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가까이] ⑫ 작은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

[지금 여기 가까이] 시리즈는 단행본 『저성장 시대의 행복사회』(삼인, 2017)의 내용을 나누어 연재하고 있다. ‘저성장을 넘어 탈성장을 바라보는 시대에,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지금, 여기, 가까이’에서 찾고자 하는 이야기다.

아깽이 모모가 던져준 작은 행복

처음 만남은, 같은 건물 2층의 공방 ‘모람’ 분들이 옆집 지붕 위에서 ‘아깽이(새끼 고양이를 귀엽게 부르는 속어)’가 하루 종일 울고 있다고 저희에게 알려줬을 때부터였습니다. 저희들은 근처에 엄마고양이가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자 말하고 돌아섰지요. 그리고 다음날 역시 같은 건물에 있는 모아다방 사장님이 심각한 얼굴로 저희 별난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어제 옆집 지붕 위에 있던 아깽이가 오늘은 우리 건물 앞에 버려져 있는데, 병들고 배고파 보여서 일단 사료라도 주어야 할 것 같으니 고양이 사료를 좀 나눠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서야 보통 일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달려가서 보니 한 주먹도 안되는 아기고양이가 눈이 다 곪아서 고름으로 덮여있고, 항문에는 커다란 똥이 막혀 있는 상태로 끊임없이 울고 있었습니다. 곧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저희는 부랴부랴 연구실로 데려와서 밥을 먹이고, 바로 동물병원으로 향했지요. 수의사 선생님 역시도 위급한 상황이 찾아올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한 달 반 동안 오줌이 막혀서 위급한 상황, 변비 때문에 밥을 안 먹어서 영양실조에 걸린 위급한 상황들이 수차례나 지속되었습니다. 깡말라서 울지도 못한 채 누워있는 아깽이에게 아내는 분유를 먹이고 약을 먹이고 배를 쓰다듬기를 반복했습니다. 전혀 보이지 않던 눈은 조금씩 나아져서 70~80% 정도 시력은 회복되었지만, 거대결장이 올 정도의 심각한 변비는 아깽이에게 큰 고통을 주었지요. 아내는 단호박을 삶아 먹이고, 건조한 채소들을 가루를 내어 먹였습니다.

보이지 않던 모모의 눈은 조금씩 나아져서 70~80% 정도 시력이 회복되었다. 사진제공 : 철학공방 별난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아깽이가 엄청나게 많은 똥을 누더니, 그날부터 마법처럼 나아져 장난을 치며 발라당을 하는 것입니다. 아내의 미소는 입이 귀에 걸릴 정도였습니다. 아깽이가 똥과 오줌을 싸면 아내는 보물 다루듯이 기뻐하였는데, 물어보니 똥과 오줌, 사료 등을 주워먹고 싶을 지경이라는 것입니다. 아깽이가 놀고 뛰어다니고 그러면서 우리 부부는 정말 행복해졌습니다. 아깽이의 이름은, 최초의 발견자들인 모아다방과 모람의 첫글자를 따서 ‘모모’라고 불렀지요. 그때부터 모모는 우리 연구실의 귀염둥이가 되고, 마스코트가 되고, 막내가 되었습니다. 엄청난 에너자이저인 모모가 다른 고양이들에게 계속 장난을 걸고, 컴퓨터 자판이며 식탁에 올라와서 뛰어다니고, 정신이 없었지만 그만한 행복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모모를 보면서 어쩌면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걸음이 무겁던 퇴근길은 이제, 내일 같이 놀고 싶어서 설레는 퇴근길로 바뀌었습니다. 행복은 작은 생명으로부터도 찾아왔습니다. 지금 연구실에서는 모모라는 고양이의 재롱과 장난에 한 판 난장이 벌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작은 행복은 도처에

