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가까이] ⑭ 저 돌멩이는 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지금 여기 가까이] 시리즈는 단행본 『저성장 시대의 행복사회』(삼인, 2017)의 내용을 나누어 연재하고 있다. 저성장을 넘어 탈성장을 바라보는 시대에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지금, 여기, 가까이’에서 찾고자 하는 이야기다.

생태계 전체를 생각한다는 것

예전에는 자연을 그대로 놔두면 마치 우리 몸의 털이 자라듯 저절로 잘 살거나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것은 자연주의 사상이라고도 부릅니다. 제가 30대 초반에 보길도에서 지낼 때였습니다. 어느 날 작은 돌멩이로 유명한 해변을 들린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정말로 예쁘고 빛깔도 다양한 돌멩이들이 많았지요. 그래서 저는 돌멩이 몇 개를 열심히 골라서 가지고 나올 요량으로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마을주민으로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다가와서 제게 “돌멩이 가져가지 마, 저 옆에 좀 봐”라고 화난 어투로 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옆을 살펴보니 벌거숭이 바위가 드러난 해변의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할머니의 얘기에 따르면 돌멩이를 몇몇이 가져가다 몇천 명이 되고 몇만 명이 되자, 해변이 황폐화되기 시작했고 점점 돌멩이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자연이 문명의 외부에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문명의 내부에 들어와 있어서 파괴되지 않도록 돌보고 보호되어야 한다는 걸 그때 깨달았습니다. 엄밀히 말해, 현시점에서 자연주의는 생태주의가 아닙니다.

녹색당을 만들어보겠다고 의기투합한 활동가들이 초록정치연대라는 조그만 공동체에 모였습니다. 대개는 시민단체 소속이거나 농민이거나 사회 활동가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서 생명운동을 하는 분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 분이 전체론(Holism)에 대해서 얘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어렵게만 느껴졌지만 생각할수록 심오한 의미를 느낄 수 있었지요. 얘기인즉슨 자연과 생명, 사물은 생태계라는 연결망에 의해서 작동되고, 부분이라고 생각되는 개체 속에도 전체가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서 생겨난 것인가를 생각할 때 연결망을 먼저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서서히 전체론의 매력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 전체론에 대해서 강의할 요량이었고,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작은 노력 하나하나가 구슬 꿰듯 이어져 인간 띠가 되고 자연을 살렸다는 사실에 뿌듯했습니다. 그제서야 저 자신도 비로소 연결망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사진출처 : Raka C.

2007년 서울의 모대학에서 한 한기 동안 〈생명과 자연보호〉라는 수업을 맡아 강의를 할 때였습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전체론의 심오함을 설파했습니다. 학생들은 대부분 잘 이해가 안 간다는 반응이었지요. 우리 생태계와 인류, 생명, 사물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잘 전달하지 못하였고, 이론은 그저 이론이고, 수업은 그때뿐이었죠. 제가 말한 어려운 개념들은 그냥 혼잣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연말에 태안에 유조선 허베이스피릿호의 기름유출 사고가 났습니다. 저는 학생들과 함께 태안으로 버스를 타고 갔습니다. 그리고 종일 기름띠를 제거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학생들과 저는 엄청난 환경재난 앞에서 망연자실했지만, 최선을 다해서 제거작업에 동참했습니다. 뒤풀이 자리에서 레포트와 기말고사를 모두 없애겠다고 말했는데, 그때야 학생들과 비로소 연결되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학생들이 갑자기 환호를 하고 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입니다. 그 후 한참 동안을 잊고 지내다가 태안에 대한 다큐가 있어 보니, 언제 그런 사고가 있었냐는 듯 영상에서는 참 깨끗하고 아름다운 해변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작은 노력 하나하나가 구슬 꿰듯 이어져 인간 띠가 되고 자연을 살렸다는 사실에 뿌듯했습니다. 그제서야 저 자신도 비로소 연결망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개체인가? 연결망인가?

