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통신] ⑧ 마을논이 큰 갓 아래 서도가리

1952년 비조마을에서 만든 계회의 계칙과 모임을 기록한 책이야기입니다..

유물 발견!

2018.10.3. 비조마을회관 청소를 도와주는 지우친구 아빠들. by 김진희
2018.10.3. 비조마을회관 청소를 도와주는 지우친구 아빠들.
사진 출처 : 김진희

마을회관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우 학교 친구네 아빠들이 도와주러 왔습니다. 책장을 몇 개나 옮기고 책을 정리하다가 책장 위에 얹혀져있던 종이뭉치를 발견했습니다. 끈으로 묶인 책입니다. 오래된 한지에 사람들 이름이 한자로 쓰여 있습니다. 고대 유물이라도 되는 듯 조심해 살펴봅니다. 맨 앞장에는 녹슨 열쇠가 끈에 달려있습니다. 이 열쇠는? 혹시 보물상자 열쇠일까? 그럼 책 속에는 보물지도가 있을지도… 라고 생각하며 글씨를 살펴봅니다. ‘계칙 1. 계명은 리중계(里中契)라고 칭함’이라고 적혀있습니다. 마을에 계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천천히 읽어보고 싶었지만 청소하던 중이라 따로 치워둡니다.

물론 예상하셨겠지만, 예상대로랍니다. 잘 치워두며 다음에 읽어봐야지 하다가 잊어버린 거죠. 그러다 갑자기 어디 뒀더라 하며 찾아보았습니다. ‘커먼즈’라는 말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생태적지혜연구소에서 온라인으로 개최한 ‘제1회 생태적 낭독회’의 주제였습니다. 생태적 지혜연구소 웹진에 글을 기고하는 필진이 많은데 주제어를 하나 정해 지난 글들 가운데 몇 편을 같이 낭독했습니다. 커먼즈는 공유지, 공유재 같은 걸 말한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옛날에 두레나 정전 같은 것도 있어서 마을에서 공동으로 울력을 했답니다. 그래서 청소하다 발견한 그 책이 생각났어요.

1952년에서 1989년까지의 기록

계칙 맨 앞장. by 김진희
계칙 맨 앞장.
사진 출처 : 김진희

처음 기록한 날짜가 임진 3월 초(初)3일입니다. 1952년이죠. 무려 67년 전이네요. 마을에 필요한 그릇류를 공동으로 구매해서 길흉사에 쓴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계원이든 비계원이든 모두 빌려서 쓸 수 있습니다. 계칙 뒤에는 식기수량 내역과 계원들의 이름이 적혀있습니다. 구입한 물품의 품명, 수량, 금액이 있는데 접시를 ‘졉시’로 쟁반은 ‘졍반’으로 표기한 걸 보니 더 옛날 책 같은 느낌이 났답니다.

마지막 기록은 1989년 구(旧) 정월 7일입니다. ‘사용료 본부락 5천원, 타부락 1만원으로 정함’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붓글씨로 시작되어 볼펜글씨로 끝났어요.

처음 계가 생겼을 때의 계칙을 소개하겠습니다. 책장을 넘기는 곳은 종이가 떨어져 나간 곳이 있어 못 읽은 글자도 있고 무슨 글자인지 모르는 한자도 있어 ‘?’ 표시를 했습니다. 앞 뒤 문맥을 보면 뜻은 짐작이 갑니다.


계칙

  1. 계명은 이중계(里中契)라고 칭함
  2. 계의 목적은 기구(器具)를 매수하여 상호간 길흉사에 사용하기로 목적으로 한다.
  3. 계원 57명으로 조직하였이나 가입탈퇴자 유(有)할 시는 총액에 의지한다.
  4. 계금은 매인당 5천원 갹출하고 회실 매?금 사만오천원과 합산하였음
  5. 유사(有司) 1명을 둔다.
  6. 유사는 기기를 보관 ??을 감독하고 금전을 관리한다.
  7. 사용요금은 계원이나 타인이나 동일하다.
  8. 사용요금은 1차에 한하여 5천원을 정하되 계회시 경정할 수 있다.
  9. 사용타가 파괴(破壞)할 시는 동일한 물품배상 하기로 한다. (계회시 기구를 ??하야 사용치 못할 기구는 유사가 ??함)
  10. 1차사용은 당일 간으로 정하고 기익일 반송할 것이며 만약 1일이라도 경과할 시 배액을 징수함

계원명부(생략)
63명

식기수량내역

대접 35, 탕기 40, 종자 30, 접시 100, 술, 술잔・사기잔 10, 쟁반5, 주전자 4개, 반 20

내역

계칙을 정한 날, 임진 3월 초(初) 3일. by 김진희
계칙을 정한 날, 임진 3월 초(初) 3일.
사진 출처 : 김진희
  1. 330,000원정

자본금 총액 330,000원정 기 품명 사발, 50?), 2,800 대접 20(?), 2,800 탕기 36, 19,000 종자 20, 9,000 접시 36, 27,000 술(숟가락) 2속 3,600 술잔 3개. 10,000 졍반 5, 3,400 주전자 1개 13,600 반 2개 105,000

전체 매수합계금 326,500원정
임진(壬辰) 3월 초(初)3일 회계시
이상 실제금 3,500원

유사 한무홍


동네그릇, 마을논이 큰 갓아래 서도가리, 마을화전

마을에서는 어떻게 계를 운영하셨는지 어르신께 여쭤봤습니다. 책을 살펴보시며 계원들의 이름을 보시더니 “여기는 우리 큰 아버지, 저 아래 사는 병원에 다니는 사람 부친, 호걸이 할아버지, 우리 아버지, 윤오 아버지… 아는 사람 다 있네. 이런 책이 아직 있고 물어봐주고 고맙네.”하십니다.

옛날에는 결혼할 때 잔치를 하면 5일 정도는 하거든. 사람들이 오니 그릇이 필요하지. 마을공동으로 쓰는 그릇이 있어서 돈을 얼마내서 사용하고 다 끝나면 그릇을 헤아려서 하나도 손실없이 하고 하나라도 깨지면 사놓아야 돼. 책임 맡은 사람이 있어서 그릇을 갖다 주고 맞는가 안 맞는가 헤아려서 모지라면 물어내고. 상자를 만들어서 회관에 보관했지. 사람이 돌아가시면 초상 때 일을 집에서 하는데 집에는 그릇이 많이 없으니까.

마을논이 큰갓(마을 동쪽에 있는 산)아래 서도가리(세조각) 있었지. 소작을 줘서 소출 나는 건 자기가 하고 얼마는 마을에 줬지. 모아서 마을 화전도 하고 옛날에는 봄 되면 화전을 안 빼고 했거든. 날을 정해서 꽹과리치고 풍물치고 춤추고 놀았지. 떡도 만들고 탁주도 집에서 했거든. 동제할 때도 쓰고 마을에 필요한 걸로 썼지. 지금은 마을 논이 없고 동제 지내는 데에 땅이 좀 남아 있지.

즐겁게, 같이, 하기

예전에는 계를 만들어 마을에 필요한 물품을 사고 품앗이를 해 농사를 지었다면 요즘은 마을에서 공동으로 할 필요가 있는 건 무엇일까. 예전에 길을 내고 저수지를 만들 때 울력을 했듯이 할 수 있을까. 모두에게 똑같이 절박하게 필요하다면 하겠지만 그런 게 있을까. 이젠 절박함보다 즐겁게 같이 할 수 있는 걸 해야겠지요.

김진희

만화리 비조마을에 살며 만가지 이야기가 어우러지는 마을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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