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끼의 음식에 담긴 세계

음식이 만들어지고 버려지는 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일을 반복적으로 하다보면 먹는 행위가 ‘우리가 좇는 중요한 즐거움 중의 하나’라는 것 이상임을 경험하게 된다. 음식은 생태계의 순환원리, 기후 변화, 자본의 지배와 부의 불균형, 조상의 지혜, 신화와 전설 등 무수히 많은 요소들의 총화이다.

한 끼를 위한 노동

끼니를 차리는 일이 무척이나 힘든 시절이 있었다. 메뉴를 생각해내고, 재료를 구하고, 그것들을 손질하고, 불 앞에서 요리를 한 후 상을 차려낸다. 준비한 만큼의 성과가 늘 없어 보이는 식사가 끝나면 설거지를 하고 남은 음식을 버리거나 보관한다. 그렇게 한 끼를 위한 시간이 지나가면 또 다른 끼니까지의 시간이 순식간에 돌아온다. 차려진 밥상을 보면 식구들 먹일 생각에 가슴 뿌듯하기보다, 이 음식들이 상에 올라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과 노력이 필요했을까가 먼저 생각났고, 많은 희생을 재물로 에너지를 얻은 나는 그만큼의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먹는다는 것이 즐거움이 아니라 수고스럽고 회의마저 느끼게 하는 시절이었다. 먹는(食) 행위가 아무 생각이 들지 않게 만드는 욕망의 충족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식욕을 가로막을 만큼 오만가지 생각에 휩싸이게 만드는 행위였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결코 의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음식이 만들어지고 버려지는 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일을 반복적으로 하다보면 먹는 행위가 ‘우리가 좇는 중요한 즐거움 중의 하나’라는 것 이상임을 경험하게 된다.

먹방과 미식 열풍

언제부턴가 TV를 켜면 서너 프로그램 건너 하나씩 소위 ‘먹방’이 방영된다. 맛집 탐방은 기본이고 다양한 방식의 요리 경연과 평가, 오직 먹거리를 찾아 떠나는 여행 등 비슷하지만 약간씩 다른 포맷의 먹거리 관련 프로그램들이 넘쳐난다. 잠자던 식욕까지 불러일으키는 고화질 화면 속의 클로즈업 된 음식들과 그것들의 맛을 식상하리만큼 과장되게 표현하는 출연자들에 익숙해지다 보니 전후과정 생략하고 오로지 맛있는 먹거리를 쫓아다니는 것이 마치 우리가 추구해야 할 트렌드이자 진정한 여가생활인 것처럼 느껴진다.

먹방 열풍에 대한 비판은 이미 1980년대 영국에서 ‘푸드 포르노’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자극적인 방식의 음식 소비를 꼬집은 표현이다. 이러한 감각적 음식 소비의 주안점은 일단 보기에 좋아야 하고 맛있어야 하는 것인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유명한 음식이냐, 소위 요즘 핫한 음식이냐 아니냐이다. 먹거리와 그 먹거리를 쫓아다니는 문화가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호흡이 빠른 상품으로 소비되면서 때로 ‘소확행’이라는 차양 아래 숨기도 한다. 유행이 지난, 수명이 다 된 음식들을 버리고 새로운 맛을 찾아다니다 보면 맛에 대한 기준도 그때그때 달라지고 어느덧 맛 자체가 무엇인지를 잊어버리는, 혹은 아예 잃어버리는 지경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먹는 행위가 자기 욕망에 충실한 행위라는 최소한의 전제마저 위태롭게 된다. 사실 요즘 같은 불황기에 비교적 저렴한 예산으로 ‘미식놀이’를 즐기는 유행은 획일화된 욕망을 주입해 타인의 욕망이 내 욕망과 같은지 구분하고 살펴볼 기회를 놓쳐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먹는다는 것의 의미