중학교 입학식 할 때였습니다. 저는 같은 반 아이들과 인사를 하고, 실내화를 사고, 가족들과 중국집에 함께 갔습니다. 중국집에서 짜장면 한 그릇을 뚝딱 먹어치웠고 집으로 돌아와서 새 공책에 이름을 쓰고 새 교과서를 읽었습니다. 어려운 수학 교과서며, 알 수 없는 과학 교과서, 난해한 영어 교과서 등이 저에게는 새로운 세상과의 접속처럼 신기하고 새로웠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제 공부방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입학식 하루 동안 섬광과도 같은 작은 행복을 느꼈습니다. 그 일련의 과정이 제 삶에서는 굉장한 전율과도 같이 느껴졌으니까요. 새로 산 공책, 새로 산 샤프펜슬, 새로 산 운동화 이 모든 것이 행복을 이루는 오브제였지요. 그날 밤 다음날 등교를 할 생각에 설레어, 잠이 안 오는 겁니다. 약간 흥분되고 기뻐서였을지도 모릅니다.

장면이 바뀌어, 이번에는 대학원에서 학위논문을 마치고 졸업식이었습니다. 졸업식 옷을 입고 부모님과 아내와 함께 사진을 찍고 교정에서 시간을 보냈지요. 사실 저에게는 긴 공부의 과정에 하나의 마침표를 찍었다는 의미에서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대학원 과정 동안 끝도 없는 발제와 논문 준비, 책 읽기 등으로 10여 년을 보냈습니다. 사실 으리으리하게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이 저에게는 거의 없었습니다. 교수라는 그럴듯한 직업은 아예 관심 밖이었지요. 그저 다른 연구자들처럼 열심히 연구하고 공부하고 책 쓰고 생활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졸업식 다음 날에도 저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책을 썼습니다. 생태주의 사상에 대해서 개괄하겠다는 목표 의식은 있었지만, 사실은 연구실 주변의 나비며 꽃이며 길냥이에 대해서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공부하고 글 쓰다 낮잠에 들면 그렇게 편안할 수 없었습니다. 연구를 핑계로 한량과도 같이 살아가는 삶이 저에게는 지속되었습니다. 낮잠은 꿀맛 같았고, 삶은 천천히 느리게 진행되었지요. 그리고 아내가 직장을 그만둔 이후로 아내 역시 천천히 공부하고 토론하고 살아가는 연구실 생활에 적응이 되었지요.

아내와 저는 서로의 옆에서 다닥다닥 자판을 치면서 서로에게 리듬과 화음이 되는 앙상블과도 같았습니다. 조용하게 차분하고 평화로운 일상의 작은 행복이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프로젝트가 끝나거나 책 한 권을 다 쓰거나, 특강을 마치면 우리는 밤늦도록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사실 저는 술을 안 마신 지 10년 정도가 되어서 무알콜 맥주를 마시지만 말입니다. 소주를 좋아하는 술꾼 아내를 위해 건배 정도 해 주려는 마음에 마시기 시작한 무알콜 맥주에 이젠 살짝 취기가 돌 정도입니다. 분위기에 취하고, 사람에 취하고, 기념할 일에 취하고 잠에 들면 행복한 꿈을 많이 꿉니다. 그렇게 저희 나름대로의 리듬과 화음을 갖고 살아가는 자체에 작은 행복들을 찾았습니다. 시간은 무척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졸업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으니까요. 저희의 작은 공동체가 갖고 있는 행복의 정동과 감정은 많은 사람들에게 전염효과를 발휘했지요. 그동안 굉장히 할 일이 많았고,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끝났을 때의 작은 행복을 잘 알기 때문에, 끊임없이 아내와 술자리를 만들 건수를 만들 요량으로 열심히 일했지요. 천상병씨의 시구처럼 인생을 소풍처럼 즐기다 갈 생각입니다.

