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발명] ⑨ 비어있는 주민학교

지역활성화는 주민들 스스로가 필요와 욕구를 드러내고 해결 방법을 찾아 무언가를 해야 한다. 배우고 가르치는 과정이 모두 주민 사이에서 일어나는 ‘비어있는 주민학교’를 통해 개인과 마을을 서로 연결시켜 보자.

결국 지역활성화는 주민들 스스로가 필요와 욕구를 드러내고 해결 방법을 찾아 무언가를 해야 한다. 여기서 전문가들의 역할은 지역주민들이 자율, 자주, 자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지원하고 안내하는 촉진자 정도다. 주민자치능력은 이것과 다름 아니다. 일본에서는 지역활성화 프로젝트에 약 5년의 시간을 이야기한다. 3년은 조사와 워크숍으로 주민들이 자신을 드러내고 필요를 찾아내서 학습하고 프로토타입(시범사업)을 만들어 사업을 시작하는 시간이다. 여기에는 주민들과 활동가들이 서로를 탐색하고 알아가는 1년이 포함된다. 나머지 2년 동안 지역활성화 사업을 개선하고 확충하면서 주민 자립 역량을 키워간다. 이렇게 5년이 지나면 주민들의 활동을 촉진했던 활동가들은 돌아가지만, 때에 따라서 지역주민으로 남아 지역 활동을 이어가기도 한다. 한국은 준비와 실행을 단계에 맞춰 계획적으로 진행하는 일본과는 다르게 준비와 실행이 합쳐지거나 하나의 계기가 생기면 갑자기 빠른 속도로 일을 해내는 문화가 있어 5년보다는 기간이 1~2년 단축될 수 있다.

지역 활성화를 위해 활동가들이 처음 주민들과 함께 하는 일은 워크숍과 주민학교다. 하지만 워크숍은 20:80의 법칙처럼 20%의 의견으로 주도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20%는 기존의 지역 여론 주도층이다. 또 학교는 지역사업의 의례적인 과정이거나 특정사업을 목적으로 준비된다. 두 가지 다 지역 상황에 대한 주민들의 생각과 지역 활동에 대한 주민들의 태도를 고려하지 않은 외부 전문가들의 입장에서 기획된 과정이다. 관심(Attention) – 흥미(Interest) – 욕구(Desire) – 기억(Memory) – 행동(Action)이라는 오래된 롤랜드 홀(Rolland Hall)의 AIDMA 심리행동모델에도 맞지 않는다. 사회적인 보편성을 가진 시민이면서 지역적인 개별성을 가진 주민에게 맞는 주민학교가 필요하다. 관심을 보이고 흥미를 가지고 참여하는,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지역활성화 활동의 주체로서 주민들의 역할을 경험하는 학교 말이다. 새로운 방식의 주민학교가 필요한 이유는 주민들이 아직까지 개인 보다는 공동체의 결정에 따르는 수동적인 주민의 역할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공동체를 생각하기에 앞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그 의견이 지역에서 공동의 일이 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 어렵게 제안한 자신들의 의견이 왜곡되거나 제안에서 그치는 경우도 많다. 지역 활성화를 위한 일들이 오히려 주민들의 지역 활동에 기회가 되지못하고 장애물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주민들 스스로가 과정과 결과를 채워가는 ‘비어있는 주민학교’가 필요하다.

‘비어있는 주민학교’의 사례- 대전시 대덕구 미호동에서 진행한 ‘넷제로주민디자인학교’ 모습. by 넷제로주민디자인학교
‘비어있는 주민학교’의 사례- 대전시 대덕구 미호동에서 진행한 ‘넷제로주민디자인학교’ 모습.
사진 출처 : 넷제로주민디자인학교

‘비어있는 주민학교’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학교와 다르게 배우고 가르치는 과정이 모두 주민 사이에서 일어난다. 학교는 이미 주민 안에 있는 것들을 찾아낼 수 있게 하고 찾아낸 것을 표현하고 일로 만드는 데 도움을 줄 뿐이다. ‘비어있는 주민학교’는 ‘드러내기’, ‘찾아보기’, ‘기획하기’, ‘실행하기’라는 4개의 과정으로 구성된다. ‘드러내기’는 자신 안에 있는 욕구와 마을에 대한 개인의 생각을 꺼내놓는 과정이다. 자신을 찾아보고 좋았던 경험이나, 싫었던 경험, 좋아했던 일,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 등의 개인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다 포함된다. 개인으로 시작해서 마을에 대한 생각으로 진행되는 게 좋다. 마을에서 먼저 시작할 경우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나 일보다는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찾아보기’는 자신이 관심 있어 하는 일과 마을을 연결시키기 위해 마을의 문제와 필요를 찾아보는 과정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인의 관점을 중심으로 마을 일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렇게 하면 어떨까?’하는 아이디어가 나오게 된다. ‘기획하기’는 찾은 아이디어를 최소한의 일(프로토타입 Prototype)로 기획하는 과정인데 정해진 사업 양식을 사용해서 정리하기 보다는 이야기로 정리하는 게 좋다. 처음부터 사업 양식으로 정리할 경우에 아이디어가 가진 장점을 살려내기 어렵고 주민들에게 양식은 기획을 하는데 장애가 되기도 한다. 아이디어를 이야기로 설명할 수 있다면 할 일과 할 수 있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를 나중에 사업 양식에 맞춰 정리하면 된다. ‘기획하기’부터 주민들 사이에서 상호보완적으로 긍정적 영향이 작동되고 각자 흥미 있는 아이디어에 모여서 마을을 위한 아이디어를 준비하게 된다. ‘실행하기’는 프로토타입(시범사업)으로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사업을 시작해보는 과정이다. 일이 시작되면 처음 기획했던 내용에서 살려야 할 핵심적인 내용과 고쳐야하거나 버려야할 개선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피드백을 가지고 다시 본격적인 사업을 준비한다.

