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성장시대 협동운동의 전략지도] ⑥ 문명의 전환과 전환사회의 전망 수립

기후위기 상황에 대응하는 전환사회의 설립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일을 해낼 사람과 그 일에 나설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관계망에서 사람들은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지만, 너와 나 둘 다 될 수 있는 간주관성, 사이주체성, 서로주체성의 영역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한 관계망에서의 주체성 생산은 결국 하나의 특이점이 되어 새로운 전환사회의 형태와 생활양식 등을 구성해낼 것이다.

. 문명의 전환과 전환사회의 전망 수립

1. 전환사회 전망 : 관계망의 복원은 다양성의 재건

기후위기의 상황이 시시각각 다가오면서, 문명의 전환은 우리 시대에 긴급히 요청되는 핵심 사안이 되고 있다. 개인적인 노력과 실천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문명의 전환은 바로 관계망과 배치의 설립에서 출발한다. 일단 관계망과 배치는 개개인에게도 선택의 경우의 수가 될 것이며, 현실적인 맥락을 형성하여 현실 변화에 기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전환사회의 전망수립은 아주 미세한 관계망의 설립에서도 시작할 수 있다. 나와 너의 만남, 몇 사람이 만든 모듈, 컨비비움, 커뮤니티 등의 확산모델을 따르는 것도 상당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환사회의 설립을 위해서는 일단 그 일을 해낼 사람과 그 일에 나설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주체성 생산의 과제는 늘 핵심적인 부위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관계망에서 사람들은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지만, 너와 나 둘 다 될 수 있는 간주관성, 사이주체성, 서로주체성의 영역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망에서의 주체성 생산은 결국 하나의 특이점이 되어 새로운 전환사회의 형태와 생활양식 등을 구성해낸다.

저성장시대에는 복잡성 감축을 통해서 다기능적인 관계를 통해서 해결할 부분을 늘려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활력을 갖고 정동과 돌봄을 수행하면서 관계의 내실화를 추구하고 밀도를 높여나가는 것이 중요한 해결의 열쇠인 것이다. 출처 : https://pxhere.com/en/photo/626293
저성장시대에는 복잡성 감축을 통해서 다기능적인 관계를 통해서 해결할 부분을 늘려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활력을 갖고 정동과 돌봄을 수행하면서 관계의 내실화를 추구하고 밀도를 높여나가는 것이 중요한 해결의 열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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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성장시대는 자원으로서의 생명과 자연의 한계가 분명해짐에도 불구하고, 기존 문명은 더욱 복잡해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더 기능을 세분화하고 더 속도감 있게 일처리를 하고, 더 효율적으로 일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 속도에 사람들이 나가떨어지기 마련이다. 그 해결의 단서는 복잡성으로서의 기능분화가 아니라, 다양성으로서의 다기능적인 관계의 실질화에 달려 있다. 기능적인 완결성을 추구하고 역할과 직분을 나누면 더 일이 많아지는 엔트로피의 증대상황을 피할 수 없다. 오히려 복잡성 감축을 통해서 다기능적인 관계를 통해서 해결할 부분을 늘려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기능적인 완결성의 일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관계망을 설립하고 촉진하는 활동을 활동가들이 담당해야 한다. 이를 통해서 공동체의 판과 구도 위에서 강렬도의 증가에 따라 그 일을 해낼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미리 주어진 직분과 기능으로서의 과업이나 임무는 너무도 세분화되고 기능화되어 역설적이게도 도리어 기능정지에 빠질 위험이 높다. 더욱이 그것을 해냈다고 해서 저성장의 국면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바쁘고 고되고 지칠 뿐인 것이다.

