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핵운동 특집] 책임과 윤리의 주체형성으로 탈핵운동의 진화를 꿈꾸며

2020년 6월 5일부터 6일까지 이틀 동안 경주 월성 원전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맥스터) 추가 건설 찬반을 묻는 민간 주도의 주민투표가 울산북구 지역 34개 투표소에서 진행됐다. 그 결과, 주민 5만 479명이 참여해 94.8%가 반대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용후 핵연료 임시저장시설'을 영구처분장 대책도 없이 증설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울산시민들의 뜻이 그만큼 확고함을 확인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번 투표가 주민투표법에 근거하지 않는 민간주도 주민투표라는 점이다. 월성원전으로부터 반경 7~20㎞에 거주하는 울산 북구주민 약 21만 8000명은 핵폐기장 추가 건설의 이해당사자 임에도 불구하고 행정구역이 다르다는 이유로 건설 진행 과정에서 완전히 배제되었기에, 코로나19 등 여러 가지 당면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민간 주도로 대단위 주민주표를 결행하게 된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 주민투표의 과정과 성과를 짚어본다.

지난 6월 초 울산 북구에서 이루어진 핵폐기장에 맞선 주민투표1는 후쿠시마 이후 10년간 이어졌던 한국 탈핵운동의 저력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탈핵운동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나갈 단초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4.13 총선과 코로나라는 어려운 조건에서 이뤄진 주민투표에 5만 여명의 시민들이 참여했고 94.8%가 반대에 투표했다.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 이후 어려운 시기를 건너고 있던 탈핵운동에겐 긴 가뭄 끝의 단비였다. 후쿠시마 이후 탈핵운동의 흐름 속에서 이번 울산북구주민투표의 의미를 천천히 생각해본다.

6월 5일~6일 이틀간 34개 투표소를 설치하여  진행한 울산북구주민투표.  사진제공 : 탈핵울산시민공동행동
6월 5일~6일 이틀간 34개 투표소를 설치하여 진행한 울산북구주민투표. 사진제공 : 탈핵울산시민공동행동

#1. 안타까운 실수, 팔십 평생 처음 반대를 찍으려 했는데 ···

이틀 동안 내가 투표 사무원으로 일한 곳은 농소2동 7투표소였다. 아파트 안에 주로 배치된 다른 투표소와 달리 6월 초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는 도로 한가운데 허허벌판이었다. 도대체 누가 이곳까지 뙤약볕을 걸어와 투표할까 초반부터 노심초사했다. 하지만 이틀 동안 700 여 명이 넘는 주민들이 이곳 투표소를 찾았다.

새벽 6시부터 시작된 첫날 투표에 일찍 찾아오신 팔십 대 할아버지가 투표하자마자 투표용지를 보여주시며, “어, 이거 잘못 찍었네! 반대를 찍어야 했는데 찬성을 찍어 버렸네. 팔십 평생 찬성만 해서 나도 모르게…”하며 크게 상심하신다. 공개되어 무효표가 되어버렸지만, 투표 참여 자체로 이미 큰일을 하신 거라며 거듭 위로를 드린다. 정부가 하는 일이라면 평생 찬성하셨다는 어르신이 이번엔 왜 반대를 하게 되었을까?

“그런 위험한 시설이 사람 사는 동네 가까이로 오면 안 되지.”

단순 명쾌한 상식이다. 그러나 핵발전소나 핵폐기장으로부터 조금 더 떨어진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소 복잡해지는 문제가 된다.

“그러면, 핵폐기물은 어디로 가야 하는데?”, “이 좁은 땅에 어디 갈 데도 없는데, 이미 있는 곳에 더 짓는 게 효율적이고 경제적이지.”