생명의 신비로움과 경외를 느끼는 순간, 저는 저 자신도 풍부해진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슈바이처박사의 생명에 대한 경외가 어린 시절 동안 저의 화두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살리는 일에 언젠가 동참하겠다는 의지와 생각이 제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물보호센터를 만들겠다고 몇몇 사람들이 나설 때 저도 동참했지요. 그런데 어떤 생태주의자가 동물보호운동은 개체중심주의의 한계를 갖고 있다고 발언했습니다. 저는 전체론적 시각에서 부분 속에 전체가 담겨 있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 발언의 의미가 무엇일까를 오랫동안 고민했지요. 그 발언이 전달하고자 한 의미는 한 생명을 바라보고 돌보고 보살핀다는 것은 한 생명에 대한 정과 사랑과 돌봄, 정동이 극대화됨으로써 오히려 다른 뭇 생명과 생태계에 대해서 외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체중심주의라고 동물보호운동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노숙인을 외면하고 강아지를 안고 가는 중산층 이상의 귀부인이 동물을 키우는 사람이라는 왜곡된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것은 발견했습니다. 물론 저 역시도 풀지 못한 질문은 “악인과 자신의 키우던 강아지가 동시에 물에 빠졌을 때 누구부터 구할 것인가?”라는 아포리즘입니다.

개체로서의 생명은 연결망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동시에 연결망의 시너지효과는 바로 개체로서의 생명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개체와 연결망은 대립한다기보다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베이트슨의 말처럼 모종의 복잡성이 마음을 수반한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바로 복잡한 연결망의 산물이며, 기계의 마음, 생명의 마음, 인간의 마음은 바로 이러한 배치와 관계망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공동체와 생태계가 산출해내는 마음을 지도처럼 그려나가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그 마음의 지도에 생명과 자연의 발자국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동시에 생명과 자연이 연결되고 접속되는 경우의 수들이 만들어내는 무한한 조합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는 사람의 숲과 같이 연결되어 있어서 그 내부에 자원-부-에너지를 순환시키고, 사랑-정동-욕망을 재생하고, 삶과 일상을 반복합니다. 사진 출처 : Agata

예전에 제가 참여했던 프랑스 철학자 펠릭스 가타리의 〈미시정치〉를 읽는 세미나팀이 5.18재단으로부터 지원금을 받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기금을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해서 사람들이 아이디어를 내놓았는데, 별별 아이디어가 다 나왔습니다. 조그마한 기금에도 사람들이 연결되고 접속되는 배치와 관계망은 다양하고 심지어 무한하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그때 공동체는 유한한 자원으로도 배치와 관계망을 달리함으로써 무한한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한자의 무한결속’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기금이 집행되고 회계처리의 순간이 다가오자, 모든 아이디어와 꿈과 연결접속의 시너지들은 대부분 모래알처럼 사라졌습니다. 모든 것이 계산 가능한 것으로 바뀌고 그 자원과 부를 외부에 의존하는 상태로 바뀌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미나 팀은 거의 와해되었습니다. 저 외에 단 한 사람이 남았지요. 그리고 두 사람이 6개월 동안 세미나를 독대 형태로 이어갔습니다. 그때 저는 공동체에서의 회계가 외부에 전적으로 의존하면 안된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깨달았습니다. 즉, 외부에서 회계집행이 끝나면 자생력이 없는 공동체는 와해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공동체를 설명할 때 이런 얘기를 하기를 좋아합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는 50그루 나무가 이룬 숲이 항상성이 강할까, 따로 떨어진 가로수 100그루가 항상성이 강할까? 조금이라도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50그루 나무로 된 숲이라는 대답을 하시겠지만, 그렇습니다. 생태계는 부드러운 내부환경을 조성하여 외부환경에 맞설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요. 그런데 생명 역시도 외부와는 닫힌 내부환경을 조성하여 항상성을 띱니다. 칠레의 인지생물학자 바렐라는 이것을 ‘작업적 폐쇄성’이라고 말합니다. 작업적 폐쇄성은 외부로부터의 투입과 산출로부터 독립된 자기생산(autonopoieis)의 내부작동을 의미합니다. 공동체 역시도 일정하게 닫힌 내부관계망과 배치를 갖고 있어서 외부와 선택적으로 관계하고 내부작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 공동체의 내부작동을 순환과 재생, 반복으로 설명하는 데 저도 그런 구도에 대해서 동의합니다. 공동체는 사람의 숲과 같이 연결되어 있어서 그 내부에 자원-부-에너지를 순환시키고, 사랑-정동-욕망을 재생하고, 삶과 일상을 반복합니다. 그런 점에서 생태, 생명, 생활의 작동원리는 차원과 심급은 달리하지만 유사한 작동원리를 갖고 있는 셈이지요.