오히려 활력을 갖고 정동과 돌봄을 수행하면서 관계의 내실화를 추구하고 밀도를 높여나가는 것이 더 중요한 해결의 열쇠라고 할 수 있다. 관계망이 해낼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의심하는 경우도 많다. 어떻게 조합원의 자율성에 내맡길 수 있는가라는 점에 대해서 회의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문명의 전환이라는 거대한 물결은 협동조합의 마음의 배치와 무의식의 행렬에 따른 도도한 흐름을 변화시켜, 우리가 상상치도 못한 활력과 정동의 힘의 발생을 촉진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전환사회의 문지기로서의 활동가의 역할도 크다. 활력은 자연발생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는 관계 속에서의 다양한 기호작용들 – 냄새, 색채, 음향, 몸짓, 맛, 이미지, 영상, 정보, 지식 등 – 의 교류와 반복이 있어야 하고, 교육프로그램과 워크샵, 힘 다지기 행사, 커뮤니티 프로그램 행사 등이 있어야 한다. 이를 통해서 활동가들은 퍼실리테이터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통해 전환사회의 문지기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기능일 수 있다. 즉, 다기능적인 관계를 촉진하는 기능일 뿐, 그것이 여러 가지 임무와 역할로 기능 분화된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저성장시대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방식을 그대로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전환사회의 증후이자 마중물이라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전환사회로 향한 이행과 패러다임 전환의 계기로 삼는 것이 요구된다. 즉, 우리는 이제 시작된 기후위기와 생태계위기에 인류문명이 대응하고자 하는 전환사회의 씨앗을 심는 귀중한 한 걸음을 내딛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것은 사업체가 기능 정지되고 잘 되지 않고 고장 나는 차원의 문제로 한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전환사회에서 협동조합의 커다란 지평의 변화는 결국 우리 자신의 삶의 방식과 행동 양식의 심원한 변화를 의미한다. 완전히 새로운 판을 깔 준비를 해야 할 수도 있다. 그것은, 격변과 위기의 상황은 주저앉아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해낼 사람과 그 일에 나설 사람을 만드는 관계망이자 판으로서의 협동조합의 역할을 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가운데서 홀연히 나타날 예상치도 못한 사람들과 삶의 방식, 활동 양식에 대해서 주목하자. 우리는 그들을 위해 마중물을 붓는다.

2. 문명의 전환 : 순환, 평형, 저엔트로피, 적정규모, 속도제어, 제한으로

많은 사람들이 문명의 전환을 만들어내는 구체적인 형태로, 자동차문명에서 자전거문명으로, 아파트문명에서 마을공동체문명으로, 육식문명에서 채식문명으로, 일회용품문명에서 재생과 되살림문명으로, 마트문명에서 생협문명으로 등을 구상하곤 한다. 그러나 문명의 전환은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어떻게 탄력적이고 신축적으로 운영하느냐의 문제이며, 매우 비물질적인 특징마저도 갖는 정동과 돌봄, 사랑 등의 가치명제도 들어가 있다. 전환사회는 ‘이것이다’라고 규정할 수는 없지만, 큰 조류와 흐름을 통해서 이를 조망할 수는 있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 이행의 구성요소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순환과 평형이다. 끊임없이 자원-부-에너지를 감축시킬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이다. 긴 주기 혹은 먼 거리의 물품이나 자원보다는 가까이에 있고 순환과 재생, 되살림 가능한 물품으로 향하는 방향성을 가지며, 더욱이 부조화와 비평형이 아니라, 평형과 우아함, 균형, 조화 등에 따라 설계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도 자원이 너무 결핍되어서도 혹은 너무 남아돌아서도 안 된다. 협동조합의 수입과 지출이 결산 때 제로 상태가 되도록 만드는 것도 평형이다. 성장 시대처럼 무리해서 과도한 자원을 끌어당기거나 새로운 사업에 착수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관계의 수준에서 가장 어울리는 순환과 평형의 방향에서 일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물론 평형은 미리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동, 사랑, 돌봄 등 여러 경우의 수가 개입되어 특이점들을 설립할 때 이 속에서 회복탄력성이 생기며, 평형 상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냥 놔두면 저절로 치유된다는 자연주의 발상이 생태주의가 아니듯, 순환과 평형이 미리 주어진 전제조건처럼 저절로 도달할 것이라는 발상은 기각된다.