저는 다름에 대해서 더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사진 출처: Dawn Kim

요즘 아내와 저는 더 미세해지고 작은 행복에 민감해졌습니다. “연대할수록 달라져야 한다”는 프랑스 심리치료사 펠릭스 가타리의 말처럼 “사랑할수록 달라져야 한다”라는 말이 우리에게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의 주름이라는 개념처럼 서로를 사랑할수록 주름이 미세해지고 차이가 미세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이런 질문도 있습니다. “자신과 같은 사람에게 혹은 다른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는가?” 가끔 제가 강의실에서 물어보면, 학생들의 의견은 대부분 양편으로 팽팽히 갈립니다. 저는 다름에 대해서 더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 다름이라는 것이 모순과 적대, 차별로서의 다름이 아니라, 공동체, 생태계, 다양성으로서의 다름입니다. 다르기 때문에 풍부해지고 다양해지고 충만해지는 것이겠지요. 서로의 차이와 주름을 재발견하는 것, 들뢰즈의 발견주의의 의미는 잠재성으로서의 주름의 지절을 더 늘려나가는 사랑이라는 마법과도 같은 인생의 항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점점 얼굴에 주름이 많아지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큰일보다 작은 일에 행복을

연구실에서 하루 종일 생활하다 보면 작은 행복을 느낄 만한 일들이 많습니다. 저희는 범위한정기술이라는 방법에 따라 삶의 영토를 극도로 축소하고, 외부에서의 소식이나 영향을 최소화했습니다. 범위한정기술은 현상학에서는 생활세계라는 개념으로도 나타나는 데, 앎과 지각을 성립시키기 위해서 일단은 삶의 범위를 한정하는 것이 우선순위라는 인식의 기법입니다. 이전에는 세상 소식이나 지구촌 소식이며 과학기술의 발전 등 저의 삶과는 전혀 상관없는 정보성 대화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연구실 고양이 이야기며, 아내의 일상사며, 저의 연구과제 이야기 등 저희 두 사람의 삶과 관련된 이야기가 주를 이루게 되었지요. 사실 어쩌면 정보성 대화는 삶과는 무관한 이야기들인지라 듣거나 말할 때는 재미있을 수 있겠지만, 사실은 삶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대신 연구실이라는 생활반경으로 한정된 영역에서의 이야기는 굉장히 풍성하고 다양하고 삶과 직접적인 상관이 있었습니다. 요리나 발효, 뜸, 수지침 등의 생활의 지혜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팁, 고양이들이 좋아하는 캣글라스 키우는 이야기, 어제 쓰던 책에서 재미있던 구절, 세미나에서 만난 사람들의 특이한 이야기들, 연구실 고양이들의 일상사들, 가족과 친구들에 관련된 사건들 등이 저희 두 사람의 이야깃거리였고, 우리의 앎=삶=함의 범위는 작은 영토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작은 행복이 찾아오는 이유에 대해서 궁금해 합니다. 삶이 비루하고 뻔하기 때문에 같은 장소에서 여러 시간 앉아 있으면 답답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삶에서 느낀 부분은, 우리의 작은 욕망이 우주, 생명, 자연의 방향성과 일치하는 순간에 느껴지는 것이 바로 행복이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근대철학자 스피노자에게는 ‘영원성’이라는 개념이 그것이지요. 즉, 자신의 욕망이 타인의 욕망과 어우러질 수 있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자신의 욕망이 생명의 욕망과 합일되고, 자신의 신체변용과 욕망이 우주와 자연의 변용과정과 일치함을 느낄 때 영원성이라는 합일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스피노자가 말했던 지복, 즉 행복이 찾아오지요, 제가 느끼기에는 그것이 작은 행복이냐 큰 행복이냐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를 테면 고양이가 울어대서 찾아가 물을 먹이고 밥을 먹이고 화장실을 비워주고 그런 다음 고양이가 배를 보이고 발라당하면서 좋아하면 작은 행복이 슬며시 찾아옵니다. 고양이의 욕망과 나의 배려와 욕망이 합일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작은 세계를 마련해 놓고 그 속에서 작은 일들의 변화를 관찰하는 것은 굉장히 흥미로운 습관입니다. 물론 발견주의를 통해서 생활 속 작은 행복을 느끼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대신 더 큰 공동체와 접촉하고, 그 안에서 판을 짜고, 배치와 관계망을 형성하고, 반복을 설립하는 등의 구성주의가 작은 행복에서 필수적인 것도 사실입니다. 들뢰즈의 발견주의와 가타리의 구성주의는 오묘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앙상블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가타리의 구성주의가 우리 시대에서 갈수록 더 절실해지고 있다는 점을 느낍니다. 행복은 외부로부터 우발적으로 찾아오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가 만든 배치와 관계망에서 만들어지고 생성되고 창조됩니다. 그러한 배치와 관계망은 우리 자신의 욕망 즉 우리 안의 생명과 자연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조우하는 질서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작은 행복은 미세하고 다양한 욕망들이 어우러져서 만들어지는 특이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큰 행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작은 행복을 만들어내는 데 노력해 왔다는 점을 제 자신의 삶의 여정으로부터 재발견하게 됩니다.

