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기후위기의 가해자이고 피해자”라는 그럴듯한 착각

지금까지 우리는 ‘기후정의를’ 국제협상에서 선진국들의 책임과 선도적인 이행을 담보하기 위한 구호로 활용했을 뿐이다. 지난 여름, 한국과 파키스탄을 강타한 폭우 피해 사례에서 보듯이 기후정의는 즉각적인 실천의 과제이다.

1988년 NASA에 재직중이던 제임스 한센(James Hansen) 박사는 그의 팀이 몇 년간 시행한 중요한 연구의 결과를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설명했습니다. 연구의 핵심은 ‘지구 온난화는 온실가스에 의한 것이며, 인간에 의해 대기 중으로 배출된 이산화탄소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라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발표였지만, 효과는 미비했습니다. 조용한 범생이 타입이었던 한센 박사는 의회 청문회 이후 점점 과격한 시민운동가로 변해 갔습니다. 지구 생태계는 빠르게 황폐화되고 있는데, 책임 있는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내게 기후변화의 선지자라고 얘기한다. 명백하게 아니다. 난 미래에, 내 손자들이 할아버지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알았으면서 왜 가만히 있었냐고 원망하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한센 박사의 의회 청문회 이후 34년이 지났습니다. 지금은 소수의 기후 반지성주의자들을 제외하면, 지구 온난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고, 이는 결과적으로 생태계에 궤멸적인 피해를 입힐 것이라는 사실을 대부분의 시민들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피해 양상은 해마다 새로운 기록을 갈아 치우며 우리 일상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지난 봄부터 여름까지 우리는 유럽과 미국 서부의 이상 고온 현상을 주목했습니다. 이 지역은 지난 몇 년간 40도가 넘는 여름을 겪었고, 그로 인해 상당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주목을 많이 받지 못한 곳에서 가장 큰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말 그대로 쏟아 붓는 비로 인해 국토의 1/3이 잠긴 파키스탄입니다. 파키스탄의 비극도 기후변화가 주요 원인입니다.

”무자비한 기후재앙에 대해 전 세계 탄소배출량 목표와 배상금을 재고해야 한다." 사진 출처: Carl K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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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비한 기후재앙에 대해 전 세계 탄소배출량 목표와 배상금을 재고해야 한다.”
사진 출처: Carl Kho

파키스탄은 전통적으로 7~9월이 우기인데, 지구 온난화가 비구름을 몰고 오는 몬순을 강하고 불규칙하게 만들어 올해 8월 평년보다 500~700%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파키스탄 사람들도 이상 기후에 대한 문제의식이 명확한 것 같습니다. 실제로 셰리 레흐만 기후변화부 장관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오염을 일으킨 부유한 국가들이 홍수 피해를 입은 파키스탄에 배상해야 한다”며 “무자비한 기후재앙에 대해 전 세계 탄소배출량 목표와 배상금을 재고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이런 주장은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실제로 파키스탄이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에 기여한 바는 1%보다 한참 아래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주장처럼, “탄소발자국에 기여하지 않은 국가들은 배상금도 받지 못한 채 손실과 피해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 파리기후협약에 따라 온실가스 배출을 저감하는 것 외에 인류는 또다른 과제를 부여받은 것입니다. 기후 정의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파키스탄은 한 예에 불과합니다.

IPCC의 6차 보고서에 따르면, 사하라 남부 아프리카 지역, 남아시아, 그리고 중남미 지역의 기후 피해는 매년 큰 폭으로 누적되고 있고, 2010~2020년 이 지역에서 기후변화에 의해 숨진 사람의 수는 취약하지 않은 지역보다 15배가 더 높았을 정도였습니다. 이 지역의 인구를 모두 합치면 33~36억 명입니다.

학계에서는 기후위기가 ‘초래된 원인을 고려하여 그 책임의 공평한 분담과 기후 취약계층의 우선적 배려(분배적 정의), 온실가스 배출이 최소화 될 수 있도록 생산구조의 변경(생산적 정의), 기후정책 수립 과정에서 국민의 참여와 의견 반영(절차적 정의), 국민은 물론 생태계와 미래세대, 국내는 물론 지구적 차원까지 고려(인정적 정의)하여야 하는 가치나 지향점’이라고 정의합니다. (한상운, 2019)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기후정의는 기존의 기후관련 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면이 있고, 실제로 파리기후협약(2015)에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행동을 취할 때 기후정의 개념의 중요성을 고려할 것’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기후위기를 슬기롭게 해결해야 할 의무와 함께 이 문제를 정의롭게 풀어나가야 하는 의무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기후정의를 국제협상에서 선진국들의 책임과 선도적인 이행을 담보하기 위한 구호로 활용했을 뿐입니다. 중요한 일이지만, 파키스탄의 사례에서 보듯이 기후정의는 즉각적인 실천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기후위기에 노출된 정도가 지역마다 비대칭적이고, 하필 위험한 환경에 노출된 지역들은 온실가스 책임이 상대적으로 가볍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가해자이자 피해자”라는 그럴듯한 인식에 집착해서는 이 문제를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이 문제의 해결은 깨어있는 시민들의 연대에 의한 것뿐입니다. 사진 출처: Priscilla Du Pre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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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의 해결은 깨어있는 시민들의 연대에 의한 것뿐입니다.
사진 출처: Priscilla Du Preez

기후정의는 국제적 관계 속에서만 위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 여름 우리는 반지하에 살던 시민들이 자신의 집에서 익사하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야만과 취약함이 어느 정도인지 나타내는 상징적인 사건이지만, 동시에 이상기후에 의해 받는 피해는 한 지역 내에서도 비대칭적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는 동시에 3개의 태풍이 형성되어 동아시아로 진입하는 현상을 목격했습니다. 이상기후는 더 이상 이상한 일이 아니며, 기후위기의 시대에 우리는 더 증폭된 기후 현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때마다, 취약계층은 이번처럼 실존적인 문제에 놓이게 되며, 이는 에너지 과다 사용 계층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일입니다. 기후변화를 둘러싼 문제가 계층의 갈등으로 번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의 해결은 깨어있는 시민들의 연대에 의한 것뿐입니다. 한 지역을 넘어 세계 시민들의 연대가 필요합니다. 탄소 배출 총량에 대한 정확한 평가와 이행에 대한 공정한 책임 부과, 시급하게 처리해야만 하는 일들의 우선순위를 매기고, 이를 실행하기 위한 자원을 신속하게 확보해야 합니다.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한 국가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세계 시민들이 문제를 공유하고, 해결방법을 토론하며 연대해 나갈 때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코로나 이후 처음으로 시민들이 모이는 924 기후정의행진은 세계시민연대의 역사적인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눈 맑은 많은 시민들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전병옥

기술마케팅연구소 소장. 고분자화학(석사)과 기술경영학(박사 수료)을 전공. 삼성전자(반도체 설계)에서 근무한 후 이스트만화학과 GE Plastic(SABIC)의 시장개발 APAC 책임자를 역임. 기술의 사회적ㆍ경제적 가치와 녹색기술의 사회적 확산 방법을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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