또한 에너지의 방향성이 엔트로피(entropy)를 증가시켜 쓸모있는 것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드는 방향성에 대해서 끊임없이 회피할 수단을 갖추는 노력도 요구된다. 물론 네겐트로피(Negentropy)의 설정처럼 생명순환이 엔트로피를 감축시킬 것이라는 전망도 있지만, 그것이 아주 극대화된 수준이 아니라면 효과적인 대처법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문명의 전환은 저엔트로피라는 방향성 속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화석연료의 사용을 극도로 최소화하고 재생에너지의 사용을 극대화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엔트로피가 높은 화학제품에서 되살림이 가능하고 저엔트로피의 자연친화물품으로의 전환이 필요한 것도 분명하다. 활동의 영역에서도 기능 분화를 통해서 그 일을 해낼 때까지 엔트로피를 극단화하여 목표를 달성하기보다는 다기능적인 관계의 영역을 통해서 그 일을 저엔트로피의 상태에서 해낼 수 있도록 설계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에너지는 결과로서 드러난 에너지뿐만 아니라, 과정에 소요되는 에너지 – 에머지 – 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저엔트로피의 추구는 결국 비효율이어서 감축하고 줄이는 방향성이 아니라, 효율은 있지만 높이기 때문에 감축하고 줄이는 방향성으로 향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효율화의 나머지 상쇄부분을 다시 성장의 동력으로 삼았던 ‘제본스의 역설’을 철저히 기각하여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서 저엔트로피 사회의 방향성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적정규모는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2002, 문예출판사)에서의 적정기술, 중립기술에 대한 사유 속에서 싹 튼 체계이다. 거대한 판 위에서 기능 분화되어 작동하는 거대시스템은 필연적으로 센터의 역할을 강조한다. 이에 비해 모듈화되고 기능적으로 완결되어 있는 수많은 단위를 구축하여 적정규모에서 관리하고 조절한다면 자율성의 여지도 높아지고, 전체 시스템의 위기나 붕괴로부터 벗어날 여지가 생긴다. 더 적극적으로 적정규모는 사실상 실존적인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여지를 높이며, 관계를 실질화하고 그 관계 속에서의 여러 가지 일들이나 활동을 기획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자신의 근접 범위 밖에 있는 다양한 일들에 대해서 찾아가고 돌아가고 소식을 알리고 듣고 개입하는 과정은 사실상 지금-여기-가까이의 범주를 벗어난 셈이 된다. 저성장시대에는 느슨한 네트워크로서의 전체시스템은 유지하되 가장 국지적인 영역에서 벌어지는 강한 상호작용의 과정을 극대화하고 이를 통해 적정규모를 지속가능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초극미세전락으로서의 모듈과 컨비비움 전략조차도 요구된다.

속도제어와 제한의 영역은, 자원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속도로 자원을 끌어들이려는 성장주의적 발상의 무망함을 의미한다. 현실에서는 자원이 분명히 제한되어 있고, 더욱이 감축은 앞으로 더 심화될 것이다. 기능 분화된 영역의 속도를 더 높이는 것이 아니라, 느림과 여백을 통해서 관계가 드러나고 그 관계가 살아서 발언하고 교감하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여지를 주어야 한다. 기능적인 일들을 아무리 더 열심히 속도를 낸다고 하더라도 공동체적인 관계망을 더 성숙시키는 데는 효과가 거의 없을 수도 있다. 오히려 관계 속에서의 속도는 사랑과 정동의 무한 속도밖에 없다. 관계 속에서 자신의 배치를 벗어나 더 심원한 정동과 사랑의 능력을 발휘하는 속도가 진정으로 빠른 속도라는 얘기다. 다른 부분에서의 기능적이고 자동적인 속도를 되도록 감축하거나 제어하면서 관계에서의 사랑과 정동을 중시하는 것이 자원의 제한 상태에서 협동운동이 취할 전략일 수 있다. 우리는 성장주의, 근대화, 효율성과 속도사회, 모빌리티의 사회 등을 거치면서 우리 내부에 있는 무시무시한 속도를 제어할 방법을 아직 모르고 있다. 한뎃잠을 자고 일어나듯 우리는 관계가 갖는 풍요와 충만, 다양성에 대해서 눈떠야만 결국 문명의 전환이라는 가능성의 영역이 열릴 것이다.