아무리 위험한 시설이라도 자기 집 옆이 아니면 경제적이고 효율적이고 어쩔 수 없는 대안이 된다. 이것이 안락함의 전체주의가 만들어내는 소비자들의 심성이다. 그가 과학자이건 교수이건 언론인이건 정치인이건 상관없다. 핵시설과의 물리적 거리가 그의 객관적이고 경제적인 주장을 가능하게 한다. 아무리 신념에 찬 찬핵주의자라 해도 핵시설 가까운 곳에 집을 사거나 땅을 사는 것으로 자신의 주장을 증명해 보인 사람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후쿠시마 이후 탈핵이 큰 흐름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지만, 현실문제에 직면해서는 여전히 ‘안전’이냐 ‘경제’냐는 이분법 논쟁을 맴돌고 있다. 핵산업으로 경제적 이익을 얻는 노골적인 찬핵주의자를 논외로 친다 해도, 핵발전소와의 물리적 거리가 때로는 노골적인 찬핵으로, 또는 어쩔 수 없는 대안으로, 또는 무관심으로 자신의 입장을 결정한다는 의심을 벗기 어렵다. 전기를 소비하는 대다수 시민들의 ‘님비’현상은 핵시설로 인한 지역주민들의 고통을 애써 외면하며, ‘돈(보상금)’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긴다. 심지어 그들의 저항을 보상금을 더 받으려 하는 거 아니냐는 도덕적 무시까지 덧붙이기도 한다. 지난 40년 동안 이 좁은 땅덩어리에 세계 밀집도 1위로 빽빽이 핵시설이 들어 설수 있었던 것은 반민주적인 정권의 폭력에 힘입기도 했지만, 대다수 소비자 시민들의 ‘님비’현상도 한 몫 한다. 이것을 뒤집었던 것이 후쿠시마 사고였는데, 핵발전소의 폭발가능성과 그 위험이 주변지역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생생한 교훈 덕이다.

후쿠시마 이후 탈핵진영은 3가지 목표 – 노후원전 폐쇄, 신규원전 중단, 재생에너지 확대 –를 중심으로 활동해왔다. 이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안전한 전기 에너지 사용’이라 할 수 있고, 여기에는 ‘에너지 사용에 대한 책임’과 ‘에너지 정의’가 빠져 있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2실패는, 경제논리가 중심을 차지하면서 이러한 한계가 집약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기 에너지 사용에 있어 ‘정의’문제를 사회 전면에 제기한 것은 밀양송전탑반대투쟁3이었다. 밀양투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여성, 청소년, 노동자 등 다양했고, 이들은 도시 소비자의 무지와 무책임성을 자각하면서 책임과 윤리의 새로운 주체형성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핵발전 사용에 대한 무한한 책임성을 요구하는 핵폐기물은 대다수 시민들의 관심 밖이었고, 탈핵운동진영 내에서조차 물리적 거리에 따라 관심의 온도차이가 컸다. 지난 몇 년간 핵폐기장에 대한 문제를 핵발전소 주변지역인 영광, 경주, 울산, 부산 탈핵단체들이 꾸준히 제기해왔지만 전국의 관심사로 모아지지 않았고 지역문제로만 국한되어 왔다. 2016년 박근혜 정부는 고준위 핵폐기물에 대한 공론화를 통해 원전단지 내 임시저장소 확충을 무한정 가능하게 했다. 이에 대한 문제제기가 꾸준히 이어져온 결과 문재인 정부가 이를 재검토하겠다면서 시작한 것이 ‘사용후핵연료(핵폐기물) 관리정책 재검토위원회’가 추진한 공론화이다. 그러나 월성원전 내 맥스터 추가 건설 일정에 맞춰 조급하게 진행하는 형식적인 공론화에 머물렀고, 재검토위원장조차 공정성에 문제를 제기하며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울산의 북구주민투표는 핵폐기물에 대한 전 사회의 책임과 관심을 촉구하며 현재 산업부가 추진하는 공론화가 실질적인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허울뿐인 것에 대한 문제제기로 시작되었다.

