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가까이] ⑯ 나비와 꽃은 서로 대화할까?

[지금 여기 가까이] 시리즈는 단행본 『저성장 시대의 행복사회』(삼인, 2017)의 내용을 나누어 연재하고 있다. 저성장을 넘어 탈성장을 바라보는 시대에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지금, 여기, 가까이’에서 찾고자 하는 이야기다.

한 어르신이 들려준 이야기

되기는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의 개념으로,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사랑하고 신체를 변용시킨다는 점에서 동양의 역지사지의 원리와도 같습니다. 사진 출처: Aaron Burden

어느 해 봄 정독도서관에서 특강을 한 적이 있습니다. 늘 저 혼자 강단에 오르는 게 상례였지만 이번에는 아내와 함께였지요. 아내와 제가 공동으로 쓴 책에 대한 강의였거든요. 그 강의에서 저는 되기(becoming)이라는 개념을 주저리주저리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되기는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의 개념으로,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사랑하고 신체를 변용시킨다는 점에서 동양의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원리와도 같습니다. 그 두 사람은 동물되기, 아이되기, 장애인되기, 부랑아되기, 여성되기 등의 소수자되기를 말합니다. 여기서 저는 되기는 이기(being)가 아니라, 과정적이고 진행형적인 사랑이자 신체 변용(affection)이라고 설명했지만, 청중들은 별로 이해하거나 동의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청중 중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일 수 없으면서도, 어떻게 그 사람이 되는 것이 가능하냐?”며 질문을 퍼부었죠. 저는 대답이 군색해져서 장애인되기는 장애인이 아니면서도 장애인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고, 노숙인되기는 노숙인이 아니면서도 노숙인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했지요. 그러나 질문자는 현장투신이라는 80년대의 실천 활동과 같이 현장에서 하나 된 존재이지 않고서 어떻게 되기를 할 수 있겠냐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저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사례가 있을까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좌중에서 흑기사가 등장했습니다. 아마도 그분은 난처한 저에 대한 ‘되기’를 했던 분 같습니다. 강단의 앞쪽에 앉아 계시던 어르신 한 분이 조용히 말을 꺼냈지요. “사자와 소가 사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자는 고기를 소에게 주겠지, 그러나 소는 사자에게 풀을 줄 것이야. 사자와 소는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에게 주는 것을 그만두지 않겠지. 되기는 그런 소와 사자 간의 사랑의 상황이지 않을까? 나비가 꽃을 만날 때도 그렇겠지!” 그 순간 저는 무릎을 딱 치며 어르신에게 공감을 했습니다. “맞아요. 저와 아내의 관계도 그런 것 같아요.” 그러자 좌중은 아주 빵 터져서 웃었지요. 청중들의 눈에는, 저와 아내의 관계가 평행선을 달리는 그런 사이라고 느껴졌나 봅니다. 되기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도 같이 이질적이고 낯선 존재들이 던지는 사랑의 절박한 몸짓이라는 생각이 그때 들었습니다.

저는 어르신이 들려주었던 되기의 철학을 집으로 돌아가면서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예전에는 통일성, 동일성, 통합, 합일 등을 추구하는 경향이 참 많았습니다. 그러나 요즘처럼 차이와 다양성이 만개한 상황에서 차이 나는 존재끼리 어떻게 하면 사랑을 할 것인가가 핵심적인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르신이 말한 소와 사자의 사례처럼 예전에는 사랑을 상대방과의 합일과 통합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제는 사랑도 서로간의 편차와 차이가 만들어내는 하나의 예술작품과도 같은 것만 같습니다. 보통의 사랑 전선에 이상이 생기는 이유는, 서로에 대한 차이를 화음으로, 미학으로, 예술로 창조행위로 만들지 못하면서 비롯되는 것만 같습니다. 저는 그날 아내와 함께 강단에 올라와 특강을 했는데, 강단에 난생 처음 올랐던 아내의 미세한 떨림과 긴장한 모습을 보고, 역지사지의 애틋함을 느꼈습니다. 아내와의 잊지 못할 추억 하나가 만들어지는 느낌이 들었지요. 그날을 말하면 아내는 손사래를 치면서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제게는 오히려 아내의 인간미가 느껴지고 사랑이 깊어진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뜻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전염된 것

