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가까이] ㉓ ‘한 사람’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구성주의는 진리가 주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앎=함=삶의 구도에 따라 구성된 것이라 보는 관점입니다. 구성주의와 발견주의는 세계 재창조를 위한 특이점으로서 한 사람을 만들어냅니다. 즉, 구성주의와 발견주의는 생태민주주의를 구성하는 두 개의 머리입니다.

구성주의가 말하는 한 사람에 대하여

재해는 단일한 사건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존재를 한꺼번에 파괴하는 사건이다. 사진 출처: WikiImages

일본의 영화감독이자 배우인 기타노 다케시(きたのたけし)는 일본 주간지 〈슈칸 포스트〉(2011.4)​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후쿠시마 지진은 2만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한 명이 죽은 2만 개의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얼핏 이해되지 않지만, 그의 발언은 산술적 합으로서의 하나의 사건이 아닌, 하나하나가 유일무이한 존재들로 이루어진 수많은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무심결에 듣던 재난방송에서의 사상자 수는 그 사건의 엄청난 의미와 피해 규모를 드러내는 근거로 사용되지만, 그 한 명에게는, 그 한 사람의 사연만으로도 책 한 권 혹은 영화 한 편 분량 이상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한 생(生)의 파괴입니다. 기타노 다케시의 말 한마디는 놀랍게도 구성주의(constructivism)가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구성주의는 진리가 주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앎=함=삶의 구도에 따라 구성된 것이라 보는 관점입니다. 최초의 구성주의는 칸트의 ‘물자체는 알 수 없지만 현상은 알 수 있고, 인식의 도식(schema)이라는 그물망에 걸려든 것만을 알 수 있다’고 보았던 인식론적 구성주의였습니다. 이후 피아제, 비고츠키 등의 교육학에서의 구성주의,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생명의 자기생산개념, 펠릭스 가타리의 기계의 자기생산 개념, 라투어의 과학철학에서의 사회구성주의 등으로 나타났지요. 특히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는 “한 사람의 죽음은 하나의 세계의 소멸과도 같다”라고 말했다지요. 들뢰즈의 생각은 객관적으로 주어진 하나의 뻔한 세계상이 아닌 무수한 존재들 각각이 세계에 필적할 지위를 갖는다는 생각입니다. 이는 생명권에 대한 깊고 심오한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생명 하나하나는 유일무이한 존재들이며, 이들이 구성한 생활세계와 삶의 이야기들은 사실상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 하나를 던져볼 수 있습니다. “천 명이 모이면 몇 개의 공동체가 생기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간단하게 ‘하나의 공동체가 생긴다’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성주의에 입각하면, 천 명이 모이면 천 개 혹은 천 개 이상의 공동체가 생긴다고 답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구성원들이 생각하는 공동체의 상과 이미지, 스토리는 모두 다 다를 수 있기 때문이지요. 거기다가 여러 사람이 마주치면서 생긴 공동체 내부의 작은 관계들 하나하나도 모두 각각의 구성력을 갖기에, 천 명이 모인 공동체는 천 개 이상의 여럿, 다양, 복수인 셈입니다. 또한 천 명이 서로 연결되고 교직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무한한 경우의 수로 이루어진 구성적 실천의 지평도 열립니다.