#2. 무기력과 패배감에 맞서는 끈질긴 싸움

울산은 동쪽으로 동해 바다를 길게 끼고 있는 아름다운 해변을 가진 도시이다. 하지만 그 양쪽 끝에는 북으로 6개의 월성핵발전소와 핵폐기장이 남으로 8개의 고리핵발전소와 핵폐기장으로 둘러싸인 기이한 도시이다. 핵시설로는 압도적으로 세계 최다이자 최고 밀집도이며 가장 많은 인구가 모여 살고 있다. 월성단지로부터 불과 8km 이내인 정자동에는 고층 아파트들로 신도시를 이루고 있다. 이런 형국을 사람들에게 얘기하면 처음엔 너무 모르고 있었다는 점에서 놀라고, 다음엔 대책 없는 현실에 대한 무력감에 압도당한다. ‘핵’에 맞서는 싸움은 무기력과 패배감에 맞서는 싸움임을 매번 뼈저리게 느낀다. 핵시설이 지진 활성단층 위에 서 있다는 것을 2016년 경주지진으로 밝혀졌음에도 우리 사회가 어쩔 수 없는 현실로 여기며 침묵하는 것도 그러하고, 백만 년이 지나도 해결할 길 없는 핵폐기물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는 패배감을 주며 인간이 책임질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시간의 무한성 앞에 주저앉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맥스터(고준위핵폐기물 임시저장소) 추가 건설에 맞서 울산의 탈핵활동가들은 주민투표 외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막상 결단하기는 너무 어려웠다. 없는 것에서 새로 짓는 것도 아니고 이미 있는 핵폐기장에 추가로 더 짓는 것이라, 이미 버린 땅이라 어쩔 수 없는 게 아닌가란 패배감이 짙게 깔려있었다.4 무엇보다 인구가 너무 많다. 기존에 부안, 삼척, 영덕, 기장에서 주민투표가 있었지만 규모에서 비교가 안 된다. 울산 전체는 아예 엄두도 못 내고 월성원전단지로부터 가장 가까운 북구만 해도 투표유권자가 부안에 비해 3배, 영덕에 비해 5배가 많은 17만 명이 넘는다. 더구나 주민투표법상으로도 행정상 경주 사안이라 울산에서는 주민투표법 대상이 안 된다. 한마디로 법을 이용하지만 법을 넘어서야 했고, 투표를 잘했다 해도 법적 권한 없이 오로지 정치적 힘에 의지해야 했다. 확신이 없는 결과 앞에서 지역사회 또한 동의하기 어려웠다. 시민단체들이 현실성 보다는 당위에 가까운 주장에 부족한 인력을 주민투표에 오롯이 집중하기도 어려웠고, 그나마 영향력이 큰 노동단체들도 자신들의 현안으로 바빴다. 주민투표를 주장했던 이들도 실패할 경우 닥칠 후폭풍에 대한 부담감과 주민투표 방법을 둘러싼 논쟁으로 지쳐갔다. 주민투표법이 요구하는 1/3 이상의 투표율을 위해선 6만 명의 투표인명부를 작성해야 그나마 승리를 장담할 수 있고, 이 과정 자체가 말 그대로 발바닥에 불나게 뛰어다니며 한 사람 한 사람 만나 설득해야 한다. 인명부 작성을 위한 서명뿐만 아니라 투표 당일 필요한 인력만 해도 어림잡아 1천명은 모아야 한다. 그런데 전국의 탈핵 활동가들도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 이후 기운이 많이 빠진 상태여서 연대를 요청하기 어려운 상황에다 4.15 총선에 코로나까지 겹쳤다.

그럼에도 주민투표가 울산 지역 시민사회의 힘을 집중시켜 대규모 시민들을 직접적으로 만나 탈핵을 이야기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고, 이 자체가 실질적인 공론화 과정이라 여겼기에 피할 길도 없었다. 그리고 삼척과 영덕, 기장의 주민투표가 박근혜 정부의 일방적 추진을 막았는데, 설마 문재인 정부가 박근혜 정부보다 못할까, 이런 ‘설마’하는 마음도 있었다.