우주선 유형의 삶, 분리의 정당화

이러한 생태, 생명, 생활의 일정한 닫힘 즉 작업적 폐쇄성과는 전혀 다른 분리와 닫힘의 영역이 있습니다. 그것의 기원은 형이상학의 전통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즉, 세계, 영혼, 신에 대한 궁극에 대해서 왜 그런가를 묻다 보면 현실세계와 동떨어진 이상적인 질서를 설정하기 때문입니다. 왜(why)라는 본질과 이유를 묻는 것은 남성적이라면, 어떻게(How)라는 작동을 묻는 질문은 여성적입니다. 왜냐하면 사물, 상황, 인물의 본질에 대한 대답은 가부장제의 질서가 갖는 고정관념과 궤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형이상학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의해서 완성됩니다. 즉, 원형이며 이상적인 원본이 현실과 분리된 채 존재한다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그러한 사상은 곁과 가장자리, 주변에 있는 감각, 몸, 욕망, 정동, 돌봄이라는 여성적인 질서와 분리된 남성들만의 이성과 논증, 추론, 관념의 질서입니다. 특히 이러한 남성적 세계관은 현실과의 분리를 추구하며, 이상화된 질서를 현실과 따로 설정하려고 합니다. 즉, 진리란 현실과의 접촉과 감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논증과 추론능력을 가진 엘리트들의 머릿속에 분리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추첨제 민주주의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추첨제민주주의의 시작은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의 직접민주주의입니다. 그것의 사상은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가위바위보나 제비뽑기로 대표나 관료를 뽑아도 상관없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당대의 철학자 플라톤은 이집트의 파로오의 철인정치를 연민하면서 진리란 논증과 추론능력을 가진 엘리트들의 전유물이 되어야 하며 감각적인 현실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엘리트독재가 필요하다는 철인정치를 주장합니다. 그는 그리스에서 융성했던 민주주의의 정반대편에 위치한 이집트 파라오의 절대왕권을 흠모하는 것이지요. 이런 사상은 대중은 무지하며, 진리는 엘리트만의 것이라고 말하는 오늘날의 통속적인 생각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 통속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추첨제 민주주의는 인간과 민중에 대한 지나친 낙관을 가진 동화와 같은 것이라고 비하하기 마련이지요. 그러나 현재 한국에서 운영되고 있는 국민참여배심원제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추첨제를 통해서 국민들 중 배심원을 뽑아서 운영하는데도 사실 그 어떤 유능한 판사의 판결보다 합리적으로 잘 운영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추첨제민주주의는 동화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보다 합리적인 방법 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전 세계 곳곳에서 분리주의, 폐쇄경제, 고립주의를 모토로 한 파시즘이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지난 트럼프 행정부와 브렉시트 현상이 그것입니다. 이들은 지구적 책임과 연결망으로서의 지구촌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난민이나 이주민을 내쫓겠다는 의도를 공공연하게 드러냅니다. 제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들이 구사하고 있는 분리라는 개념은 바로 남성적인 질서이자 플라톤의 이데아를 떠받치고 있는 현실과 분리된 질서에서 연유한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개념적 구도는 역사적으로 굉장히 뿌리가 깊은 것입니다. 또한 우리 주변의 1인 가구가 보여주는 우주선 유형의 삶의 형태 역시도 이러한 분리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이고 미시와 거시를 아우르는 분리라는 개념은 사실상 파시즘의 최후의 보루와도 같은 것입니다. 자연, 생명, 사회, 공동체가 서로 연결되어 있고,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전제를 부정하고, 자기 혼자의 이익과 자기 혼자의 삶, 자기 혼자의 기득권을 놓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문명의 전환기에 나타난 파시즘은 생태계 위기와 생명 위기 시대에 자기 혼자 살아보겠다고 나서는 그런 사람과도 같습니다. 아마 이 정도면 자기 혼자 살자고 화성으로까지 도망갈지도 모르겠습니다.

