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가까이] ⑤ 왜 우리 자신을 만드는 것이 정동인가?

[지금 여기 가까이] 시리즈는 단행본 『저성장 시대의 행복사회』(삼인, 2017)의 내용을 나누어 연재하고 있다. ‘저성장을 넘어 탈성장을 바라보는 시대에,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지금, 여기, 가까이’에서 찾고자 하는 이야기다.

기억 저편의 고단한 자취 시절

대학 시절 함께 자취를 하던 친구와 만나 오랜만에 술을 마시다가 예전 이야기들이 자연스레 나왔습니다. 쌀이 떨어져 시골집에서 가져온 꿀로 버텼던 때의 값 비싼 속 쓰림, 짜장 라면 국물을 너무 많이 넣던 날의 불만과 탄식, 마가린에 간장 넣어서 밥 비벼 먹었던 달콤함, 밖에서 커피는 열 잔을 먹으면서 안에서는 쫄쫄 굶었던 때의 손 떨림, 서울역 앞에서 담배꽁초 주워 피던 시절…. 그 시절 이야기를 하면 그땐 왜 그랬을까, 라는 생각도 많이 들었지요. 자취생활의 추억과 애환은 아무리 얘기를 해도 끝나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서울에 살던 그 친구는 부모님께 독립하고 싶다고 얘기해도 허락하지 않자, 어느 날 몰래 부모님의 곗돈을 들고 야반도주를 했습니다. 그리고 저와 자취를 하면서 고난의 시절을 함께 했지요. 지금 이야기하면 재미있는 추억이지만 그때는 굉장히 힘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제가 그 친구와 자취를 했던 이유는 혼자서 자취를 하면서 겪는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혼자 자취할 때 비오는 날 우산을 가지고 가지 않은 날이 태반이었고, 흠뻑 비를 맞고 오한과 몸살에 시달리며 3일 동안 혼자 누워 있던 적도 있었습니다. 제 인생에서는 가장 힘들었던 시간입니다. 그 후로 혼자서 자취할 게 못 된다는 생각에, 기꺼이 집 나온 친구와 함께 자취를 시작했습니다. 물론 친구나 저나 살림이라곤 해 본 적도 없었습니다. 돌봄을 통해서 어떻게 서로에게 기쁨을 만들 것인가에 대해서는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한 사람만이라도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배가 고픈지, 아픈지를 안다는 자체가 참 좋았던 것 같습니다. 혼자 자취할 때는 텔레비전이 저의 유일한 벗이었지만, 피상적인 감정생활을 위한 것에 불과했지요. 반면 함께 자취할 때는 굳이 텔레비전을 틀지 않더라도 친구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에 드는 것도 매력이었습니다. 이렇듯 관계가 있을 때의 정동과 관계가 없을 때의 감정, 기분, 환상은 큰 차이를 가졌습니다.

우리는 정동 즉 돌봄과 살림의 방법에 대해서 잘 몰랐고, 그저 돈이 없는 게 문제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잘 몰랐습니다. 정동의 중요성을 말이지요. 밥 한끼 해결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기획하고 나 자신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 미숙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여기서 정동은 나 자신을 만드는 것, 즉 자기생산의 원천입니다. 오랜만에 친구와 술자리가 무르익어 갈수록 그 시절의 청춘의 방황, 불안, 배회의 기억은 그 시절의 그만큼의 자유의 무게로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정동의 비밀을 몰랐던 미숙한 시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남편은 남의 편인가?