투표결과와 주민들의 지지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한 채 출발했지만, 막상 서명 작업을 시작하자 나날이 뜨거워지는 주민들의 호응은 놀라웠다. 울산 북구 주민들은 진정으로 분노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이렇게 위험한 시설이 지난 30년 동안 우리 동네 뒷산 너머 있었는데 왜 우리는 몰랐던가? 그리고 왜 우리에겐 의사 표현할 권리조차 없는가? 그 놀람과 분노가 불안과 두려움의 코로나도 뚫고 5만 479명이라는 놀라운 투표 참여로 나타났다. 한 여성은 투표 마지막 시간 30분을 남겨놓고 신분증을 회사에 두고 왔다며 발을 동동 굴러 우리를 안타깝게 했고, 투표 막바지에는 이미 투표한 시민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화를 하며 투표를 조직하기도 했다. 주민들이 보여준 적극성과 지지 사례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이것이 이번 주민투표의 가장 큰 의미이다. 에너지 소비자에서 에너지 민주주의의 주체로 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 뒤에는 패배감과 무기력에 맞섰던 지역사회의 끈질긴 노력이 있었다. 2020년 새해부터 북구주민투표를 위한 본격적인 서명운동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2월 1만1484명의 북구 주민들의 서명을 받아 주민투표 청원을 할 수 있었다. 산업부는 이를 무시했다. 이제 민간주도의 주민투표를 실제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3월24일 주민투표를 위한 운동본부를 결성했으나 코로나로 주민들을 직접 만나는 모든 활동은 중단해야 했다. 4월28일 주민투표위원회를 구성하고 5월 들어 코로나가 안정세로 접어들어서야 본격적인 서명운동에 들어갔고, 불과 20일 만에 투표권자 3만5천5백명이 넘는 선거명부를 작성했다. 이 동안 울산지역사회는 나날이 아파트와 거리를 돌며 저녁 늦게까지 주민들을 만나 서명을 받았는데, 북구 아파트 6만4621 세대 가운데 거의 50%에 가까운 3만381세대를 방문했다. 가히 놀라운 집중력이었다.

전국의 연대도 이어졌다. 곳곳에서 후원금을 보내왔고 단체들은 활동가들을 파견하며 적극적으로 연대했다. 사전투표와 34개 투표소를 설치하여 진행한 본투표5에 선거사무원과 자원봉사자, 투표명부 입력과 개표 사무원 등 연인원 3천명이 넘는 규모의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였다(자료 탈핵신문78호). 가히 놀라운 연대였고,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한풀 꺽였나 했던 탈핵운동이 여전히 저변에 버티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민투표 명부를 작성하기 위한 서명운동에 주민들의 호응은 뜨거웠다.  사진제공 : 탈핵울산시민공동행동
주민투표 명부를 작성하기 위한 서명운동에 주민들의 호응은 뜨거웠다.
사진제공 : 탈핵울산시민공동행동

#3. 생태민주주의를 향한 새로운 주체를 꿈꾸며

“어디든 갈 데가 없다” 이것이 울산북구주민투표 결과이다. 안면도, 굴업도, 부안에서도 이 사실은 이미 증명되었고 울산 북구 주민투표가 반복해서 확인해 주었다. “당신의 집 뒷산 너머에 핵폐기장이 들어서는 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우리나라 어느 지역의 어떤 주민들을 향해 물어도 되돌아오는 답은 이렇다. “안 된다.” 전기를 많이 쓴다는 서울 시민도 경기도