3. 자율주의 : 자동적이고 기능적인 것에서 공동체의 자율적인 통제의 영역으로

성장주의 시대가 갖고 있는 목적합리성의 구도에 따르면, 과정은 기능주의와 자동주의가 알아서 해주고 목표설정이나 의제선정 등을 관료제 지층에서 하면 된다는 식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저성장시대는 목적이나 결과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에 대한 심원한 변화를 초래하는 색다른 지평을 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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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주의 시대가 갖고 있는 목적합리성의 구도에 따르면, 과정은 기능주의와 자동주의가 알아서 해주고 목표설정이나 의제선정 등을 관료제 지층에서 하면 된다는 식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저성장시대는 목적이나 결과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에 대한 심원한 변화를 초래하는 색다른 지평을 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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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의 일이 대부분 배치와 관계망의 결정에 따르지만, 실제로 작동하는 양상은 기능적이고 자동적인 일들도 상당히 많다. 자동적이고 기능적인 일들이 배치의 일부가 되면, 그것으로 일을 해결하려는 작동양상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에 따라 마치 사회와 커뮤니티는 미리 주어져 있고, 이에 대해서 기능적인 일이 결합되면 자동적으로 일이 완수될 것이라는 착각과 환시가 만들어진다. 사업체와 결사체의 결합의 양상이 대부분 이러한 형태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점은 무엇을 의미할까? 즉, 현존 문명이 갖고 있는 관료제지층과 유사한 ‘기능주의=자동주의=관료주의’가 설립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조직 내 민주주의를 관료주의의 문제로 번역하는 것에 있다. 현존 민주주의의 양상이 고도로 발전되고 있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관료제지층은 이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기능적인 해결책들에 호소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자동주의와 기능주의가 가진 결정적인 문제는, 관계망과 배치가 갖고 있는 자율적인 힘과 역량이 약화된다는 점에 있다. 자율성은 일이 수행되는 과정 전반과 관련한다. 그저 자율성이 체계와 시스템에서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에 있다는 환상은 사실상 운동성의 순수주의에 매몰된 자율성에 대한 독해일 뿐이다. 일이 진행되는 과정 전반에 대해서 관리와 통제권을 행사하는 배치와 관계망이 있다는 것은 상당히 껄끄러울 수 있다. 그러나 배치와 관계망을 읽지 않고 자동적이고 기능적으로 쉽게 해내는 일들은 사실은 협동조합이 해내야 할 일들의 의미와 가치로부터 벗어나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일이 수행되고 착수되고 진행되는 과정에 대해서 배치와 관계망들은 무의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 활동가들의 염두에 들어가 있어야 하며, 또한 구체적으로도 관리하고 제어하는 과정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이러한 자율성에 대한 사유가 자연발생성에 관련된 자율성의 논의와는 차원을 달리 하는 것도 사실이다.

협동조합이 갖고 있는 자원-부-에너지 등은 공통재(Commons)로서의 의미를 가지며, 공통재는 늘 관리규칙과 자치규약의 세분화를 필요로 한다. 미세한 공동체적 배치의 규칙이 있었을 때라야 그저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이나 자동주의와 기능주의에 따라 일을 해내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1세대 자율주의 맥락 즉 자연주의 맥락에서는 이러한 규약의 세분화가 상당히 부자연스럽게 껄끄럽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관계망 자체는 제도와 동의어이다. 이를 테면 제도와 규칙이 없는 공동체가 가족이나 혈연, 연고, 지연 등과 차이를 갖지 못한다는 점에서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규칙은 과정에 대해서 개입하고 관리하고 통제하려는 관계망와 배치의 구체적인 힘의 장을 의미한다. 결국 협동조합의 활동가들은 관계망과 배치를 읽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할 것이며, 이를 공동의 규칙으로 만들어냄으로써 그저 자유로운 판단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제도로 만들어내는 것이 협동조합의 여러 결사체적 질서가 갖고 있는 역할일 수 있다.