우리에게는 정동노동이라는 개념보다 돌봄이라는 단어가 더 익숙합니다. 사실 돌봄은 모심, 살림, 보살핌, 섬김 등과 함께 정동노동의 일부로 포함되어 있지요. 어떤 협동조합에서 돌봄노동에 대해서 강의할 때였습니다. 저는 가사노동이 사랑할수록 사랑이 증폭되는 정동노동이냐, 아니면 감정과 에너지가 소모되는 감정노동이냐를 물었습니다. 토론회를 참석한 주부들은 주저 없이 감정노동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약간 저는 당황했지요. 그 순간 주부들의 불만이 갑자기 폭발했습니다. 왜 정동노동을 여성만이 해야 하는 것이지요? 돌봄과 정동노동은 여성 불평등의 상징 아닌가요? 등등으로 말이지요. 다시 말해 가사노동은 여성 불평등의 근원이고, 감정노동을 일으키는 주범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주부는 남편이 ‘남의 편’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탈리아 한 여성 페미니스트가 주장했던 “가사노동에 임금지급을!”이라는 테제는 지극히 가사노동을 감정노동이자 자본주의의 재생산노동으로 바라봅니다. 물론 가사노동에 대한 미지급분이 자본주의를 굴러가게 했던 비밀이었다는 지적은 지극히 설득력을 갖습니다. 그러나 가사노동은 돌봄노동으로 공동체를 자기생산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보다 돌봄노동이 더 유구한 역사를 갖습니다. 오래전부터 정동노동은 지속되어 왔으니까요. 즉, 타자생산으로서의 자본주의 재생산이 아닌 자기생산으로서의 공동체의 돌봄도 함께 공존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여성에게만 이러한 돌봄노동, 정동노동, 살림을 책임 지우는 사회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돌봄의 사회화는 새로운 사회적 아젠다가 되고 있습니다. 아이를 돌보고, 노인을 돌보고, 장애인을 돌보는 모든 돌봄노동이 여성에게만 집중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제 아버지 역시 80세 이상의 노인이며, 동시에 1급 장애인입니다. 그런 점에서 어머니께서 주로 돌봄노동을 하지만, 그마저도 힘에 부치고, 한계에 봉착할 때가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돌봄에 관련해서는 너무 개인이 책임질 영역이 큰 상황이고, 돌봄의 가치도 저평가 되고 있은 상황입니다. 이를테면 병원으로 정기적으로 검사와 치료를 받으러 갈 때 이동수단과 이동보조는 필수적입니다. 또한 목욕을 시키거나 할 때도 어머니 혼자서는 무척 힘듭니다. 동시에 어머니께서 24시간 함께 있는 시간이 아니라, 잠시 숨 돌릴 여유를 찾고자 외출할 때 돌봐줄 사람이 절실합니다. 그래서 구청에서 장애인돌봄서비스와 노인돌봄서비스를 알아봤는데, 그 역시 녹녹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물명상법, 어머니의 정동에 대한 가르침

어릴 적 아버지가 텔레비전을 사가지고 오던 날이 기억하는군요. 그때 아버지는 튼튼하셨고, 두 팔에 커다란 텔레비전이 들려 있었습니다. 당시에 텔레비전은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모든 일상은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지요.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서 일요특선영화를 보거나, 최불암이 나오는 《수사반장》이나 《암행어사》라는 드라마, 이덕화 씨가 사회를 보는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같은 프로그램을 봤습니다. 특히 여름밤에는 《전설의 고향》이 저희들을 이불 속에 숨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어릴 적 저는 텔레비전 속에서 세상을 알고, 사회를 알고, 사람들의 심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텔레비전을 사오셨지만, 텔레비전을 닦고, 관리하는 몫은 어머니였습니다. 그래서 텔레비전은 고장이 거의 안 났고, 먼지 한 톨이 묻어있지 않았지요. 아버지는 텔레비전의 소유권을 넘겨받았지만, 텔레비전 주위와 곁, 가장자리에서는 어머니의 정동노동이 숨어 있었던 셈입니다. 물론 남성의 시각에서는 사물의 본질인 소유권을 남성이 갖고 있다고 말하겠지만, 여성의 시각에서는 사물의 곁에서 서식하는 정동에 대해서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겠지요. 사실 세상의 궁극과 본질, 존재이유에 대해서 묻던 철학, 즉 형이상학은 지극히 남성적인 철학입니다. 대신 본질이 아닌 작동, 곁과 가장자리, 주변에 서식하는 사랑, 욕망, 정동, 신체, 감각에 대한 논의는 여성과 소수자의 철학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물의 본질과 경계를 분명히 하면서 “이것은 내 거다”라고 규정(definition)하는 상품 질서의 남성적인 논리가 아니라, 사물의 다소 모호한 곁에 있는 정동과 사랑에 주목하면서 “네 것일 수도, 내 것일 수도”라는 흐름(flux)의 논리를 갖는 증여와 호혜, 돌봄의 여성적인 논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릴 적 어머니는 참 재미있는 분이셨습니다. 걸레를 주면서 거울을 닦아라, 하면서 “너는 누구인지 생각해보라” 하셨고, 오디오를 닦게 하고 “어떤 소리가 들리는지 잘 들어봐라”라고 하셨고, 책 정리를 시키면서 “네가 무엇을 아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신발을 닦으라고 하고, “우리는 앞으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고 했습니다. 이불을 정리정돈하면서 “너의 꿈들을 정리해 봐라”라고도 했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대부분 정리정돈과 청소, 닦기, 쓸기 등에 마치 불교의 간화선처럼 화두를 하나씩 던지곤 하셨습니다. 물론 제가 그렇게 화두를 던진다고 해서 청소 중에 그런 심오한 생각을 했던 건 아닙니다. “귀찮아! 아이구 언제 끝나나”하는 생각으로 어머니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청소를 했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는 사물의 곁과 가장자리에 들어 붙어있는 마음 다시 말해 정동을 잘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것을 ‘엄마표 사물명상법’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물의 곁을 닦고, 쓸고, 어루만지고, 정리하고, 정돈하는 과정에서 어떤 마음이 즉 정동이 생겨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제가 변기를 닦을 때는 더러운 때나 자국 같은 마음이 정화되는 정동을 가질 것이고, 식기를 닦을 때 생명살림의 정동을 갖게 될 것이고, 책을 정리할 때 지혜를 만드는 정동을 갖게 될 것이고, 빨래를 갤 때 조화와 균형의 정동을 갖게 될 것이고, 세면대를 닦을 때 위생과 섭생의 정동을 갖게 될 것이고, 물건을 정리할 때 나의 주변을 늘 정리해두는 정동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릴 때는 어머니의 곁과 주변을 살피고 잘 정돈하도록 마음가짐을 가지라는 정동에 대한 이야기가 귀찮기만 했고 잔소리 같기만 했고 틀에 꽉 짜인 비루한 일상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반대로 제 방을 쓰레기 더미로 만들어 놓는 방식으로 반항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년이 되자 늘 주변을 정리하고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고 우아함과 미학과 윤리를 추구하는 마음과 정동에 대해서 매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왜 그런 화두를 던졌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 마음 속에 어머니가 말씀하셨던 정동의 자리를 늘 만들어두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저에게는 풀리지 않는 삶의 화두처럼 여전히 다가오는 것이기도 합니다.

