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으로 나아가기 – 돌봄과 감수성에 대하여

공교육은 나로 하여금 감정의 교류를 풍부하게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렸다. 학교라는 공간이 나의 감수성의 감각을 막아버리고, 타인과 나의 영역을 아주 정확히 나누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나는 대안을 찾아 간디학교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친구들과 사랑이 전제가 된 관계 속에서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뛰어놀면서, 관계를 유지하고 서로를 보살피는 힘을 키울 수 있었다.

요즘 들어 ‘돌봄’이라는 키워드에 관심 가지고 더 깊이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베이비시터 일을 하며 돌봄노동자로서 느꼈던 것들이 많았기도 했고, 돌봄이라는 것을 취약한 이를 돌본다는 것으로 정의하는 개념에서 더 나아간 돌봄이 주요 가치로서 작동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하곤 한다. 이런 돌봄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 감수성이라는 것은 없어서는 안 되는 아주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듯하다. 돌봄과 감수성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이야기하고 싶지만, 아직 그것은 나의 역량부족으로 불가능하다는 생각 때문에 나의 감수성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돌봄’을 녹여보려고 한다.

어릴 적 나는 감수성이 아주 풍부한 아이였다.

“엄마, 나는 엄마라는 말만 하면 눈물이 나”

"엄마, 나는 엄마라는 말만 하면 눈물이 나" 사진출처 : geralt
“엄마, 나는 엄마라는 말만 하면 눈물이 나”
사진출처 : geralt

잠들기 전 다섯 살의 내가 엄마에게 했던 말이다. 다섯 살의 나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채 엄마에게 엄마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 당시 나의 엄마는 딸의 진심 어린 목소리와 눈망울을 보고 자신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고 했다. 엄마의 말을 빌려 그 당시의 나를 떠올려보니, 그때의 나는 엄마가 주는 사랑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엄마를 향한 나의 애틋한 마음 또한 잘 느끼고 그런 마음들을 소중히 여기고 있었던 것 같다. 엄마가 해주는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을 때면 어린 시절의 나는 감수성이 아주 풍부한 아이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엄마의 이야기 속에서 보여지는 나의 풍부함이 참 의아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어릴 적 나는 감수성이 메말라 있던 아이였기 때문이다. 초등, 중등 시절의 나는 감정을 표현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많이 어려워했다. 울 때도 크게 울지 않고 눈물만 주륵 흘리며 울었고, 하하하 크게 웃는 대신 수줍은 미소만 띠는 그런 아이였다. 최근에서야 조금씩 풍부해지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내가 원래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였다니 무엇이 날 억누르고 있었던 걸까? 내가 가진 감수성이 언제부터 메마르기 시작했고, 언제부터 다시 풍부해졌을까?

아마 공교육의 시스템과 돌봄의 결여가 나를 메마르게 했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감수성이 메마르던 시기는 바로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엄마는 돈을 벌어야 했기에 작은 탕제원을 운영하기 시작하셨고 그로 인해 나는 하교 후에 항상 학원으로 돌려졌다. 학원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땐 TV와 함께 했다. 그래서인지 어린 나를 온전히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 딱히 없었다. 부모님께서 들으시면 많이 속상해하시겠지만, 그 당시에 나는 방치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학교선생님과 학원선생님들을 포함한 모든 선생님은 나를 좋아하셨다. 나는 착하고, 가장 말을 잘 듣는 아이, 시키는 것을 가장 잘하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착한 어린이 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선행상을 단 한 번도 놓쳐본 적이 없을 정도이다. 내 의견을 말하기보다는 시키는 것을 잘 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 깨닫고 나의 마음에 귀 기울이는 연습을 하지 못했다. 40분 공부하고 10분 쉬는 것을 반복하는 학교의 시스템은 관계중심의 돌봄이 포함된 교육이 아닌 경쟁과 사회적 성공을 위한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공교육은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관계를 맺는 법이라던지, 마음을 나누는 방법과 같은 것들에서 점점 멀어지게 만든다. 나 또한 돌봄과는 분리된 교육이라는 틀 안에서 내가 가진 보물들을 잃어버렸던 것 같다.

