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가까이] ㉒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질까?

지혜는 책이나 검색을 통해 얻는 정보나 지식과는 다릅니다. 지혜는 행동에서, 실천에서, 연결망에서, 삶과 생명과 자연에서 그리고 사랑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정보주의에 빠진 사람들

오랜만에 대학 동기들을 만났습니다.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안부를 묻고 이런저런 소식을 나눈 다음이면 사회문제, 정치문제 등으로 화제가 넘어갑니다. 그러다 누군가 목소리를 높여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대개 자신이 무엇인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입니다. 간혹 “그게 정말이야?”라고 누군가 진위 여부를 확인하려 할 때, 이런 친구도 간혹 있지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2권 2장에 나온 내용이야.” 그러면 좌중은 낄낄낄 웃고 넘어가지요. 이렇듯 우스개로 넘어가기는 하지만, 대개는 자신이 잘 안다고 생각하는 내용에 권위를 싣기 위해서 별별 수단이 동원됩니다. 대학 4년 동안 동기들과 세미나를 하면서 늘 느꼈던 부분이지만, 앎의 의지는 권력의 의지이기도 합니다. 논리나 근거가 화려하고 그럴듯한 이야기에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기 마련이고, 그런 화려한 언변을 가진 사람이 그 자리의 중심에 서는 게 관례입니다. 그래서 논쟁은 대부분 그 지식이 틀렸네, 맞았네 하는 부분에서 이루어지지만, 지식을 많이 아는 사람이 우세하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지요.

검색을 통해 진짜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
사진 출처 : Pexels

장광설을 늘어놓는, 일명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 J군을 만난 것은 제가 강의하던 고전세미나에서였습니다. 그는 수업 중에 교수 얘기가 과연 근거가 있는지 의문이 생기면 뭐든지 실시간으로 ‘검색 찬스’를 쓰곤 했습니다. 강단에 선 저는 솔직히 말해 움츠러들기도 하고, 스스로 확인하기도 하고, 심지어 그에게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검색을 통해서 아는 지식이 과연 J군의 것일까?’하는 겁니다. 저는 J군에게 자기 삶에 기반한 얘기를, 자신의 이야기를 해보라고 요구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굉장히 초라하고 군색한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화려한 이론과 개념은 어디를 가고, 그는 원룸에서 살고, 편의점 도시락을 먹으며, 인터넷으로 외로움을 달래고 있다는 점을 말했습니다. 요리와 살림, 연애, 우정 등과 거리가 먼 J군의 삶에는 인터넷을 통해 지식과 정보가 대량으로 취득되었지만, 삶의 지혜는 초라하고 왜소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오늘 점심에 뭘 먹지?”라는 질문에도 대답을 못했습니다. 그저 끼니를 때우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를 보면서 젊은이들의 고달픈 일상과 삶의 애환, 지혜보다 지식이 더 많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의 구도

대학 때 마당극 무대에 서면서 네 번쯤 연기라는 것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 악역이었는데, 핸섬한 주인공과는 거리가 멀고 인상을 쓰면 악인 같이 느껴지는 저의 얼굴과 맷집 좋아 보이는 덩치 덕분입니다. 처음 시작은 아주 사소한 캐스팅이었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구사대 역할을 할 인물이 없다고 연출을 맡은 선배가 하소연 하다가, 지나가는 저를 불러 세우는, 말하자면 ‘길거리 캐스팅’을 당한 것이었지요. 저는 마당극에서 혼신을 다해 과잉 액션을 하는 바람에 모든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게 됩니다. 특히 노동자 파업을 깨기 위한 구사대로 분해서 몽둥이를 들고 좌중을 때리는 장면에서 어떤 아주머니는 “아이구 이 나쁜 놈아, 아이구 이 나쁜 놈아!”하면서 저를 쥐어박기도 했습니다. 제 몽둥이질은 연기였지만, 아주머니의 주먹에는 감정이 실려있어서 어찌나 손때가 매운지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지요. 마침내 연출자까지 나서서 “이 사람은 정말 구사대가 아니고, 연극배우일 뿐이다”라고 설득을 하고서야 풀려났지요. 저의 새로운 능력을 발견한 날이었달까요. 그 이후로도 저의 악역 연기는 계속되었습니다. 브레히트의 《갈릴레오 갈릴레이》라는 연극에서 종교재판관 역할을 하는가 하면, 일본 순사, 백골단 등을 줄줄이 맡아 열연을 하면서 그때마다 좌중의 공분을 사곤 했습니다.

