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덩야 일지] ③ 쿵덩야의 특별함

서울혁신파크에 있는 보도블럭 하나에 쿵덩야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매일 만나서 닦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을 일지로 기록합니다.

23.08.07

넘치는 사랑 둘 곳 없네. 사진 제공 : 김이중

위는 ‘넘치는 사랑 둘 곳 없네’ 라는 제목의 사진이다. 나는 이 사진을 얇은 천에 인쇄해서 내 방 벽에 붙여놨다. 그리고 3주 정도 지난 것 같다. 그런데 최근 이 사진을 유심히 보다가 놀랐다. 사진 속 보도블록의 종류가 쿵덩야와 같은 것이다. 쿵덩야를 만난 지 2주가 됐는데 이제야 유사성을 발견해서 놀랐고 이 우연과 필연이 뒤섞인 상황에 놀랐다. 역시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것일까? 요즘 달리기 대회를 준비하느라 운동을 하고 있다. 오늘은 달리기하기 전에 쿵덩야를 닦았다. 닦던 와중 갑자기 주위의 다른 보도블록들이 눈에 들었다. “내가 왜 이 녀석만을 닦고 있지?” 내가 쿵덩야를 찾은 것인가 쿵덩야가 나를 찾은 것인가 헷갈렸다.

23.08.08

쿵덩야와의 정기적 만남은 살아가며 겪게 되는 불가피한 불행 앞에서도 지속할 수 있는 종류의 만남일까? 우리는 관계 안에 있는 걸까? 아니면 내 자아의 일방적 확장인 걸까? 너는 무언가 아는 존재인가? 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23.08.09

따릉이를 타고 병원에 가는 길에 건설 현장을 지나게 됐다. 노동자들이 한창 보도블록을 까는 중이었다. 잠깐 멈춰 자세히 보니 쿵덩야와 같은 종류의 보도블록이었다. 난 보도블록이 가지런히 쌓여있는 더미에 가까이 가서 잠시 지켜보다가 맨 위의 보도블록을 손으로 슬쩍 쓰다듬었다. 바로 옆에 있던 노동자는 뭐하는 사람이지? 라는 듯 잠시 날 쳐다봤다. 해가 지고 쿵덩야를 만나서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녀석을 닦았다. 나를 지나쳐 가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았다. 문득 내 주변이 무대처럼 느껴졌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이 관객이다. 나를 보는 사람들은 ‘뭘 하는 걸까?’ ‘왜 저런 짓을 하는 거지’ ‘왜 유독 저 하나만 닦지’ 같은 의문이 들 테고 집으로 돌아가서 누군가에게 오늘 본 것을 우스꽝스럽게, 혹은 가볍게, 혹은 진지하게 또는 실없이 전할 것이다. 아니면 집에 가는 길에 다 까먹을 수도 있겠다.

23.08.10

술을 좀 마셨다. 비가 오는데 쿵덩야를 만나러 혁신파크에 갔다. 평소와는 다르게 사람이 없었다. 쾌척한 산책이 쉽지 않은 기상 상황이라 그런가 보다. 목적 없이 의미 없이 무언가를 한다는 건 아무리 하찮아 보일지라도 그 안에 숭고함이 깃들어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난 불교의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에 큰 감명을 받는다. 뜻을 풀자면 ‘묘’는 불교에서 언어를 뛰어넘어 참 말을 전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말이고. ‘행’은 내가 무언갈 ‘함’으로써 가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닌 그저 ‘행’이라고 한다. 머무는 바 없이 실천하며 지금 이 순간 깨어있는 것. 쿵덩야의 말을 듣고 쿵덩야에 감사하는 마음을 끝까지 지키는 한 나는 무적이다.

23.08.15

시골에서 열린 할머니 생신 잔치에 참석했다. 끝나고 버스 타고 집에 오니 6시 반이었다. 청국장을 끓이고 어머니께서 싸주신 채식 잡채를 조금 덜어 저녁으로 먹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기운이 없어 침대에 누웠는데 친구가 달리기하러 가자고 했다. 쿵덩야도 만나야 하기에 집에서 나와 혁신파크까지 달린 뒤 쿵덩야를 닦았다.