20대 초반, 술자리마다 다 쫓아다니던 시절이었지요. 술자리에 만나서 친해진 선배들이나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특히 대학을 입학하고 신입생 환영회 이후로 새롭게 뭉친 친구들이 이유도 없이 함께 우르르 몰려 다녔지요. 그날은 개학 후 4.19기념집회 때였습니다. 술자리에 함께 했던 신입생 친구들이 대거 참여하는 자리였지요. 옆 친구보다 앞으로 나가려 하다 보니 엉겁결에 난생 처음 짱돌이라는 것을 던져 보았고, 최전방까지 나가보기도 했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선후배들은 술 한잔 하면서 4.19기념집회에 나간 이유에 대해서 얘기를 했습니다. 물론 저와 친구들은 하나같이 “친구 따라 강남 갔다”라는 얘기밖에 못할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저와 친구들은 제법 그럴 듯하게 집회 참여의 의미와 실천의 당위성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친구들과 함께 분위기에 취하고, 술에 취하고, 함께 하는 자리에 취해서 끝없는 이야기꽃을 피웠지요. 조금 의협심이나 모험심, 역사적 의미까지 가미되니 저희들은 정말 재미있게 하루 동안 생긴 일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

그렇게 대학을 보내던 중 91년 강경대 열사 사태가 터졌습니다. 취업이며 공무원시험이며 학점이며 신경 쓰기 바빠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그때의 친구들이 다시 모였습니다. 지금은 교수가 되신 당시의 조교님이 철학과 전체의 출석체크를 했습니다. 총 100명 정원에 92명이 참여했지요. 저희들은 다시 모인 용사들이 되어 예전처럼 모험담을 들어 놓았습니다.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저희는 다시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했습니다. 최근에는 2016년 촛불집회에서 다시 만났죠. 이번에는 저마다 아내와 아이들 손을 꼭 잡고 함께 모이니 전보다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다들 내일 출근해야 해서 술자리는커녕 뒤풀이도 제대로 못했지만, 4.19 기념대회에서 처음 거리로 나섰던 그때가 생각났습니다. 사실 우리들은 이데올로기나 의지, 커다란 뜻에 따라 모인 친구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친구들이 좋아서 함께 움직이면서, 역사와 함께 했고, 사회와 함께 했던 친구들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전염되어 움직였고, 서로를 감염시켰던 사이입니다.

술 마시는 주당 친구들과 만나는 것은 무언가에 전염되어 있는 사람의 모습과도 같았습니다. 사진: Markus Winkler

그 전염이라는 것이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마치 술자리 하나가 생기는 원리와도 같습니다. 대학 시절에는 과마다 동아리마다, 비가 내리면 무조건 술 마시기로 한 우주회(雨酒會)라는 모임이 꼭 하나씩 있게 마련입니다. 주당들은 비 내릴 때마다 서점에서 단골술집에서 무리짓기를 합니다. 그 무리의 배열은 늘 바뀌지만, 주당은 주당을 알아본다고 밤새 술 마시는 것은 변함이 없지요. 술 마시는 주당 친구들과 만나는 것은 무언가에 전염되어 있는 사람의 모습과도 같았습니다. 주당친구들과의 만남 과정에서는 여러 가지 주제의 이야기들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역사와 철학, 우주와 세계, 여행, 시위, 아르바이트 등 세상만사가 모두 술안주가 되어 술자리를 달굽니다. 그러나 주제가 무엇이든 간에 술을 거하게 마신다는 점은 똑같지요. 그리고 밤이 깊어지다 못해 새벽녘이 되어 쓰레기차가 바쁘게 움직일 때 즈음에야 각자 집으로 돌아가곤 했지요. 그때는 각출이라는 개념도 없었습니다. 친구가 아르바이트나 과외해서 돈 받았다고 하면 그날은 그 친구가 쏘는 날이고, 제가 집에서 용돈이 올라왔다고 하면 그날은 제가 쏘는 날이었습니다. 술자리에서 한 달 용돈 전부를 날리는 날인데도 저는 마치 광신도와 같이 서로에게 전염되어서 술값을 냈지요. 그런 열정은 아마 다시 찾아오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무리 주변이 나의 배치