1인 가구였을 때의 삶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부터 연유한 남성들만의 질서는 자기를 통치해야 남도 통치할 수 있는 개인책임이 극대화된 특징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사진출처 : Sergio Cerrato – Italia

저 역시도 분리 유형의 1인 가구의 삶을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모든 일이 나 하나의 결단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상의하거나 의논할 사람도 딱히 없는 개인이 책임지는 삶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였습니다. 저는 회사를 다니면서 고시원에서 살았지요. 라면 하나 끓여 먹을 여유가 없을 정도로 바빴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동분서주하며 거래처와 회사와 현장을 오가다가 고시원에 와서 잠만 잤습니다. 고시원에서는 다닥다닥 붙어있는 방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기는 했지만, 서로에 대해서 전혀 몰랐고 알 필요조차도 없는 공간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분리로서의 삶을 경험했습니다. 친구들도 대부분 직장으로 회사로 다들 바빴던 시기라 연락이 뜸할 수밖에 없었지요. 저는 저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상의할 사람 한 명도 갖지 못한 채 근 2년을 보냈습니다. 고독, 외로움, 피로감, 스트레스 등이 엉망이 되어 얽혀 있었지요. 그러고 나서 저는 깨끗이 그 생활을 청산합니다. 아무래도 도주였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향에 내려가 마을 사람들과 술 마시고, 들판과 산과 바다에서 노래하고, 대학원 준비를 핑계로 공상이나 상상으로 하루를 소일하고 잠이 오면 자고, 놀고 싶으면 놀러 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참 잉여로서의 삶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잘했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분리로서의 삶은 참으로 남성적인 삶의 형태인 것 같습니다. 책임, 의무, 당위, 가치 등 남성적인 질서가 그것이니까요. 프랑스 철학자 미쉘 푸코는 『성의 역사3 – 자기 배려』에서 자기통치, 자기연마라는 개념을 등장시킵니다. 즉,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부터 연유한 남성들만의 질서는 자기를 통치해야 남도 통치할 수 있는 개인책임이 극대화된 특징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면 자기통치는 자기계발, 자기관리라는 논리와도 일맥상통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결국 접속, 연결, 접촉 등의 관계망으로부터 분리된 개인이 스스로를 책임지고 스스로를 관리하는 것을 찬양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라는 상황은 이렇듯, 사회책임, 공공책임, 공동체 책임을 와해시키고 해체시킨 채, 개인책임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특징을 보입니다. 그러나 개인이라는 개념은 근대에 이르러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었던 지극히 역사적인 개념입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화석연료라는 에너지권력이 있습니다. 과거라면 말 20필, 노예 20명이 해낼 일을 화석연료가 만들어내는 에너지와 그것에 의해 작동되는 전자제품이 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개인들이 에너지와 자원들을 쥐락펴락할 수 있게 될 때, 공동체와 자연생태계와 같은 연결망으로부터 벗어난 개인들만의 분리된 공간을 연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1인 가구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던 바가 극대화된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과 자연, 공동체의 연결망으로부터 분리된 개인은 겉으로는 쿨한 삶을 추구하는 것도 같지만, 특유의 비루함과 외로움, 고독의 절규, 절망스러운 독백 등을 특징으로 하지요. 저는 1인 가구로 살던 시기의 삶을 저의 인생에서 가장 비극적이었던 때라고 규정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반전은 늘 있습니다. 그 생활을 벗어난 이후에 저는 마을 주민들과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고향 형님과 엄청난 주량을 자랑하며 술을 먹는 것으로 그것을 상쇄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술고래이자 춤꾼이자 노랫꾼이 되었지요. 들이며 산이며 바다에서 먹은 술은 잘 취하지 않는다지요. 그리고 공동체와 자연과 생명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에 행복해집니다. 새와 바람과 구름과 마을 사람들과 친구들과 그렇게 젊은 시절의 한때를 행복하게 지낼 수 있어서, 그래도 저는 행운아라고 생각합니다.