그리고 진짜 대학로에서 연극 연출을 하고 있는 선배를 찾아가, 저도 앞으로 정식 배우가 되어 연기를 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그 선배는 조용히 웃고는 라면을 끓여 주었습니다. 라면을 같이 나누어 먹고 나서, 그 선배는 저에게 매일 라면만 먹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연극을 사랑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말했지요. 그러나 남은 라면국물에 소주를 마시면서 선배는 “너는 배고픔을 아직 몰라. 부모님이 잘 사는 것도 아니고, 모든 연극에 악역이 매번 나오는 것도 아니고”하면서 저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좌절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빛나는 무대 배후에 있는 삶의 애환과 고달픔, 배고픔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재미있고 화려한 세계이지만, 예술가가 된다는 것을 삶으로 받아들일 때 아주 색다른 문제에 봉착할 것이라는 점도 느꼈습니다. 그것은 연극을 삶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저 겉으로 느껴지는 정보나 지식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봉착하는 여러 가지 문제와 해결지점, 과정 등에 대한 지혜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때 연극무대에 서는 꿈을 꾸었지만 연극인의 삶을 살았다고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삶으로서의 연극은 정말 완전히 차원이 다른 문제였으니까요.

삶의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아주 색다른 이야기가 나옵니다. 늘 책으로 혹은 영상으로 보던 공동체도 사실 그 삶 속으로 들어가면 또 다른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한 번은 주거공동체에 찾아가서 협동하고 공유하면서 사는 의미 있는 모습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공식적인 방문일정은 공동체의 지향성과 규칙, 이념에 대한 것이었고, 굉장히 수준 높은 이야기들이 오갔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상향이나 유토피아가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도 했지요. 그러나 공식적인 행사가 끝나자, 한 공동체 구성원이 슬쩍 저에게 얘기를 했습니다. “공동체에서 풀지 못한 갈등들이 정말 많아요. 다 사람 사는 일이고, 문제의 연속이지요.” 저는 그때서야 그 공동체가 책에 나와 있는 개념이 아니라, 삶의 현장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상적인 공간이나 이상적인 공동체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삶의 지혜를 쌓아가는 과정에 있을 뿐입니다. 그제서야 저는 칠레의 생물학자들인 마투라나와 바렐라가 말했던 ‘삶=앎=함’의 구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삶을 벗어난 이론과 개념, 사상들이 얼마나 무망한 것인가를 그때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생태적 지혜, 연결망의 지혜

최근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였습니다. 기후변화로 인해 노인이 보유한 생태적 지혜가 무력해지고 더이상 지혜로서 기능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신문기사였습니다. 노인, 특히 할머니들은 종자, 발효, 저장, 요리, 식생 등을 텃밭과 하천, 삼림과 같은 공유지에서 취득하고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기후변화로 인해 미묘하고 아리송했던 지혜의 영역들이 구전되고 전달되고 전승되어도 더이상 유효할 수 없는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이제 기후변화는 인류에게 적응의 지혜를 요구하는 상황입니다. 색다른 삶의 방식과 완전히 차원이 다른 실험과 실천이 요구되는 것이지요. 특히 농업 분야에서는 도전과 실험, 모험이 지속되리라는 점이 분명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생태적 지혜는 연결망에서의 지혜라고 불리고, 지식과 같이 체계와 구조, 전문가들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삶과 생명, 자연에서 취득된 지혜입니다. 기존 지식은 구조화하고, 분류하고, 잘게 쪼개고, 분리함으로써 성립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전문가들은 이러한 방법에 따라 만들어진 하나의 모델을 제시하고 진리인양 여기기 일쑤였지요. 반면 생태적 지혜는 접촉하고 연결되고 감응하고 변용되는 과정에서 취득되는 개념화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이를테면 요리에서 ‘적당히’라는 단어를 쓸 때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느낌, 감수성, 감각이 무척 중요하지요. 그런데 이제까지의 근대의 탈주술화과정은 생태적 지혜와 함께 작동했던 미신, 신화, 주술, 애니미즘, 생태영성 등을 탈색하고 추방시키는 과정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지극히 지배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이 특이하고 체계화될 수 없는 지혜에 대해서 헤게모니를 행사하거나 퇴출시켜 왔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근대문명은 자연과 생명의 신비로운 비밀을 해부해서 드러내고 뻔한 것으로 단정내리면서 기계적인 것으로 규정해 버렸고, 급기야 문명을 유지하는 도구와 수단으로 여기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기후변화라는 문명의 아킬레스건이 최종적으로 남아 있는 할머니들의 생태적 지혜마저도 무력화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삶의 위기요, 농업의 위기요, 문명의 위기입니다.