영원한 주변인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만난 주변인 중에는 성소수자, 도인, 장애인, 정신장애인, 탈학교 아이들 등이 있었습니다. 특히 도인이신 K 선배와의 만남이 참 재미있었습니다. 저는 대학시절 친구들의 잇단 구속과 수배의 소식을 듣고 우울과 침울, 사기 저하에 빠졌을 때, 우연히 그분을 만났습니다. 무슨 도를 닦는다고 해서 기인인가보다고 생각했는데, 이야기를 나눌수록 특이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도인이라는 자기소개가 그런대로 수긍이 갔습니다. 그 선배는 저의 우울감을 금방 읽어내고 독특한 호흡법과 운동법을 알려주면서 매일 실천하라고 했습니다. 당시 저는 불면의 밤을 보내고 술에 쩔어서 살고 있었는데, 그 선배님의 말에 따라 삼시세끼를 챙겨먹고 자기 전에 호흡법을 하고, 운동요법에 따라 몸을 부지런히 움직였지요. 한 3개월 정도를 하니, 놀랍게도 모든 것이 다시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냥 그 선배 얘기를 믿었고 진실로 들었을 뿐입니다. 도인이었던 분은 우리 사회의 주변과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지혜를 전달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주변부를 살피는 습관이 그때 생겼습니다.

생태사상에는 ‘가장자리 효과’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들과 산이 만나는 곳, 육지와 바다가 만나는 곳 등 가장자리가 가장 강렬도가 높아서 생명이 잉태되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 강의실 주변이나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친구들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러한 가장자리 효과는 공동체에서도 적용됩니다. 공동체에도 중심에서 활약하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주변에서 얼쩡거리면서 간혹 추임새를 넣거나 딴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가 공동체와 접촉할 때, 가장 주변과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이야말로 그 공동체를 풍부하고 다양하게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회의보다 뒷풀이에 강한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사실 공동체 회의 시간에는 이성과 합리성이 중심이 되어 사람들이 발언하지만, 뒷풀이 자리에서는 욕망, 감각, 몸 등이 살아 움직이고 발언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주변인, 소수자, 마이너리티, 별종 등의 사람들을 만나면, 세계에 대한 독특한 인식방식, 삶에 대한 독특한 철학, 만남을 하나의 사건으로 여기는 시간 등이 돌연 나타나게 됩니다. 그때 저는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이 정말 좋습니다. 그 모임이나 토론회, 회의에 대한 전혀 다른 시각이 주변에서 제출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수결로 결정되는 회의 자리에서 그들의 ‘딴소리’는 대부분 10% 미만의 득표를 얻고 그날부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버리곤 하죠. 생각해보면 정말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수결이 아닌 전원 합의제가 소수의견을 존중할 수 유력한 방식이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합의의 내용 자체보다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다양한 의견을 듣고 나누고, 옆 사람에 대해 보다 깊은 이해를 하게 되며, 결국 사회는 그만큼 성숙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수결은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한 소수의견의 묵살이라는 공리주의나 효율성의 틀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전원 합의제, 그것도 모든 사람들에게 발언권을 주는 자리가 민주주의적인 의사결정 과정에서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바로 관료 시스템이라는 자동주의적인 맥락에 따르지 않고, 민주주의라는 자율주의적인 맥락이 그때서야 구성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관료체계나 시스템의 입장에 선 사람들은 저를 ‘비효율의 화신’이라고도 부르곤 하지요. 그런 점에서 저는 영원한 주변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수자되기, 세상의 재창조

소수자인권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면서, 자연스레 소수자되기도 덩달아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수자인권에 대한 논의는 정치적으로 올바름이 있다는 확신과 당위,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계몽주의적인 발언에 따라 논의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한 소수자를 사회적 약자나 피해자로 보는 시각도 노정하고 있습니다. 더더군다나 차이와 다양성이라는 이름 아래 숨어 들어와 있는 마초, 인종주의자, 파시스트들의 소수자코스프레도 문제겠지요. 그런데 소수자라는 특이점이 많을수록 우리 사회는 다양해지고 풍부해집니다. 왜냐하면 사회 역시도 생태계와 같이 다양할수록 생명이 잘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펠릭스 가타리의 말처럼 공동체가 소수자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풍부해지고 충만해지고 다양해지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소수자를 발명해야 한다”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소수자되기는 마음 속 한 켠에 자리잡은 사랑과 돌봄의 부드러움과 따뜻함과도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는 완전히 색다른 생각과, 색다른 사회와, 색다른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소수자되기라는 역능이 갖고 있는 오묘하고 신비로운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사랑할수록 사랑의 능력이 증폭되고, 우리의 다름은 차이와 다양성의 다름으로부터 완전히 색다른 다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다름입니다. 그런 점에서 소수자되기는 수많은 사건과 특이점을 만들어내는 창조행위일 수 있습니다. 이를 테면 노숙인에 대한 사랑과 돌봄이 노숙인 무료배급소, 노숙인잡지, 노숙인시설, 노숙인인문학학교 등을 만들어내는 것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이러한 특이점은 노숙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늘려나가면서 그들의 자율성을 높여나갈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입니다. 즉, 사랑할수록 우리는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 하나하나를 늘려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소수자다”라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도 모든 면에서 다수자일 수 없으며, 누구나 약간씩은 소수자의 요소를 갖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소수성을 잘 들여다보면 소수자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삶의 내재성’을 말하지 않았던가요? 문제는 소수자되기라는 사랑의 행동으로 나서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그때 소수자되기는 세상을 재창조하는 색다른 원천이 될 것입니다.