지구촌 어디에선가(전 세계 인구의 약 12%)는 먹는다는 것이 여전히 절박한 생사가 걸린 문제이기도 하고, 과거의 어느 한때는 제의(祭儀)와 같은 신성한 행위이기도 했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먹는다는 것’의 의미가 겉보기식이 되고 있다.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먹거리도 소위 말하는 추출, 생산, 소비, 폐기의 단계에서 소비만이 부각되고 나머지는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최근에 웰빙 붐을 타고 늘어난 친환경 먹거리에 대한 관심도 생산보다는 여전히 소비의 영역에서 머무르고 있다. 식재료가 어떤 생산과정을 거쳐 식탁에 오르는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결과적으로 친환경 상품이냐 아니냐가 중요하다. 이는 성장주의의 특성과 맥을 같이 한다. 과정이 어떻든지 결과 값만 그럴듯하면 선(善)으로 인식되는 풍조는 너무 많은 이면의 희생을 담보로 하고 있고, 그 이면은 다양한 방식으로 가려져 있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몸을 구성하고, 건강, 나아가 생사까지 좌우하는 먹거리에 대한 관심을 맛과 편리함이라는 두 가지 기준으로 덮어버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먹는다는 것의 의미
출처: Pexels

먹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인데 우리는 어쩌다 먹는 것의 겉모습에만 치중하고 이면을 들여다보지 않게 되었을까. 우선 ‘먹는 사람’으로서의 가치보다 ‘먹을 것을 소비하는 사람’으로서의 가치가 우선시 된 점을 들 수 있다. 먹거리는 재생산을 위한 필수 소비템으로서, 생략할 수 없는 소비재로서, 소비의 일정 부분을 변함없이 차지하고 있다. 필요에 의해서든 욕망에 의해서든 먹거리를 소비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이런 현실에서 다른 모든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먹거리 또한 종류가 수없이 많기 때문에,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방대한 선택권을 갖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효율성이나 상품성에 맞추어 기획된 식재료나 식품들이 대부분이다. 가격을 낮춰 생산량을 늘리도록 만들어진 먹거리 재료들에게서 맛이나 모양 이외에 질이나 영양소, 더 나아가 안전성 등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더군다나 우리는 계속해서 쏟아지는 더 많은 상품들을 소비하기 위해 일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면밀하게 따질 시간이 없다.

음식을 대하는 태도

얼마 전에 TV에서 흘러나오는 CF의 한 대사를 듣고 씁쓸해진 적이 있다. 나이 지긋한 주부처럼 보이는 광고모델의 입을 통해 “요즘 누가 집에서 밥 하냐”라고 하면서 즉석밥을 광고하고 있었다. 광고에서 흔히 사용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인간 만들기’ 어법으로, 간편하게 이 물건만 사면 되는데 뭐하러 집에서 힘들게 땀 흘리면서 밥을 하냐는 식의 말을 주부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게 했다. 그 물건이 간편한 줄 모르는 것도 아니고, 턱없이 비싸지 않은 것도 알면서도 여전히 수많은 가정에서 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일순간에 바보로 만드는 광고였다. 음식에 담긴 신성함, 숭고함, 역사, 문화, 정동 등 모든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최소한의 것도 남지 않은, 우리 시대가 음식을 대하는 태도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먹거리 가사노동에 대한 가치절하를 주요 당사자 스스로가 하게 만드는 프레임은 부족한 보상에도 불구하고 애써 힘든 일을 하려는 의지를 허탈하게 만들기도 한다.

사고의 확장과 실천

먹거리를 근본적으로 지키고 만들어 내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기후, 토양, 품종선택, 재배 방식, 가공 생산, 유통, 조리방법, 음식물쓰레기 처리까지 각 단계마다 중요성과 위험성이 공존한다. 너무 많은 단계와 경로를 거치는 바람에 불필요한 자원을 소모시키고 손상시킬 여지가 큰 것이다. 로컬 푸드의 중요성이 이 지점에서 부각되는데, 로컬푸드는 단순히 지역경제 활성화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한 끼의 음식을 두고 우리는 그것이 소위 핫한 것인지 아닌지 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다. 그것은 배고픔이나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 미각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혹은 타인의 욕망인지 나의 욕망인지 구분되지 않은 헛헛함을 채우기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음식은 생태계의 순환원리, 기후 변화, 자본의 지배와 부의 불균형, 조상의 지혜, 신화와 전설 등 무수히 많은 요소들의 총화이다. 음식은 음식일 뿐이라는 단절된 의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갈래와 흐름으로 사고를 확장시키다 보면 그 틈새로 크고 작은 실천이 자연스럽게 따라올 수 있다. 누군가의 말처럼 사고의 확장과 실천은 우리를 또 다른 곳으로 안내할 것이다.

노마드

혼자 또는 같이 공부하고 토론하고 소소하게 실천하는,
평범하게 살지만 주변에서 잘 볼 수 없는,
색깔이 분명해 보이지만 무엇보다도 투명함을 지향하는,
분자적 노마디언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