기후위기는 오래된 생태적 지혜의 전승을 무력화하고 있다.
사진출처: KIMDAEJEUNG

저희 어머니는 생태적 지혜를 탐색하고 체득하신 분입니다. 장터에서 좌판을 깔고 채소를 파는 할머니들의 요리법에 대해서 자세히 귀담아 듣기도 했고, 텃밭에서 농부들이 지나가면서 한마디 하면 그것을 사소하게 여기지 않고 실험해 보았고, 특히 연로하신 분들의 몸과 건강에 대한 얘기를 그저 사소한 것으로만 여기지 않았던 분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태적 지혜의 실험장에 제가 놓여 있었지요. 반찬에서 색다른 것이 나오면 제가 제일 먼저 먹고 반응을 살피는 어머니의 시선을 느끼곤 했으니까요. 저는 늘 연극적인 모습으로 “맛있다”를 연발했습니다. 물론 생태적 지혜가 늘 성공한 것만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침, 수지침, 뜸, 부황, 호흡, 식사요법 등등이 효과가 없을 때도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적어도 그런 생태적 지혜를 실험하는 어머니에게서 삶을 신중하게 조심스럽게 부드럽게 대해야 한다는 점만은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투박하고 부주의한 삶의 방식이 질병의 원인이 된다는 점도 알게 되었습니다.

몸과 마음의 평행선 달리기

사랑을 하면 사람이 맹목적으로 바뀐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아직 관계가 그리 깊지 않음에도 내 감정에 못 이겨 섣부른 고백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보고 싶으면 무작정 찾아가서 만나게 되지요. 그 과정에서 사랑이 깨지기도 하고, 더 무르익기도 합니다. 사랑이 신체와 감각과 감정에 따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은 내 안에 있는 자연과 생명에 대한 접속이기 때문이니까요.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라는 얘기는 쉽게 꺼내기 어려운 주제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사랑과 변용이 우리에게 지혜를 선사할 것이라는 얘기를 처음으로 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구도는 간단합니다. 사랑과 신체 변용은 들뢰즈와 가타리에게는 되기(becoming)라고도 불립니다. 마부의 지혜를 갖기 위해서는 말을 사랑해야 하고, 운전자의 지혜를 갖기 위해서는 자동차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그것이지요. 그것을 좀 어렵게 쓴다면, 신체가 말-되기, 자동차-되기, 자전거-되기 등으로 변용될 때, 공통관념이라는 마음에서는 승마법, 운전법, 경륜법이라는 지혜가 평행선을 그리며 생긴다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몸과 무관한 지식이나 정보는 진정 안다는 것과 무관한 것일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사랑으로 몸이 변용될수록, 몸으로 더 많이 느끼고 감각할수록 많은 지혜와 개념들을 선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즉, 삶의 현장에서 체득하고 감각한 앎만이 진정한 앎이라는 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번은 제가 철학을 공부하게 된 배경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배경에는 스피노자도 한몫합니다. 제가 철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 때 윤리선생님이 스피노자에 대해서 특강을 해주었던 날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철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짐작만 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윤리선생님은 안경알 세공일을 하면서 철학을 했던 스피노자의 담백하고 검소하지만 열정적인 인생에 대해서 말해 주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저는 철학을 잘 몰랐지만, 철학자 스피노자를 무척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매혹당했다’는 말이 아마 이럴 때 사용하고 만들어진 듯 싶었습니다. 그해 방학 내내 저는 『에티카』의 난해한 개념에 갇혀 쩔쩔매게 됩니다. 하지만 그 후로 저는 『에티카』를 끼고 다니면서 친구들에게 그 책에 나오는 아포리즘을 설명하기도 했으며, 스피노자의 삶에 대해서 친구들에게 얘기하고 다녔습니다. 그의 철학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합니다. 그 자체가 철학자-되기였으며, 순전히 한 철학자를 사랑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제 자신이 스피노자를 사랑했기 때문에, 철학자-되기를 해버린 점은 제 전공 선택과도 관련됩니다. 철학자-되기를 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고3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철학과를 진학하여 철학에 입문하였지요.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는 사례와 관련해서 이런 경험도 있습니다. 어려서 저는 상처가 날 때마다 어머니께서 치료해 주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그래서 자주 어머니를 병원과 동일시하기도 했지요. 어머니께서 구급약 상자를 열고 옥도정기, 붕대, 연고, 일회용 밴드 등을 꺼내서 치료해 줄 때마다 아픔을 꾹 참고 몸을 맡기면서, 그 신기한 물건들을 유심히 관찰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없는데, 놀다가 발톱이 반쯤 빠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갑자기 응급상황을 당한 친구들도 놀라고 저도 놀랐지만, 저는 엄청난 침착성을 발휘하며 어머니를 떠올렸습니다. 그래서 순식간에 어머니-되기를 합니다. 신중하고 일사분란하게 옥도정기를 바르고, 남아서 덜렁거리는 발톱을 핀셋으로 ‘으으으’하면서 뽑아냈고, 상처에 연고를 바르고 붕대를 감습니다. 그 순간 저는 환자이면서 치료자 즉 어머니이기도 했습니다. 저의 침착한 치료를 바라본 친구들은 모두 경탄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제가 그동안 치료를 해주던 어머니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 지혜마저도 알게 되어 버린 것이 아니었나, 하고. 그때의 사건을 회상하면 그런 느낌이 듭니다.