유일무이한 생명으로서의 한 사람

기후변화와 생명 위기라는 막대한 상황에 직면한 현존 문명의 작동원리는 사실상 공리주의에 입각해 있습니다.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 최대 행복”이라는 일반원칙의 한편에서 소수자의 희생과 배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러한 공리주의의 아킬레스건이 극단화되면 파시즘으로 이행됩니다. 파시즘은 소수자, 생명, 제3세계 민중에 대한 배제와 분리, 차별, 혐오 발화 등을 정당화합니다. 기후변화와 근본주의, 분쟁으로 인해 난민들이 유럽으로 유입하면서 유럽 각국에서는 분리주의, 폐쇄경제, 고립주의라는 색다른 모습의 파시즘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결국 난민을 배제하겠다는 얘기지요. 앞으로의 생명 위기 상황에서 문명은 어떤 해결책을 찾아야 할까요? 소수자를 희생시키는 것이 해결 방안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문제는 소수자를 배제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소수자는 민중 하나하나와 접속하여 그들에 대해서 돌봄과 환대, 사랑의 순간을 만들 때 문명 자체의 지속가능성과 탄력성의 여부를 결정하는 특이점(singularity) 하나하나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즉, 소수자되기와 같은 사랑의 행동은 문명이 선택할 하나의 경우의 수를 늘린다는 점에서 사실상 문명의 전환과 이행을 위한 초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소수자는 양적 소수나 피해자가 아닌 공동체와 사회를 풍부하고 다양하게 만들 효모와 감초, 촉매제로서의 ‘한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소수자를 배제하고 분리하는 파시즘 경제-미국의 트럼프 행정부나 유럽에 발호하는 분리주의-가 갖고 있는 극악한 논리가 아닌 소수자라는 각각의 특이점을 통해 다양성과 차이를 구성하는 획기적인 생각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이미 여러분이 눈치채셨겠지만, 구성주의에는 소수자, 제3세계 민중, 생명을 세상의 유일무이한 존재로 보고 그들을 사랑으로 보듬고 감싸 안을 수 있는 사상이 숨어 있습니다. 한 사람이라고 해서 원자화된 개인이 아닙니다. 다른 누군가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더 깊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다양한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이지요, 그 한 사람 한 사람은 오히려 우리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하나의 유일무이한 생명입니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의 판조차도 다시 짜야 할 상황입니다. 민주주의가 권력을 구성하는 절차와 대리표상의 역할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 하나하나의 특이점들이 갖는 차이와 다양성에 의해서 더욱 풍부해지고 충만해지는 민주주의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연대할수록 달라져야 합니다. 그것을 생태민주주의라고 했던가요?

객관적인 진리인가? 한 사람의 지혜인가?

우리는 접촉을 통해 지혜를 얻는다. 사진 출처: Vladvictoria

한 사람이 뭔가를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느끼고 지각하고 감성적 실천과 신체 변용에 따라 구성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객관적 진리가 세계에 미리 주어진다는 것일까요? 교육학에서의 구성주의는 일방적인 계몽을 추구하는 교육이 아닌 각각 나름의 답을 찾아 나가는 교육으로 나타나는데, 한국에서는 ‘자기주도학습’이라는 유행어를 남겼습니다. 즉, 하나의 질문에 하나의 대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 사람마다 대답이 다 다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구성주의의 교육관입니다.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앎=삶=함’이라는 간단한 구도를 통해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즉, 안다는 것은 살아가면서 체득하는 것이고, 행동을 통해서 습득한 것이라는 점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생각하듯이 스마트폰에서 피상적으로 접한 정보를 통해 ‘알았다’라고 말하기는 어렵겠지요.

우리는 가까이에 있는 것을 접촉함으로써 지혜를 얻습니다. 그것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관조하고 관찰하는 객관적 진리와는 차이를 갖는 지식 유형입니다. 예를 들어 여성들이 공유지인 삼림, 하천, 바다에서 습득했던 발효, 종자, 요리, 식생, 보관, 살림 등의 지혜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지혜는 연결망의 지혜, 접촉의 지혜이며, 범위한정기술을 통해 자신의 삶의 영토와 구획 속에서 취득된 지혜입니다. 반면 여성의 지혜와 달리 남성들만의 객관적 진리모델이 모태가 되었던 것이 바로 플라톤의 이데아 세상입니다. 이데아론은 분리와 격리, 블랙박스화, 범주화의 논리에 따라 분리하고 쪼개고 구획짓습니다. 결국 우리가 쓰는 전자제품, 기계류 대부분은 전문가들만이 작동방식에 대해서 알고 우리는 전혀 모르는 블랙박스화된 질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전자제품의 on/off 버튼만을 눌러 작동시킬 뿐 고장이 났을 때 뚜껑을 열어 기기판을 들여다보아도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플라톤의 분리의 방법론, 즉 이데아론은 바로 현존 아카데미의 질서와 현존 문명의 원형이 됩니다.