저성장시대는 목적이나 결과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에 대한 심원한 변화를 초래하는 색다른 지평이라고 할 수 있다. 성장주의 시대가 갖고 있는 목적합리성의 구도에 따르면, 과정은 기능주의와 자동주의가 알아서 해주고 목표설정이나 의제선정 등을 관료제지층에서 하면 된다는 식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성장주의 때의 그러한 발상은 근대성의 표징으로 협동조합의 배치와 관계망에도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저성장시대는 그 일이 완수되었고, 완수를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목적합리성의 방향성이 아니라, 과정 자체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그것에 협동조합의 배치와 관계망이 어떻게 개입하고 통제하면서 자율적인 힘을 발휘했는지의 여부가 더 중요해진다. 아무리 결과물이 그럴 듯해도 그 일이 온전히 협동조합의 역량 강화로 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순간적인 이벤트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정형과 진행형에 개입하는 협동조합의 배치와 관계망의 자율성 강화만이 가장 중요한 과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왜(Why) 그 일을 했는지 보다 어떻게(How) 그 일을 해냈는지를 기준으로 협동조합의 자율성이 확대되는지의 여부를 가늠해 보아야 할 시점에 놓여 있다.

4. 활력사회의 전망 : 외부 에너지의 한계는 더 많은 활동을 요구한다.

저성장시대를 맞이하면서 협동조합은 외부에서 주어진 자원-부-에너지의 축소를 경험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자원의 축소에 의한 더 쪼그라드는 주체성의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활력으로서의 사랑, 정동, 욕망, 돌봄이 더욱 폭발적으로 출현하는 양상으로 협동조합이 재편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외부에서 주어진 에너지가 없다는 것은 결국 자원을 통해 자동적으로 해결할 부분이 거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부의 자원보다는 오히려 내부적으로 챙기고 아끼고 정돈하고 닦고 수리하고 배치하는 정동을 발생시키는 활력이 더욱 요구됨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외부 에너지의 한계는 신체 내 에너지의 폭발적인 힘에 따라 보완되고 대체되어야 하는 것이다. 정동의 폭발과 촉발의 양상은 새로운 활력의 원천을 우리 자신 내부에서 찾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시대는 정동의 시대이다. 협동조합이 취해야 할 전략도 여기에 기반할 수밖에 없다. 정동은 욕망이라고도 불려 왔지만, 사실은 돌봄, 살림, 보살핌, 모심, 섬김, 살림의 활력이기도 하다. 활력의 소진을 경험하고 있는 활동가들의 상황은 오히려 기능적이고 자동적으로 주어진 외부에서의 에너지에 기반했던 기존 활동양상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일들과 과업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오히려 활력은 관계로부터 나온다. 사물, 생명, 인간, 자연 등의 문제설정들을 매끄럽게 연결할 때 바로 활력과 에너지가 나온다. 동시에 차이나는 반복에 따라 새롭게 변화를 만들어내고 세계를 재창조할 때 활력과 에너지가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활력으로서의 욕망의 미시정치가 더욱 중요하다. 협동조합의 일이 고정되고 기능적이고 자동적인 성장주의 시대의 방식으로 수렴될 때, 끊임없이 배치를 재배치하면서 차이나는 반복의 양상으로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활력의 원천에 대한 탐색은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지만, 저성장시대처럼 자원-부-에너지가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의 활력에 대한 탐색은 아직 단상이나 스케치 정도로 비추어질 뿐이다. 활력의 원천은 강건한 반복 그것도 차이를 일으키는 반복에 달려 있다. 내가 어제 커피가 맛있어서 커피를 먹고 싶은 욕망이 생기면 커피를 먹는 것을 오늘 반복하게 되고, 그 때 활력이 생성된다. 그리고 내일 커피를 먹을 것을 욕망하면서 가슴이 설렌다. 그러한 구도가 정동의 작동양상이기도 하다. 물론 돌봄의 경우에 그것이 해당사항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돌봄 역시도 어제의 돌봄과 오늘의 돌봄과 내일의 돌봄의 차이 속에서의 자존감의 상승과 미세한 기쁨과 사랑의 부드러움 등의 활력이 존재한다. 그러나 문제는 정동, 돌봄, 욕망, 사랑과 같은 차이나는 반복의 양상과 달리, 기능주의와 자동주의에 기반한 일들은 대부분은 동일성의 반복, 반복강박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활력은 관계로부터 나온다. 사물, 생명, 인간, 자연 등의 문제설정들을 매끄럽게 연결할 때 바로 활력과 에너지가 나온다. by Federico Beccari 출처 : https://unsplash.com/photos/ahi73ZN5P0Y
활력은 관계로부터 나온다. 사물, 생명, 인간, 자연 등의 문제설정들을 매끄럽게 연결할 때 바로 활력과 에너지가 나온다.
사진 출처 : Federico Beccari

