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설하는 자가 아니라 연결하는 자가 리더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혹은 일대일 대화에서 말을 독점하는 이가 리더일까, 아니면 말을 분배하는 이가 리더일까? 중앙집중화된 리더십은 민주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효율적이지도 않다. 게다가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정치적으로 위험하며 폭력적 양태를 띨 수 있다. '연설하는 자가 아니라 연결하는 자가 리더'인 이유에 대해 고민해본다.

모임에서 보면, 가끔 대화를 독점하는 이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말할 분량과 타인이 말할 분량을 고려하면서 조화롭게 대화가 이어지기를 원하는데, 간혹 그러한 ‘균형’에 둔감한 이가 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말 많은 이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에게 발언할 기회를 줄 수 있을까. 그리고 이때, 말을 독점하는 이가 리더일까, 아니면 말을 분배하는 이가 리더일까.

우선, 말 많은 이의 입을 막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시급한 과제이므로 이 문제에 대한 몇 가지 해법을 알아보자. 비공식적인 자리라면 코믹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대응하는 방법이 있다. 나의 경우, 어느 한 사람이 오래 말하면 “앗! 큰일났다. 재미없어졌다!”라고 외치거나, 또는 진지한 이야기가 시작되면, “조금 전까지 분위기 좋았는데!”라고 능청을 떤다. 그러면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모두 웃으면서 대화 분위기가 바뀐다.

이전 세대들이 가르친 중앙집중화된 리더십은 민주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효율적이지도 않다. 사진 출처 : Jana Shnipelson
이전 세대들이 가르친 중앙집중화된 리더십은 민주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효율적이지도 않다. 사진 출처 : Jana Shnipelson

만일 일대일 대화를 하는 경우라면 다음의 방법들이 있다. 우선, 발언자의 말을 충분히 듣는다. 그러다 그의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거나 또는 그 말의 내용이 별로 공감이 가지 않을 때, 긍정이든 부정이든 ‘말’로 반응하지 않는다. 긍정하면 더 신나서 말할 것이고 부정하면 상대는 그것을 반박하느라 말을 더 오래 할 것이다. 한 심리학자에 의하면 이럴 경우, 말이 아니라 ‘모호하지만 우호적인’ 제스처로 반응하라고 한다. 예를 들면, 이야기의 특정 시점에서 갑자기 신나거나 놀란 표정을 지으며(눈을 크게 뜨고 입을 딱 벌리거나, ‘입틀막’도 좋다), ‘넌 대단해’ 또는 ‘다음에 꼭 다시 보자’는 식의 제스처를 취하고는 빨리 그 자리를 뜨라는 것이다. 그러면, 말하던 이는 상대방의 느닷없는 행동에 어리둥절하겠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위의 방식들이, 대화 중에 김을 빼든, 말을 빼든, 혹은 나를 빼든, ‘빼기의 방법’이라면 ‘더하기의 방법’도 있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면서 조금이라고 그 사람이 말을 쉴 때 잽싸게 끼어들어 다른 주제를 제안하고 다른 이에게 발언권을 주는 방식이다. 누군가, 아무도 원하지 않은 민감한 정치적 주제로 오래 말하고 있다고 하자. 그리고 그 발언자가 나이도 좀 지긋하고 또 진심을 담아 말하는 중이어서 섣불리 끼어들기도 어렵다고 하자. 그럴 때는 그분의 말이 좀 마무리되는 것 같은 분위기에 빨리 끼어들어(왜냐면 또 계속 이어서 다른 말씀을 하실 것이므로) ‘이 주제에 대해 다른 분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서 발언자를 바꾸는 방식이다. 만일 대화 주제도 바꾸고 싶다면 ‘그런데 이 문제도 같이 나누고 싶어요’라고 하면서 다른 주제를 제안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의견을 묻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분이 다시 말을 독점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 돌아가며 다 같이 말해 보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이때 특히 말을 많이 안 한 이에게 오래 말하도록 요청할 경우 말을 고르게 분배할 수 있다.

‘더하는 방식’은 판을 바꾸기도 한다. Derek Sivers에 의해 널리 알려진 한 사례를 보자. 햇살 좋은 어느 날 잔디밭에 사람들이 한가롭게 앉아있거나 누워있다. 그러던 중 웃통을 벗어 재낀 한 남성 A가 갑자기 튀어나와 춤을 추기 시작한다. 잔디밭에 있는 사람들은 그를 그저 멀뚱히 쳐다본다. ‘별 미친놈 다 보겠네’라는 표정을 지으며. 그러던 중, 다른 사람 B가 튀어 나가 A의 옆에서 같이 춤을 춘다. 그리고는 앉아있는 자기 친구 C에게 같이 추자고 손짓한다. 그러자 C도 일어나 A와 B 옆에서 춤을 춘다. 이제 춤추는 이는 세 사람이다. 그러자 곧이어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다. 앉아있던 사람들이 서너 명이 일어나 합세해 춤을 추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춤추는 사람들 수가 늘어난다. 이 광경을 보고는 멀리서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사람들이 생기고 그 자리는 순식간에 춤추는 이들로 가득 찬다.