여성들의 앎, 즉 지혜의 노선은 느끼고 감각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지고, 연결시키고, 접촉하고. 배치를 바꾸고, 실험해보고 이리저리 해보는 것일 수 있습니다. 본질을 알기 위한 WHY,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닌 HOW,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왜’라는 본질을 알고자 했던 것이 형이상학의 전통이라면, 삶의 내재성과 생활세계, 실존 등에 주목하여 ‘어떻게’라는 방법을 찾는 것이 지혜의 노선이겠지요, 객관적 진리론의 입장에서는 본질을 적시하는 “ ~은 ~이다”라는 대답을 찾는 과정이라면, 지혜의 입장에서는 “오늘 점심 때 뭐 해 먹지?”라는 삶의 곁에서의 ‘어떻게’라는 문제의식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지혜의 노선은 대답을 세련되게 하는 전문가에 귀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 각각의 차이 나고 다양한 삶이 던지는 색다른 문제 제기의 영역을 개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알면 알수록 물음표가 많아집니다. 더불어 감각하고 접촉하고 사랑할수록 우리는 지혜로워집니다.

한 사람이 구성되기까지의 정동의 역할

“여러분들의 생애 최초 기억은 무엇인가요?” 이런 질문 받아보신 적 있으신가요? 여러 기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릴 적 엄마를 잃어버려 울었던 기억, 소꿉놀이하던 기억, 친구와 싸우던 장면 등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생애 최초 기억 이전 즉,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더 먼 과거의 시간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윤회의 심연이나 영성적인 대지, 원자아의 기억이 있을까요? 다만 기억이 나지 않을 뿐이지, 일상적으로 아이에게 베풀었던 어머니의 돌봄, 살림, 보살핌, 모심, 섬김이 있을 것입니다. 아이들의 시간의 윤곽선 위로, 반복의 부분충동 위로, 흐름(flux)의 사유 위로 그려지는 것이 바로 어머니의 돌봄이며 정동입니다. 정동노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쓰러진 자를 일으켜 세우고,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고,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정돈하고, 오래된 것을 새롭게 만들지요. 정동노동은 실로 생명살림이며, 서로살림입니다. 그리고 공동체의 재생과 순환을 위한 필수적인 행동양식입니다. 그런데 정동노동을 유지하게 만드는 힘은 무엇일까요? 과연 사랑할수록 사랑의 능력이 증폭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감정 소모가 엄청나게 수반되는 감정노동일까요? 사실 둘 다의 요소를 함께 갖고 있을 것입니다. 정동노동과 감정노동을 구분하는 시금석은 무엇일까요? 타자 생산, 재생산을 위한 것이 감정노동이라면, 자기생산, 살림을 위한 것이 정동노동이라고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다 우아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모든 행동들, 이를테면 현관문에 들어와서 신발을 가지런히 놓은 것조차도 정동입니다. 공동체는 정동의 부드러운 흐름에 의해서 성숙되고 유지되고 풍부해질 수 있습니다. 정동에는 우아함과 미학, 윤리가 깃들어 있습니다.

결과보다는 논의의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자기생산이 중요하다. 사진 출처: StartupStockPhotos

우리가 하루 동안 먹는 음식물들은 다 어디로 갈까요? 어떤 사람은 똥이 된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몸무게가 된다고 말하고,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영혼의 무게로 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음식물은 살과 피, 간, 피부, 장 등의 세포를 모두 재생시키는 데 사용됩니다. 피부는 한 달이면 다 교체되고 간은 두 달이면 다 바뀌는 식입니다. 공동체에서의 활동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공동체에서 일정기간 동안 정성을 들여 진행한 사업이 커다란 성과와 결과를 남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실천을 했던 바로 그 ‘한 사람’ 자신을 만들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를테면 공동체에서 아이디어 회의를 할 때, 여러 아이디어가 나오지만 실행으로 옮겨진 것은 그중 몇 개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회의가 중요한 이유는 실행에 옮겨진 사업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채택되지 못한 아이디어들이 흥미롭게 논의되던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그 시간에 있습니다. 그 시간 동안 바로 그런 생각과 아이디어를 만들었던 바로 그 사람, 한 사람을 만들었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공동체, 생명, 한 사람을 만드는 작동원리는 바로 자기생산(autopiesis)입니다.