결국 활력의 재창조, 세계의 재창조의 질문은 “네가 원하는 게 뭐냐?”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따라 발생하는 정동, 사랑, 욕망의 흐름에 달려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러한 질문들은 하나의 대답으로서의 기능, 직분, 역할이 아니라, 여러 가지 문제제기로서의 정동, 욕망, 사랑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과 정동의 강렬한 흐름이 협동조합을 감싸고 움직이게 한다면, 그것은 협동조합의 활력과 생명에너지일 수 있다. 물론 욕망과 정동의 문제제기는 우리를 미지의 곳으로 이끈다. 끊임없이 흐르고 도주하고 탐험하고 새로운 항로를 개척한다. 그리고 질문에 대한 대답은 늘 다른 곳에 발생한다. 입구와 출구는 분열되어 있고, 새로운 출구전략으로 향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질문과 대답이 인과론적으로 아귀가 딱 맞아떨어진다는 설정으로부터 벗어나 질문에 대한 전혀 다른 방향에서의 대답을 도출하고자 할 때 바로 엄청난 활력이 발생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정동의 출구전략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저성장시대의 협동조합의 전략적 지도제작은 바로 정동과 욕망의 입구와 출구의 분열 속에서의 힘, 즉 양자류나 분열생성의 역량과도 같은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자원은 곧 활력이라는 입구와 출구가 딱 맞아떨어지고 이에 따라 기능과 역할을 부여하는 배치라면 활력은 점점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활력을 만들어내는 정동의 출구전략을 추구한다면, 전혀 다른 곳에서의 활로를 찾아서 정동과 욕망의 흐름이 이끄는 탈주선을 따라가면서 끊임없이 전혀 다른 배치의 재배치의 과정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다!”라고 대답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의 몸, 생명, 자연, 사물, 기계에 내재한 활력에 주목할 때, 우리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활력을 찾을 수 있다. 저성장시대는 정동의 폭발, 활력의 폭발의 시대가 될 것이다. 결국 모두가 활동가인 시대가 찾아왔다는 점을 의미한다. 우리는 더욱 바빠질 것이다. 그것도 사랑, 정동, 욕망, 돌봄으로 바빠질 것이다.

5. 잉여에 대한 관리 : 과잉에너지에 대한 순환사회의 관리법을 따르자!