철학공방 별난 세미나 구성원들은 소수자되기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몇 가지 실험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한 번은 세미나 과정에 아이가 등장하여 아이되기를 한 적도 있고, 의도적으로 목발을 짚고 거리에 나서서 장애인되기를 체험한 적도 있고, 노숙인과 한판 토론의 난장을 만들어서 인문학을 함께 공부하면서 노숙인되기를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소수자되기에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고 우리 자신이 풍부해진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소수자들은 삶의 진실을 알고 있었고, 삶과 죽음의 경계와 실존의 의미를 알고 있었고,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의 지혜를 갖고 있었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소수자되기는 그저 개념이 아니라, 실천적인 과정이며 삶의 미래진행형이었습니다.

생명의 공생진화, 비평형적 진화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 두 사람이 함께 쓴 책 『천개의 고원』(2001, 새물결)에서 말벌과 오르키데 난초의 비평형적 진화에 대해서 말합니다. 오르키데 난초는 말벌의 뒷꽁무니처럼 생긴 꽃으로 말벌을 유혹해서 모의성교를 하게 함으로써, 그 과정에서 수분을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전혀 상관없는 것들이 만나 색다른 질서를 만드는 것을 ‘코드의 잉여가치’라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말합니다. 문래동에서는 예술가들과 마을 사람들에 의해서 문화예술이 꽃피자 어느 날부터 전혀 상관없는 임대업자들이 들썩이며 집값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Gentification) 현상이 그것인데, 저는 이 속에서 코드의 잉여가치가 가진 빛과 그림자를 함께 보게 되었습니다. 코드의 잉여가치는 자본이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공동체의 시너지를 이를 테면 집단지성, 골목상권, 장소성, 특이성, 다양성 등을 탐할 때 나타나는 색다른 상황을 의미하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서로 이질적이어서 전혀 상관없다고 여겨지는 생명과 사물, 공동체, 사회조직에서 서로의 차이 속에서 시너지효과가 발생하는 경우도 굉장히 많습니다.

생명의 원리는 공생과 상생에 달려 있습니다. 사진 출처: National Cancer Institute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는 생명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는 바이러스와 박테리아 등이 생명에 침투해서 생명의 체세포를 구성하는 진핵세포와 미토콘트리아 등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즉, 외부의 미생물이 생명과 공생해서 생명 자체의 구성요소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것을 ‘공생진화론’이라고 말합니다. 생명의 원리는 공생과 상생에 달려 있습니다. 경쟁과 비용편익 계산에 따라 서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협동하고 공생하고 상생하는 것이 생명입니다. 그런 점에서 가장 최적의 진화, 우월한 종이라는 개념은 환상이자 신화에 불과합니다. 생명은 대체로 적응하며 다양성과 경우의 수에 따라서 서로 협동해서 생존하고 생활합니다. 그리고 그 공생의 방법은 바로 이질적이고 차이 나는 것 사이에서의 우발적인 만남과 시너지, 전염 등의 효과에 따른 것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비평형적 진화와 린 마굴리스의 공생진화처럼 꽃과 나비는 사람들 간의 의사소통과 다른 방식으로 대화하고 감응하고 교감합니다. 어쩌면 고양이를 만져서 고양이가 골골골거리는 것도 대화의 방식 중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각각의 생명은 다양성의 일부로서 하나의 경우의 수가 됨으로써 서로를 지지해 주고 도우면서 살아갑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다양성과 차이의 특성을 가진 생태계와 공동체의 하나의 경우의 수 중 하나가 됨으로써 상생과 공생의 삶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교우위나 경쟁이나 비용편익, 효율성 등이 갖고 있는 문명의 허깨비와 같은 논리를 넘어서 서로 돕고 협동하고 서로 돌보고 지지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작은 실험무대인 철학공방 별난은 실패도 많고 발전도 더디지만 아주 더디고 꾸준히 사람들을 연대시키고 협동시키는 배치이며 자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아주 다양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삶, 다른 사상, 다른 사회, 다른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 판 위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함께 즐길 생명평화의 그때를 위해.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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