정동(affect)은 사물의 본질에 있지 않고, 사물의 곁에 서식합니다. 본질과 곁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 소유권이지요. 어떤 지주가 등기부 상으로 땅을 가졌다면, 그 땅을 돌보고 관리하고 부드럽게 살리는 소작농이 동시에 있을 수 있습니다. 땅의 소유권이라는 본질은 지주에게 있지만, 정동은 땅의 곁에 있는 소작농에게 있는 셈이지요. 정동, 사랑, 욕망과 같은 영역은 사물, 상황, 인물, 장소 등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에 배제되고 주변화되고 가장자리에 있었던 영역입니다. 그러나 정동의 영역이 세상을 살리고 재창조하고 돌본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본질이 아닌 곁, 가장자리, 주변을 살핌으로써 그것을 닦고 돌보고 살려냈던 보이지 않는 주체성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지금여기가까이에 바로 한 사람이 필요하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의 잠재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발견주의적 태도는 필수적입니다. 어쩌면 초월적인 제3의 눈을 갖는 것도 발견주의를 위한 방법론일 수도 있습니다. “너는 늘 그렇잖아!”라고 뻔히 보는 것이 아니라, “너에게 이런 면도 있었네!”라고 잠재성을 발견하는 태도가 그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세상을 뻔하게 보는 것으로 유지됩니다. 왜냐하면 등가교환에 동원되는 고정관념의 토대가 형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상대방의 잠재성과 깊이를 응시하는 것은 상대방의 삶의 내재성과 생활세계, 일상의 가능성을 재발견하는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가 『칸트의 비판철학』(2006, 민음사)이라는 책에서 칸트의 선험적 경험론과 대비되는 ‘초월적 경험론’에 대해서 말했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일 것입니다. 구성주의와 발견주의는 가타리와 들뢰즈의 만남처럼 앙상블을 이룬다고 합니다. 세계 재창조를 위한 특이점으로서 한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 즉 ‘구성주의’와 서로의 깊이와 잠재성을 가진 한 사람을 발견하는 것, 즉 ‘발견주의’는 언제나 생태민주주의의 대칭적인 두 개의 머리입니다. 머리 두 개 달린 뱀은 공동체와 시민, 확률론과 함수론, 결사체와 사업체, 구성주의의 ‘주체성 생산의 실천과제’와 발견주의의 ‘잠재성으로서의 마음을 응시하는 마음을 갖는 것’ 등의 앙상블로 이루어진 대칭형 질서를 구성해 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인륜적 공동체가 미리 주어지지 않는 현재의 상황에서 구성주의는 판 짜는 것, 구성적 실천으로 관계망을 조성하는 것, 더불어 그 일을 해낼 주체성을 생산해내는 것 등의 실천과제를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지율스님은 100일 단식 이후 “한 사람의 마음의 변화를 위한 것이었다”라는 말을 홀연히 남겼다고 합니다. 한 사람을 변화시키고, 한 사람을 만들어내고, 한 사람을 발견하는 일은 참 어렵고도 힘들지만 이는 구성주의가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 사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지금-여기-가까이에서 우리의 강렬도가 높아질 때 홀연히 등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내재성에, 생활세계에, 범위 한정이 된 영토 위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준비하고, 만들고, 판 짜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 한 사람’ 다시 말해 ‘우리 중 어느 누군가’를 위해.

*[지금 여기 가까이] 시리즈는 단행본 『저성장 시대의 행복사회』(삼인, 2017)의 내용을 나누어 연재하고 있다. 이 글 「‘한 사람’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는 계간 〈모심과 살림〉 2017년 여름호에도 게재된 바 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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