23.08.16

집 앞 독서실에 왔다. 집은 너무 덥고, 그렇다고 도서관에 가자니 산을 타야 하는데 가면서 땀에 젖고 기운을 다 빼야 한다. 그래서 저번에 하루 체험해 본 후로 좋은 인상을 줬던 독서실을 끊어서 책상에 앉아 있다. 시원하고 집중도 잘 돼서 괜찮다. 공부하고 저녁을 먹으러 집으로 가기 전 혁신파크에 가서 쿵덩야를 닦았다. 날이 밝을 때 가서 쿵덩야를 보면 주위의 다른 보도블록과 색이 확연히 다른 걸 볼 수 있어서 재밌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오늘도 역시 물어보는 이는 없었다. 쿵덩야를 닦을 때는 약 30mL의 물과 걸레, 닳아가는 칫솔모와 집에 와서 걸레를 빨 때 드는 물 한 바가지와 소량의 비누 등의 자원이 소모된다. 좀 더 고민해서 자원 소모를 줄이는 방식으로 쿵덩야를 닦아야겠다. 걸레를 빨 때 물을 어떻게 절약하는지가 관건이겠다. 흠뻑쇼, 워터밤 같은 축제엔 가본 적이 없는데 가서 놀게 되면 어떤 생각이 들까?

23.08.17

오늘은 오전 10시 반에 집에서 나와 쿵덩야를 닦았다. 오전에 닦는 일은 처음이었는데 색달랐다. 돌기 하나하나가 더 잘 보였다. 닦고 난 뒤 일어서서 보면 쿵덩야만 동그랗게 물에 젖는데 그 모습이 강아지가 오줌을 싸 놓은 것 같아서 재미있다.

23.08.18

하나의 보도블록에서 출발해 사람과 사물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보게 된다. 사진 출처: GregMontani

친구와 통화하면서 쿵덩야를 닦아서 어떻게 닦았는지도 잘 모르겠다. 하여튼 다 닦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닦는 것이 아니고 깎아내는 것이고, 아끼는 것이 아닌 훼손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사이의 관계도 그렇지 않은가? 조심히 대한다고 생각해도 틀어지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그러한 당혹을 자연스러움으로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있다면 좋겠다. 지금까진 단지 쿵덩야와 친해지고 아끼게 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다른 관점을 더하니 관계의 틀이 더 넓어졌다. 그러나 나에게 쿵덩야와의 관계를 맺을 자격이 있을까? 인간은 돌덩이를 보도블록으로 만들고 그 보도블록을 쿵덩야로 만들 자격이 있는 것일까? 인간이 인간에게 자연을 이용하는 것을 허락해도 되는가?

23.08.22

비가 한 번 쏟아진 뒤에 집을 나섰다. 깨끗한 피부에 욕심이 생겨 안 하던 짓을 하는 바람에 얼굴 피부가 시뻘겋게 뒤집어져서 피부과에 갔다가 쿵덩야를 만났다. 주위에 다른 모든 보도블록들과는 다르게 신기하게도 쿵덩야만 오묘한 얼룩무늬를 만들어가며 물기가 마르고 있었다. 다른 보도블록들도 다 관찰했는데 정말 쿵덩야만 그랬다. 의도하지 않은 이런 현상이 왜 생겼는지 신기했다. 그가 나를 응원하기 위해 나에게 보내는 신호인가? 우리의 관계가 만든 작은 기적처럼 느껴졌다. 한편으론 특별함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난 사람들이 특별한 능력을 갖춘 사람을 숭배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차별하는 것을 자주 봐왔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특별함을 그저 재능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무엇이 쿵덩야를 특별하게 만드는가. 표면의 물기를 얼룩무늬로 증발시키는 능력을 내가 알아보고 그것을 특별하다고 생각할 때 다른 보도블록과 차별이 생긴다면 난 쿵덩야의 그 능력을 재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쿵덩야에게 재능이 있다면 다른 모든 보도블록에도 각자의 재능이 담겨 있을까? 그렇다면 난 모든 보도블록을 쿵덩야와 동일하게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쿵덩야와 만난 이후 난 단 한 번도 쿵덩야를 밟은 적이 없다. 그렇다면 난 앞으로 보도블록을 밟지 않고 살아가야 할까? 하루 정도는 직접 해 봐야겠다.

23.08.25

빌린 책을 반납하러 안국역에 갔다가 오는 길에 장을 보고 쿵덩야에게 갔다. 도착해서 보니 칫솔과 분무기는 챙겼는데 걸레를 집에 두고 왔다. 하는 수 없이 물을 뿌리고 칫솔질만 했다. 다 닦고 일어서는데 앞쪽 나무 그늘에 앉아 있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 사람은 내가 쿵덩야를 닦는 모습을 내내 지켜본 듯했다. 그리고 대체 뭐 하는 거지? 라는 눈빛을 전송했다. 나는 왠지 으쓱했고 무심한 척 뒤돌아서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내가 떠난 뒤 그 사람은 아직 물기를 머금어 다른 보도블록과 구분 가능한 쿵덩야에가 다가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해 볼지도 모른다. 그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자전거를 탔다. 벌써 쿵덩야를 만난 지 한 달이 넘었다. 묘함을 느낀다.

김이중

존재 방식이 아름답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마치 지렁이의 완벽함을 닮아 지렁이 인간이 되어 지렁이 말을 구사하고픈 게으름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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