생태민주주의를 위하여

최근 생태민주주의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개헌 논의를 하는 사람들과 접속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헌법 개정에서 생명권과 미래세대의 권리의 명시는 이 시대의 쟁점이 될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놀랍게도 개헌 논의를 하는 시민단체들은 대부분 권력구조 개편에만 관심이 있지, 생명권이나 지속가능성을 나중으로 미루려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현재를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기에도 힘든데 왜 아직 태어나지 않는 미래세대의 권리냐 라는 의견도 있고, 인간이 생존하기도 힘든데 웬 생명권이냐 라는 의견도 있었지요. 그런 것들은 나중에 고려해도 늦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지난 19대 대선을 치루는 과정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성소수자의 발언에 참여자들이 외쳤던 “나중에, 나중에”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태민주주의를 보다 적극적으로 준비해서 사방에 알릴 생각이 더 들었습니다. 등대는 0.1%의 땅뙈기로도 나머지 모두를 밝힐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생태민주주의는 지구, 자연, 생명, 공동체, 사회를 연결망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특히 문명의 외부에 자연과 생명이 존재하던 시절이 끝난 것은 분명합니다. 동물과 식물과 자연은 인류문명의 생태보존, 야생동물보호구역, 자연보호구역 등을 통해서 보존되어야 하는 상황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외부에서 돌발적인 찾아오는 자연과 생명의 우연성이 중요했던 시기는 거의 끝났습니다. 자연과 생명의 경우의 수는 최소화되어 문명 내부로 들어와 있는 상황입니다. 그 대신 문명 스스로의 내부에 있는 자연과 생명인 욕망, 정동, 사랑을 통해서 특이점(singularity)을 설립하는 것이 중요해졌습니다. 즉, 예전에는 그대로 놔두면 다 잘되던 시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의도적으로 판짜기를 하고, 부드러운 정동을 부여하고 돌보고 살림을 하는 등의 노력이 들어가지 않으면 싸그리 죽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특이점이 해야 할 일들이 굉장히 많아졌습니다. 따라서 인간을 배제하고 괄호치고 암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모든 논의는 생태주의와는 거리가 멉니다. 최근에 불고 있는 4차 산업혁명의 논의에서 포스트휴먼 담론 등은 생태민주주의가 갖고 있는 사상과 정반대편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생태민주주의의 화두를 갖고 특강이나 세미나, 저술 등을 기획하고 있는 저로서는 앞으로 더 바빠질 모양입니다. 생명 위기 시대가 코앞까지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고 슬기롭게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작은 아이디어와 단서 등이 전혀 구체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죽했으면 분리주의라는 파시즘이 발호하고 권력을 점취하는 상황까지 왔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지구와 생명과 공동체는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저 한 사람의 특이점은 새로운 작업과 실천의 토대가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좀 더 친절하게 구체화하기 위해 연구와 기획에 더 적극적으로 집중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저의 연구가 연결되어 있는 공동체와 사회, 지구촌을 도미노처럼 전환시킬 하나의 마중물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꿈꾸게 되는 여름날 오후입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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