사랑은 영원히 지속된다!

저는 사랑과 신체 변용의 순간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때는 내 안에 있던 자연과 생명이 움직이는 때이고, 그래서 우주와 자연, 생명과 합일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스피노자는 영원성이라고 설명하지요. 스피노자는 인간이 유한하지만, 우주와 자연, 생명은 합일되는 순간순간은 영원할 것이라는 구도를 그립니다. 그래서 밥을 먹을 때 더 먹고 싶은 생각이 들 때 무척 기쁘고, 아내를 바라볼 때 부드러운 사랑의 느낌이 생겨날 때 무척 기쁩니다. 그 기쁨의 순간이 영원했으면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영원성은 매 순간순간이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자연과 생명의 합일을 보여줄 때 도래하는 사건입니다. 그런 점에서 내 안의 자연과 생명의 능력 즉, 욕망과 사랑의 능력이 긍정되고 발휘되는 상황에는 영원한 기쁨의 상태로 향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영원성의 순간은 느낄 때는 간혹 사건으로서 찾아오기도 하고, 삶의 과정에서 천천히 찾아오기도 합니다. 어떤 순간 아내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젓가락이 같은 반찬으로 향할 때, 같은 노래 같은 구절을 동시에 부르거나 들을 때, 아내와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수다를 떨 때 등이 그런 영원성의 시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더불어 내가 생명과 함께 하는 시간, 즉 고양이들을 쓰다듬으면서 골골골 소리를 듣다보니 저도 괜히 기분이 좋아질 때나, 고양이들이 밥을 먹고 나서 같이 놀자고 몸을 부빌 때 등등의 시간도 역시 영원성의 시간에 들어간 느낌이 들었습니다. 더불어 꽃과 나비, 들과 산과 바다에 가서 바람과 태양과 물길과 풀벌레 소리와 하나 될 때의 느낌은 영원성의 시간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영원성의 시간, 생명과 함께 하는 시간.
사진출처: cely_

우주, 자연, 생명과 하나 되는 사랑과 변용은 지혜의 원천임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보와 지식으로 구조화되고 분류되어 있지 않더라도, 우리의 몸의 느낌, 감수성, 감각 등에서 살아 움직이는 지혜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를 체득하고 느끼고 감각하는 순간이 바로 영원성을 향한 관문을 통과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성이 보편성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것이라는 보편어법의 지식구조물과, 영원성의 시간에서 얻어지는 지혜는 완전히 상이한 것입니다. 즉, 분류, 분석, 분리, 범주화, 개념화 등을 통해서 이루어진 보편성과, 감각, 감성, 느낌, 변용, 욕망, 무의식, 사랑으로 이루어진 영원성은 완전히 다른 차원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몸으로 감각으로 감수성으로 많은 것을 알아내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피상적인 정보와 지식이 아니라 삶의 깊이와 잠재성 속에 숨어 있는 우리 안의 자연과 생명을 발견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지혜의 원천을 얻게 됩니다. 갑자기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살펴보고 싶은 밤입니다. 스피노자를 너무나 사랑했던 고등학생 시절이 떠오르는 시간입니다.

[지금 여기 가까이] 시리즈는 단행본 『저성장 시대의 행복사회』(삼인, 2017)의 내용을 나누어 연재하고 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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