이런 학교의 문제점들이 확실하게 다가왔던 순간이 있다 바로 중학교 2학년 때 있었던 OMR 사건이었다. 그 사건 이후 학교라는 공간에 대한 실망감이 커졌고, 나의 관계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다. 중학교 2학년 2학기 기말고사에서 같은 반 친구가 OMR 카드에 답을 밀려 써서 눈물을 보였고 그때 답을 밀려 쓴 친구와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답을 밀려 쓴 친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그 상황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위로를 건네던 친구가 뒤를 돌더니 기분이 좋은 듯 주먹을 쥐며 “예쓰”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심지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예쓰”라고 외쳤다.

나는 그 친구의 행동이 정말 충격적이어서 그 순간 많은 생각이 들었다. 친구가 울고 있는데 왜 좋아하는 거지? 왜 나를 보고 “예쓰”라고 외치지? 나도 그 아이의 실수를 기뻐한다고 생각하나? 지금까지 내가 그 아이에게 보여준 태도에 문제가 있나? 라는 생각을 하며 나의 관계 속 태도를 돌아보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친구의 행복에 진심으로 행복해한 적도, 친구의 불행에 진심으로 아파한 적도 없었다. 항상 “쟤가 많이 슬퍼보이네, 안타깝다 그치만 내 일이 아닌걸”, “저 친구가 많이 기뻐 보이네, 좋겠다 그치만 내 일이 아닌걸”이라고 생각하며 넘겼던 일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나만의 세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참 불행한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적인 학교의 모습을 한 이곳은 감정의 교류를 풍부하게 하지 못하게 만드는 공간이라 생각한다. 이런 공간은 우리의 감수성의 감각을 막아버리고, 타인과 나의 영역을 아주 정확히 나누어버린다.

“나만의 세계에서 한 발짝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긴 것 같다.” 사진출처 : Mysticsartdesign
“나만의 세계에서 한 발짝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긴 것 같다.”
사진출처 : Mysticsartdesign

그렇기에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가정에서도 참고 표현하지 못하는 일상이 지속되었고, 엄마 또한 내가 커갈수록 표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계셨다. 엄마는 이런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생각에 항상 미안해하셨다. 그래서 다양한 경험과 관계가 있는 간디학교라는 대안학교를 나에게 권하셨다. 그렇게 나는 대안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지금은 간디학교를 졸업했지만 친구들과 수업을 째고 계곡에 가 농땡이를 피워보기도 하고, 장마철에는 학교 끝나고 기숙사 가는 길에 비를 쫄딱 맞으며 걸어보기도 하고, 친구랑 싸워 엉엉 울며 선생님에게 달려가 고민상담을 해보기도 하고, 같은 방 친구들과 컨셉을 잡아 옷을 맞춰 입고 하루를 보내기도 하고, 밤에 친구들과 별을 보러 나갔다가 떨어지는 별똥별에 소리지르며 좋아하기도 하고, 축구를 하겠다며 친구들과 축구동아리를 만들어 일주일에 1번씩 새벽 5시에 일어나 축구를 하기도 하고 그냥 이런 평범하지만 특별한 일상들이 졸업하고 나서도 종종 떠오른다.

사랑이 전제가 된 관계 속에서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뛰어놀았던 3년이라는 시간은 알게 모르게 나에게 커다란 활력을 가져다주었고 나만의 세계에서 한 발짝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긴 것 같다. 관계를 유지하고 서로를 보살필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겐 더 필요하지 않을까?

유튜브 [생태적지혜] 곁으로 나아가기 – 돌봄과 감수성에 대하여 – by 죤지

죤지

고등학교 시절 영어 선생님께서 나를 ‘우리 죤지’라고 불러주시곤 했다. 그러자 곧장 친구들도 나를 죤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선생님과 친구들이 나를 애정있는 목소리로 죤지라고 불러주는 게 참 좋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죤지인 게 참 좋다. 지금은 간디 어린이학교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아이들에게 죤지쌤이라고 불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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