네 개 중 ‘드러내기’와 ‘찾아보기’를 앞 단계로, ‘기획하기’와 ‘실행하기’를 뒤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앞 단계 에서는 텍스트 보다는 문화와 예술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게 좋다. 이성적인 활동보다는 감성적인 활동이 익숙한 생각과 행동을 벗어날 수 있게 하고 흥미를 갖고 자연스럽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네 개의 과정 모두 질문이 중요하다. 학교운영자와 강사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고 아이디어와 실행 방법은 모두 주민들이 찾아서 채워야 할 내용이다. 그래서 학교를 준비할 때와 마찬가지로 진행 과정에서 모니터링이 필요하다. 학습 과정마다 주민들의 반응을 관찰하면서 전체 과정을 주민들의 태도에 맞게 다시 조정해야 한다. 강의 내용이 너무 어려우면 내용을 쉽게 바꾸기도 하고 학습 성과가 좋으면 핵심적인 내용을 조금 더 강조하거나 뒤 단계의 ‘기획하기’와 ‘실행하기’의 시간을 늘릴 수도 있다.

이 네 개의 과정을 전체 과정으로 진행할 수도 있고 각각의 과정으로 나누어 진행할 수도 있다. 또 ‘실행하기’ 가 끝나면 본격적인 사업을 위해 ‘심화과정’이 이어질 수도 있다.

대전시 대덕구 미호동에서 진행한 ‘넷제로주민디자인학교’는 ‘비어있는 주민학교’의 사례가 될 수 있다. ‘신나게 배우고 마을에서 쓰자!’라는 교훈으로 준비된 ‘넷제로주민디자인학교’는 앞 단계 ‘드러내기’와 ‘찾아보기’ 과정으로 연기, 사진, 레고, 음식, 글, 미술, 노래, 넷제로 이론 순서로 총 10강의 워크숍을 진행했다. 몸을 사용한 연기는 익숙한 나를 깨트리고 다른 주민들을 같은 눈높이에서 마주하게 했다. 사진은 마을 곳곳을 나의 눈으로 관찰하고 내가 좋아하는 마을 이야기를 만들었다. 글과 그림은 현재의 자신과 함께 있는 과거와 미래의 나를 드러내고 마을에서 함께 살아갈 이웃을 만나게 했다. 음식은 마을에서 나는 채소를 사용하여 넷제로에 대해 알게 하고 마을에서 내가 할 일을 찾게 했다. 노래는 모든 활동의 결과물로 마을에 대한 애착을 가져다주었다. 마지막 넷제로 교육을 넣은 이유는 학교를 정리하는 의미와 그 동안 형성된 신뢰와 관계를 기반으로 교육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총 10강은 순서가 있지만 각 강의는 상호영향을 주고 앞 강의가 뒤 강의의 교재가 되기도 한다. 이 과정 속에서 주민들은 자신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신이 생각하는 마을과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에너지전환마을의 넷제로 생활을 경험할 수 있었다.

‘비어있는 주민학교’는 원칙이 있다. 즐거워야 한다는 것, 공개적이라는 것, 전체의 관점이 아니라 자신의 관점에서 시작한다는 것, 주민 사이의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론과 문화예술 방식의 많은 주민 교육이 있어왔다. 하지만 이론적인 교육은 주민들에게 흥미와 관심을 끌지 못하고 오히려 교육에 대한 피로도만 높였다. 문화예술교육은 마을에서의 목적지향적인 활동이 부족했다. 가장 중요하게는 주민 중심이 아니었다.

‘비어있는 주민학교’는 나와 마을을 알아가고 서로를 연결시키는 과정이다. 익숙하게 지내온 나와 마을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고 그 사이에서 찾은 일로 나와 마을의 내일을 함께 준비할 수 있게 한다.

이무열

지역브랜딩 디자이너. (사)밝은마을_전환스튜디오 와월당·臥月堂 대표로 달에 누워 구름을 보는 삶을 꿈꾼다. 『지역의 발명』, 『예술로 지역활력』 책을 내고는 근대산업문명이 일으킨 기후변화와 불평등시대에 ‘지역이 답이다’라는 생각으로 지역발명을 위한 연구와 실천을 하며 곧 지역브랜딩학교 ‘윤슬’을 시작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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