시민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굳이 공론화를 하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다. 그럼에도 공론화를 해야 할까? 가뜩이나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이후 공론화에 대한 반대 목소리도 높다. 그럼에도 나는 공론화가 필수라고 여기며, 다른 방식으로 다른 내용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공론화여야 하는가? 지난 6월20일 산업부의 일방적이고 형식적인 공론화에 맞서 항의 하는 경주와 울산시민들
사진제공 : 탈핵울산시민공동행동
어떤 공론화여야 하는가? 지난 6월20일 산업부의 일방적이고 형식적인 공론화에 맞서 항의 하는 경주와 울산시민들
사진제공 : 탈핵울산시민공동행동

공론화의 출발점은 바로 여기, “어디든 갈 데가 없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시작해야 한다. 어느 지역 주민들도 핵시설을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역으로 “어디든 가능하다.”는 점이다. 핵산업계 주장대로 지진 활성대 위에 세워도 안전한 핵시설이면 우리나라 어딘들 안전하지 않겠는가? 이 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까지 핵폐기물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 체 모두의 무관심 속에서 주변 지역주민들만의 문제로 왜곡하며 숨겨져 왔다. 울산북구주민투표는 우리 사회가 어물쩍 없는 것처럼 숨겨왔던 것을 세상에 드러냈다. 핵폐기물은 경주와 울산 시민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국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 문제로 정말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핵폐기물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 폐기물들은 누가 책임져야하는가?” 그래서 공론화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미래에 어느 날 과학이 발달해서 핵폐기장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니, 그 이전까지는 지금의 임시저장소를 계속 유지, 확대하는 것으로 하자.”라고 생각하며, 지난 40년 동안 ‘밭 잃고 논 잃고 바다까지 잃었던’6 지역주민들에게 영원히 떠넘기려 하는 한수원이나 정부에게만 맡겨둘 수 없다. 공론화의 주체는 정부가 아니라 우리들이어야 한다. 시민 스스로 만들어가는 공론화가 필요한 것이다. 또한 월성원전 단지에서 고준위핵폐기물을 반출해나가겠다는 16년 전의 약속이행을 전제한 가운데 공론화가 시작되어야 한다. 이것이 핵폐기물을 30년 동안 끌어안고 있었던 주민들에 대한 최소한의 정의가 아닌가?

후쿠시마 이후 탈핵활동은 핵발전소가 그려진 지도를 주로 사용하면서 ‘안전한 에너지 사용’을 주요 과제로 해왔다. 이제는 지도를 새로 업그레이드 해야 한다. 핵발전소 옆에 딸린 핵폐기물 임시저장소를 비롯해서 우리나라 핵폐기물을 누가 책임지고 있는지를 밝히며 ‘정의로운 에너지 사용’을 과제로 제기해야 한다. 기후위기, 코로나 등 현대문명이 처해진 현재의 위기 속에서도 우리가 여전히 새로운 주체형성으로 진화할 수 있다면 그 방향은 ‘책임과 윤리의 주체’가 아닐까?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이 주제로 시끌벅적 토론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1. ‘월성원전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 맥스터 추가 건설에 대한 울산 북구 주민투표’이다. 경주 월성원전 단지에는 발전소 안에 고준위 핵폐기물을 보관하고 있는 습식임시저장소 뿐 아니라 바깥에 건식임시저장소(캐니스터 300기에 고준위핵폐기물 16만2천 다발과 맥스터 7기에 16만 8천다발이 보관 중)가 있다. 지금 경주 월성원전 단지에는 우리나라 중저준위 핵폐기물과 고준위 핵폐기물 대부분(48만 여 다발 중 46만 3천 여 다발)을 보관하고 있다. 2005년 노무현 정부는 경주에 중저준위 방폐장을 짓는다는 조건으로 2016년까지 경주에 있는 고준위핵폐기물을 경주에서 반출해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한수원이 지난 2016년부터 맥스터 7기 추가 건설을 요구해온 것에 대해 2020년1월 원안위가 이를 승인했다. 원전단지 내 임시저장소 문제에 대해 주변 지역주민들은 임시저장소가 영구 저장시설이 되는 거 아니냐는 우려와 함께 정부의 약속이행을 요구하고 있다.