이때 만약 역사가가 있어 이 사건을 기록한다면, 이 춤판의 시작은 웃통을 벗어 제끼고 처음 춤을 춘 A에서 비롯되었다고 쓸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사실 이 춤판의 시작은 두 번째 춤춘 이인 B가 열었고 그것을 현실화한 것은 C이다. 만일 B와 C의 참여가 없었다면 A는 그저 춤을 좋아하는 좀 정신 나간 사람으로 여겨지고 말 일이었다. 이 춤판만이 아니다. 우리의 자랑스런 독립운동의 역사, 민주화운동의 역사 역시, 드러난 주인공 옆에서, 그 주인공을 부추기고 따르고 그를 빛나게 했던 지지자, 조력자들이 진정한 주인공이고 리더이다.

현대로 올수록 ‘드러나는 지도자’가 없는 사회운동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네그리와 하트에 의하면, 지도자들은 계속해서 운동 내부로부터 비판받고 무너지며, 운동 내부는 반권위주의와 민주주의를 중심적 토대로 삼고 있다. 이는 모두의 의식과 능력을 고양하며, 그 결과 모두가 정치적 의사결정에서 동등하게 말하고 참여할 수 있게 된다. 특히 페미니즘 조직들은 전체의 허가 없이는 미디어에 아무도 발언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어떤 특정 인물이 대표자나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게 하는 규칙들을 발전시켰다. 지난번 대통령 탄핵의 신호탄이 되었던 이화여대생들의 시위에서도 지도자는 보이지 않았다.

에리카 에드워즈에 따르면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정치적으로 위험하며 폭력적 양태를 띨 수 있다. 우선 그것은 과거를 허구적으로 제시한다. 즉 다른 역사적 행위자들의 효과를 침묵시키거나 가린다. 둘째로, 운동 자체를 왜곡시키고 민주주의를 불가능하게 하는 권위구조를 창출한다. 마지막으로 이성애규범적 남성성을 이상시한다. 즉 콧수염을 단 슈퍼 남성성의 카리스마가 성공적 사회혁명에 필수적이라는 편견을 갖게 한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다른 이와 “함께 하는” 행위이며 “친구와 신뢰할 만한 동료 없이 행위할 수 없다”. 
사진 출처 : Hudson Hintze
인간의 모든 행위는 다른 이와 “함께 하는” 행위이며 “친구와 신뢰할 만한 동료 없이 행위할 수 없다”.
사진 출처 : Hudson Hintze

리더의 동사인 ‘lead’는 ‘연결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한나 아렌트에 의하면 ‘리더’란 “어떤 일을 시작하고 그 일을 수행하도록 도와줄 동료를 찾는 사람”이다. 사실상 인간의 모든 행위는 다른 이와 “함께 하는” 행위이며 “친구와 신뢰할 만한 동료 없이 행위할 수 없다”. 아무도 혼자서는 자신의 경험으로 객관세계를 그 완전한 모습대로 파악할 수 없다. 만일 어떤 이가 세계를 ‘진정으로’ 있는 그대로 보고 경험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세계를 수많은 사람이 공유하고, 그들 사이에 있고, 그들을 분리시키는 동시에 연결시키”는 것으로서 이해할 때만 가능하게 된다. 세계는 사람마다 다른 모습을 드러내며,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함께 하고 또한 대립하면서 의견과 관점을 교환할 수 있는 한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전 세대들이 가르친 중앙집중화된 리더십은 민주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효율적이지도 않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새로운 사회운동에는 카리스마적 지도자도, 운동의 대변인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익명성을 유지하는 촉진자들의 넓은 네트워크가 거리와 소셜미디어에서 연결을 구축하고 집단행동의 안무를 연출한다. 네그리와 하트에 의하면, 과거 역사에서도 진정한 시민혁명의 주역들은 ‘보이지 않은 존재들’이었으며, 현대의 운동도 이렇듯 “지하에 잠복했던” “민주적 경향들을 한데 모으는 새로운 조직형태들을 실험하는 장”이 되고 있다. 오늘날 해방운동의 지도자들은 등장할 때에 가면을 쓰기도 한다. 지식인도 운동의 대변인이 아니라 운동으로부터 배우려고 하거나 운동에 기여하는 역할을 하고자 한다.

이제 우리가 원하는 리더는 ‘연결하는 리더’이다. 우주에 중력이 있는 까닭은 물질이 외로움을 타기 때문이고, 사랑을 물리학적으로 표현하면 ‘연결’이라고 한다. 말을 오래 함으로써 사람들의 주목을 오래 받으려 하는 것은 어쩌면 외로움의 표현일 것이고,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이 골고루 돌아가도록 시간을 분배하고 사람들을 연결하려는 것은 사랑의 표현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의 연결자가 바로 리더다. 즉 연설하는 자가 아니라 연결하는 자가 리더다.

이나미

한국의 정치이념과 정치사를 주로 연구해왔다. 정의가 구현되고 사랑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정치적 해법은 무엇인지가 주요 관심사이다.

댓글 1

  1. 오늘 데이비드 봄이 선생님과 저 그리고 목소리 로만 만났던 신승철 님을 연결해 주었어요.

    나에게 나는 연결하는 리더가 되고 싶어서,
    선생님께 오랫만에 안부전화를 할 수 있었어요.
    소중한 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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