삶의 이유는 정동에 있다!

삶의 이유는 자연과 우주, 생명의 진실인 생명력과 활력이 불러일으키는 사랑과 욕망, 정동 자체입니다. 
사진출처 : StockSnap
삶의 이유는 자연과 우주, 생명의 진실인 생명력과 활력이 불러일으키는 사랑과 욕망, 정동 자체입니다.
사진출처 : StockSnap

사회적인 발언 속에서 정동은 늘 주변부에 있었습니다. 모심, 돌봄, 살림, 보살핌, 섬김 등이 사회와 공동체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판과 구도임에도 불구하고, 늘 주변부에서 숨죽이고 발언권을 갖지 못했지요. 그것은 실로 비극적이기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정동의 주체성들이 우리의 어머니이고, 아내이고, 여동생이고, 누나이고, 간호사이고, 선생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장하고, 살아가고, 치료받고, 건강하기까지 정동은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동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핵심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억합니다. 제가 실의에 빠지고 좌절하고 우울하고 어딘가에 사로잡혀 있고 지쳐서 멍하게 누워 있을 때, 아내가 저를 붙들어 세우고 말을 걸고 운동을 시키고 살림을 함께 하도록 하고 웃음을 전달하는 등의 노력을 했던 일련의 시간들이 갖는 소중함을 말이지요. 그래서 아침마다 운동을 하고, 건강하게 먹거리를 먹고, 새롭게 계획을 짜고 힘 있게 추진하는 과정에서 아내의 정동의 역할은 100%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저의 겉모습이나 외양, 태도 등에만 주목하는 사람들은 저에게 숨겨져 있는 비밀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제가 사는 삶의 이유에 대해서 묻는다면, 저는 아마도 아내의 사랑과 정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철학에서도 정동에 대해서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안경세공일을 하던 철학자 스피노자입니다. 스피노자가 ‘기쁨’과 ‘슬픔’이라는 정서(affect)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정동의 비밀을 처음으로 파헤쳤지요. 그가 바라본 정서 혹은 정동은 지극히 관계 속에서 자기원인을 갖는 감정들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서로의 관계 속에서 서로의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인 능력을 고양한다면 기쁨일 것이고, 무능력과 예속에 사로잡히는 관계라면 슬픔일 것이라고 말이지요. 그는 정서는 감정이나 기분과 달리 자기원인이 있다고 말하면서, 삶의 이유에 대해서 말합니다. 과연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삶의 이유는 자연과 우주, 생명의 진실인 생명력과 활력이 불러일으키는 사랑과 욕망, 정동 자체입니다. 즉, 우리는 사는 진정한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에, 욕망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돌봄과 자신의 돌봄 때문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자연과 생명의 본성과 자기원인과도 일치한다는 것이지요.

저 역시도 삶의 이유를 굉장히 이상적인 질서나 혁명, 해방된 사회 등으로 멀리 저기 저편의 목적으로 바라본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내와의 사랑이, 아내의 돌봄과 정동이, 저의 돌봄과 정동이 살아가는 자기원인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그것이 일상의 반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삶을 뻔하고 비루하게 보면서 저기 저편을 여전히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사소한 일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자기원인이자 삶을 만드는 원천이 정동, 사랑, 욕망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부터는 하루하루 매 순간이 절실하게 사랑과 정동의 자기원인에 따라 행동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물론 인터넷이나 매체를 통해 유명인이나 연예인 등의 화려한 삶을 들여다보고 선망하면서 저기 저편을 바라볼 수도 있고, 새로운 이상사회를 만들 혁명을 통해서 저기 저편을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세상에 한 사람만이 저를 사랑한다 할지라도 저의 삶의 이유를 찾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정동과 사랑, 욕망이 던지는 지금-여기-가까이에 대해서 더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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