행복을 뒤로 미루지 말자

행복을 뒤로 미루는 사람들의 특징은, 그들은 오늘을 바로 현재를 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지금-여기의 현실을 나중에로 미루고 더더군다나 그것을 미래에 도래할 목표로까지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작은 행복들이 만들어지거나 찾아왔던 순간도 더러 있겠지만, 더 큰 행복과 목표에 종속시켜버려 작은 행복쯤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지나쳐 버리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작은 행복의 순간에 감정 표현을 하고, 그것을 공유하고, 삶의 의미와 기억의 계기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큰 기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작은 행복 정도야 별거 아니라는 듯이 지나치고 무시해버립니다. 이를 테면 저의 아내의 경우에는 고양이들이 똥과 오줌만 잘 싸도 환한 미소를 지으며 기뻐하고 행복해합니다. 또한 저의 경우에는 하루에 쓸 분량의 글이 마무리되어서 저녁 때 퇴근하면서 작은 행복을 느끼곤 합니다. 또한 아내와 제가 잠들기 전에 도란도란 얘기하다보면 내일이 기다려지고 행복한 꿈을 꾸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작은 행복은 소득이나 명예, 재산, 부, 지위와는 무관한 것 같습니다. 작은 행복은 교감하고 교류하고 공감하는 일련의 삶의 영토에서의 정동이자 감정인 셈이지요.

후배들이나 제자들 중 작은 행복에서 희망과 꿈을 찾지 못하고, 큰 목표에 연연하다가 좌절과 비애, 침울함으로 살아가는 친구들도 간혹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이 어떤 큰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현재의 시간을 회수하고, 현재의 욕망과 삶을 뒤로 미룬 경우입니다. 힘들고 지쳐서 연락한 후배들의 전화를 듣다보면, 고독하고 외로운 삶임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차도남 스타일의 삶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다는 점도 느꼈습니다. 그런 양가적인 측면이 특이하기도 했지요. 작은 행복은 각박하고 바쁜 일상 중에 시원한 사이다와 같은 쿨한 만남으로 찾아온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삶의 작은 영토에서 이루어지는 내 안의 생명과 자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를 테면 식물과 동물, 자연과 어우러져 자신의 안의 생명과 자연인 욕망과 합일되는 것도 가능하다고 전망해 봅니다.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은 결국 작은 행복을 억압하는 결과를 낳게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외롭고 고달픈 삶이 지속될 수밖에 없겠지요.

자신의 삶과 일상의 작은 행복을 뒤로 미루면 마치 큰 행복이 짠, 하며 나타날 것만 같은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무언가의 해방과 혁명을 꿈꾸는 열렬한 활동가들의 경우에도, 작은 행복을 포기하고 앞으로 도래할 큰 행복의 이상향을 쫓는 이들도 종종 발견됩니다. 그리고 작은 행복을 마치 비루한 일상이 갖고 있는 스토리나 소시민의 행복으로만 여기는 경우도 있죠. 그러나 큰 행복은 더 이상 도래하지 않는 사건일지도 모릅니다. 기다림은 부질없는 믿음의 알리바이에 불과할지도 모르지요. 어떤 이론가는 논증과 추론능력을 통해서 큰 행복이 결국 찾아올 수밖에 없다는 유토피아 이론이나 과학적인 합법칙성임을 증명하고 그 자체에서 행복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큰 행복을 위해서 작은 행복을 만들고 발견하는 것을 뒤로 미루면 결국 자신의 실존이나 삶의 영토, 생활세계는 굉장히 축소되고 쪼그라들게 됩니다. 그래서 똑딱거리는 비루한 일상을 언제 벗어나고 도주할지를 가늠하는 삶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고 자신을 구성하는 많은 사람들을 둘러보면 작은 행복은 언제든 가능하고, 이미 가까이에서 여러 가지 색깔과 화음으로 도처에서 발아하고 있는 지금-여기의 사건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작은 행복이라는 우주, 생명, 자연과의 합일의 순간을 통해서 영원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날마다 파티를!