마르셀 모스에 다가가는 두 가지 노선이 있다. 하나는 폴라니와 신이치, 고진으로 향하는 증여와 호혜의 노선이고, 다른 하나는 바타유와 보들리야르로 향하는 소비와 방탕의 노선이다. 여기서 바타유의 데팡스(dépense) 즉, 과잉에너지에 대한 과시소비와 방탕의 명제 대한 탐색을 하려고 한다. 공동체는 파티와 난장, 축제가 늘 뒤따른다. 자신의 과잉된 에너지를 완전히 단 번에 소모하려는 이벤트가 그것이다. 일종의 공동체에서의 사건으로서의 축제, 파티, 행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의 문제가 그것이다. 이를 테면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엄청난 에너지를 발휘하고 폭발시킬 때 사람들은 살맛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저성장시대의 정동과 욕망의 미시정치에도 이러한 과잉에너지 국면에 대한 고려가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몸이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 잘 모르고 있다. 얼마나 엄청난 에너지로 노래 부르고 춤추고 밤새 이야기하면서 잠자지 않을 수 있는지에 대한 최대치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스테레오타입의 삶이 정착된 현재의 삶의 양상에서, 이러한 과잉에너지의 폭발의 장이 협동조합이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깨닫고 있지 못하다. 그저 평면적으로 순탄하고 편편하게 틀 지워진 삶의 유형을 살아갈 뿐이고, 똑딱거리는 일상의 외부를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술이나 거하게 먹고 밤새 얘기했다는 정도에서 이 과잉에너지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다. 그러나 공동체의 배치와 관계망 자체가 과잉에너지를 폭발시킨다면, 어떤 효과를 갖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짐작하지 못한다. 그런데 고대로부터 유래된 순환사회의 전통은 이러한 과잉에너지의 미시정치에 대해서 종교나 신성, 영성과 같은 것에 따라 좀 더 그 힘을 영적으로 상승시키는 방향으로 향했음에 분명하다. 즉, 신체에너지의 폭발적인 힘을 보다 고양시키고 상승시켜서 위대하고 거룩하고 영성적인 방향으로 향하게 한 것이다. 사실 순환사회의 전통은 과잉에너지에 대한 미시정치를 실물적인 영역에서는 과도한 자원과 부의 소모와 소진이 아닌 마을 어귀의 사당이나 절 등에서 주관하는 신성한 행사로 만들었기 때문에, 정화되고 우아하고 정갈한 힘으로 만들어냈다. 밤새 웃고 떠들고 놀고 이야기하지만, 그 고양된 마음속에서는 바타유가 사유한 방탕과 과시가 들어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저성장시대에 협동조합은 더 침잠하고 퇴락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가면 뭔가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는 배치여야 한다. 자신의 과잉에너지가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자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어야 하며, 수많은 이야기와 뒷담화와 정감과 애정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자리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 정동, 욕망의 미시정치에 있어서 어떻게 사람들의 과잉에너지를 폭발시킬 장으로서 협동조합이 위치 지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판짜기가 있어야 한다. 똑딱거리듯 집에서 협동조합으로 오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집중적이고 폭발적인 에너지로 한판 난장을 만들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그것이 근대적인 집회와 같은 것일 수도 있지만, 더 나아가 영성이나 가치, 음식과 노래, 춤 등 여러 영역을 오가며 횡단할 수 있는 색다른 자리여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서 협동조합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이에 참여하면 살맛난다는 느낌을 주어야 할 것이다. 바로 과잉에너지의 미시정치가 해낼 수 있는 영역이 여기에 해당한다.

저성장시대는 자원-부-에너지가 외부로부터 주어지지 않는 국면이면서도, 신체, 생명, 자연의 과잉에너지를 어떻게 폭발시킬 것인가에 대한 미시정치를 요구하는 국면이기도 하다. 사업체가 잘 나가고 성공해서 축제가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배치와 판이 갖고 있는 강도, 밀도, 속도, 온도에 따라서 축제가 벌어지는 자리여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공동체의 정동과 욕망의 순환과정에서 늘 협동조합은 출구전략을 추구해야 한다. 탈주로를 뚫고 살맛나고 재미있는 일들이 거기서 생긴다는 점에 대해서 느낄 수 있는 배치와 관계망을 설립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저성장시대 정동의 출구전략의 일부인 것이다.

이 글은 〈2019 한살림 생명협동연구 프로젝트〉의 결과물입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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