만 만든다.」2 새미는 엄에게 행복을 샘 솟게 하는 우물이란다. ‘이게 나라냐’ 국가로 깊숙이 들어 선 나의 새미도 결국은 ‘혼자’다. 순이도 돌이도 할매도 엄마까지 우물이 밤새도록 혼자서 호비작호비작 물만 만드는 노곤함을 모르겠지. 외로울 거야.

「같은 흙속에 뿌리박고 있어도 하얀 도라지꽃은 하얗다. 망초꽃과 잔대꽃과 어우러져도 하얀 도라지꽃은 조금도 닮지 않는다.」4 하얀 도라지꽃처럼 새미의 하얀 마음을 꿋꿋히 지키시기를. 엄마의 하얀 마음도 같은 흙 속에서 포근하게 꿈틀거려 볼게. 늘 사랑해. 나의 새미.

숲정이에게

당신은 그 긴 세월 동안 하얀 마음을 어떻게 지켰나. 대단하다. 나는 아직 그 마음을 피우기 무섭단 말이야. 
사진출처 : Josh Hild
당신은 그 긴 세월 동안 하얀 마음을 어떻게 지켰나. 대단하다. 나는 아직 그 마음을 피우기 무섭단 말이야.
사진출처 : Josh Hild

안녕, 오랜만이네. 국가로 깊숙이 들어선 새미는 오늘 밤 조금 슬프다. 당신 말처럼 혼자라 슬프다. 밤새도록 혼자 호비작호비작 물만 만드는 우물의 노곤함이다. 집에 돌아오는 길엔 눈이 펑펑 내렸다. 따뜻한 곳에서 자라온 나는 아직도 눈이 신기하다. 눈이 내리면 걸음을 멈추고 혀를 내밀어본다. 열심히 맛봤는데 알고 보니 황사 눈이라더라. 눈 뜨고 코 베인 게 아니라 완전히 눈 뜨고 혀 베였다.

엄마. 나의 이 마음은 하얀색인가? 눈도 하얗더라. 눈은 얼음일까 물일까. 아님 아무것도 아닐까. 얼음처럼 선명했다가 물처럼 연약해지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사라진다. 스며든 걸까. 날아간 걸까. 하여튼 사라졌다. 난 하얀 마음을 지킬 자신이 없다. 졸업이 눈앞에 다가오니 세상도 눈앞에 펼쳐졌다. 사람 죽는 건 일도 아니고 자연 죽는 건 뭣도 아니다. 그런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하얀 마음 가지곤 안될 것 같다. 눈이 녹아 없어지듯 내 하얀 마음도 사라지려나 보다. 스며들까, 날아갈까. 하여튼 사라지려나 보다. 미친 세상에서는 미친 사람들의 위선만이 즐거울 수 있잖아.

당신은 그 긴 세월 동안 하얀 마음을 어떻게 지켰나. 대단하다. 노랑도 이젠 지쳤고 삶이 허망한 요즘인데 어떻게 오늘도 하얀 마음을 흙 속에 포근하게 품을 수 있나. 엄마가 하얀 마음을 흙 속에 심는 이유는 자라나고 피어나려 꿈틀거릴 수 있기 때문이지? 나의 마음 옆에 엄마의 하얀 마음이 같이 심겨져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아직 그 마음을 피우기 무섭단 말이야. 엄마가 내 손 잡아 줄 거제? 내 마음 보듬어 줄 거제?

엄마의 하얀 마음을 지켜주었던 것은 ‘흙’이다. 아무래도 우리의 마음은 녹색 마음이다. 졸업 하니 너무나 막막해서 지나온 삶을 되짚어봤다. 녹색이 다가오더라. 아마 앞으로도 불안함의 연속이겠지. 그럴 때마다 녹색을 따라가려고. 녹색 마음을 지켜내려고. 그래야 내가 행복하니까. 그래야 세상이 행복하니까. 실은 평생 녹색을 외친 엄마가 피곤하고 미웠었다. 근데 이제야 당신이 왜 그렇게 살았는지 알겠다. 엄마는 어린 나의 행복을 위해 그리도 부단히 삶을 태웠구나. 이제는 내가 함께할게. 그러니 오늘 밤 엄마가 지닌 우물의 노곤함을 덜어내길. 흙 속에서 포근히, 평화로운 밤이 되길.


  1. 새미 : 경상도 사투리로 샘, 우물이란 뜻

  2. 동화작가 권정생 글에서 따옴.

  3. 동화작가 권정생 글에서 따옴.

  4. 동화작가 권정생 글에서 따옴.

숲정이

우리 동네를 낮게 아우르는 숲

솔빈

그 순간, 녹색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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