저는 일상이 늘 파티였고, 축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사진 출처: Surface

파티가 따로 있나요? 밥 한 끼도 파티고, 간식시간도 파티고, 차나 하다못해 물 한잔 마시는 시간도 파티지요. 아내와의 일상을 하나로 규정하자면 저는 파티라고 규정하고 싶습니다. 이런 저런 얘기하면서, 함께 하는 매일매일의 시간은 정말 강렬한 파티와도 같았습니다. 물론 술을 마시며 제법 파티다운 파티를 할 때도 있었지요. 술 마실 때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결국 2~3일에 한 번씩은 둘이서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지요. 일상이 파티의 연속이니, 재미와 흥이 나기 마련이지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 부부가 식사나 차 마시는 등의 작은 파티를 벌이는 것은 출근을 위한 준비동작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무슨 일을 해내기 위한 수단이나 도구가 결코 아닙니다. 즉, 그 자체로서 목표가 되어 있었습니다. 밥 한 끼 맛있게 먹고 차 한 잔 맛있게 먹는 일이 목표가 되니, 배를 두드리며 커피 한 잔 마시는 것도 파티가 됩니다. 그래서 작은 행복이 우리 자신의 삶에 깃들어 있게 되는 것이겠지요.

물론 저에게 큰 목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기후변화, 생명권, 생태민주주의, 협동조합 등 이름만 들어도 몇 년 이상 공부해야 할 과제가 눈앞에 산적해 있습니다. 그래서 작업실에서 공부하거나 글을 쓸 때는 엄청나게 몰두해서 작업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생활이 10년이 넘었지만, 저는 일상이 늘 파티였고, 축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아내와 저의 배치와 관계망은 재미있는 설정이나 역할놀이, 별명이 있는 관계망, 아이나 동물, 여성으로 목소리 변조하기, 말도 안 되는 – 아내가 아재개그라는 혐의를 두고 있는 – 하이코미디, 딴소리와 잡설의 천국 건설하기 등 파티에나 어울릴 법한 재미와 흥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점점 개그의 눈높이가 높아져서 웬만한 저의 개그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유머, 개그, 코미디를 개발하기 위해서 고심하고 연구하는 유머개발자이자 개그연구자이기도 합니다.

작은 행복은 굉장히 부자연스럽고 낯선 상황을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파과증과 같은 유머와 해학으로 바꿀 능력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은 행복은 제가 보기에는 90%는 만들어지고, 10%는 발견됩니다. 그리고 만들어지는 것 중에서 99%는 실패하지만 1%는 성공해서 아내의 배꼽을 잡게 만들지요. 단 1%를 위한 노력이 작은 행복의 비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고, 큰 행복을 위해서 지금-여기의 작은 행복을 미루는 것이 아니라 작은 행복을 키우고 돌봐서 큰 행복으로 발전시키는 것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얘기하다 보니 행복 전도사가 된 기분도 드는군요. 저는 지금-여기에서 행복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꼭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생활의 소소한 일상을 잘 살펴보면 작은 행복을 느낄 부분이 굉장히 많습니다. 고달픈 일상, 비루한 삶, 똑딱거리는 생활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주변 사람들과 자연, 생명과 함께해야 할 것입니다. 그때 작은 행복은 슬며시 찾아와 미소짓게 만들 것입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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