  2. 고리원전단지는 고리1,2,3,4호기와 신고리1,2,3,4호기에다 신고리5,6호기까지 건설하는 엽기적인 곳이다. 세계 대부분의 원전단지에는 2개(79곳, 42%) 이거나 1개(51곳,27%)이다. 6개 이상인 곳 11곳 중 우리나라 4곳이 모두 포함되며(자료:그린피스), 고리원전단지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압도적인 개수로 10기가 들어선다. 그만큼 사고위험성은 높아지고 주변 지역주민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문재인 정부가 신고리 5,6호기 건설을 중단하겠다고 공약했으나, 2017년 이를 공론화에 부쳤고 우리 사회는 처음으로 ‘숙의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3달 동안 공론화를 경험했다. 투표결과는 59.5%로 찬성으로 반대 40.5%보다 19%나 더 높았다. 당시 나는 친구와 함께 투표 결과를 기다리며, 얼마 차이로 반대가 이기느냐가 문제라며 그 결과에 대해 낙관하고 있었다. 투표결과를 듣는 순간, 나는 다리가 풀리고 머리가 하얘졌다. 울산시청 앞에서 발표를 기다리던 시민들은 울분을 토했고, 한 시민은 이에 대한 실망감으로 문재인 정부의 공론화에 대해 비판했는데 이 내용이 기사에 실렸다. 수천 명의 항의 댓글로 몰매를 당한 그녀는 그날과 그날 이후를 아직도 악몽으로 떠올린다.

  3. 밀양주민들의 투쟁은 후쿠시마 이후 한국탈핵운동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다양하다. 밀양송전탑반대투쟁에 대해 논문들과 책, 영화 그리고 그림 전시회 등 다양한 학문적 접근과 문화 생산물이 생성되면서 탈핵운동에 대한 풍성한 사회적 담론을 형성하고 있다.

  4. 원전단지 주변 주민들이 보상금으로 저항을 포기해버리는 경우도 이러한 이유가 크다. 그리고 한수원은 주민들의 패배감을 조장하고 이용하며 돈으로 매수하기도 하고 협박하기도 하면서 주민들의 갈등을 부추긴다. 울산 북구의 주민투표를 생각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보상금을 둘러싼 이런 갈등으로부터 울산이 보다 자유롭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5. 투표는 3가지 형식으로 진행하였다. 사전투표(5월28일~29일)로 사업장 내에서 노동자 투표를 진행했고 여기에 8,629명이 투표했고, 온라인투표(6월1일~2일)에 19,488명이 그리고 본투표(6월5일~6일)에 22,362명이 투표했다. 총 유권자 175,138명 중 50,479명으로 투표율은 28.82%이다. 주민투표법상의 1/3을 넘지는 못했으나, 관이 주도하는 보궐선거가 단일 선거일 경우 25%미만일 경우가 많은 것에 비한다면 이 비율은 성공적이라고 평가한다.(자료 : 탈핵신문 78호 안승찬 울산주민투표운동본부 공동집행위원장 인터뷰)

  6. 월성원전 주변 지역 나아리 주민의 이야기이다. 역학조사에 참여한 주민들 100%의 몸에서 방사능 삼중수소가 나왔고 한 집에 갑상선암 환자가 2~3명인 집도 있으며 한 집 건너 각종 암에 걸리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이다. 5년 넘게 이주를 요구하며 농성 중이나, 아직도 우리 사회는 모르쇠이다.

하루

울산시 중구 장춘로 거리에 있는 대안문화공간 품&페다고지에서 오래토록 살고 있다. 소극장 품과 도서관 페다고지는 2008년 6월 임대 계약을 맺고 4개월째 울산의 노동자 시민들의 피와 땀이 배긴 긴 노동 끝에 10월 10일 문을 열었다. 우리는 이곳이 자본을 너머 선 다양한 만남과 실천을 실험하는 장소가 될 것을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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