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의 마주보기] ⑧ 남겨진 사람들

새미(솔빈)는 숲정이의 딸이다. 숲정이는 새미의 엄마이다. 엄마는 딸이 살아가는 세상을 자연답게 가꾸기 위해 시민운동을 하였다. 정성스럽게 ‘선과 정의’를 지키려 노력하지만 좌절과 허탈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의지를 잃은 엄마가 그동안의 경험과 생각들을 딸에게 이야기한다. 숲정이와 새미의 딸이자 언니인 백진솔(파랑새)은 6월 19일 부산 백산초 스쿨존 횡단보도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 이후 함께 지난 삶을 바라본다.

살아갈 자신도, 끝낼 이유도

아이야! 견디지 말거라. 실핏줄을 잃은 나의 아이야. 견디지 말거라. 쇠별꽃 갈라진 꽃잎인냥 깨물어 깨어진 입술을 한 별꽃색 아이야! 우두두둑 맑은 오줌물을 순간 쏟아내는 너는 토란 잎 위 구르는 아침 이슬이더냐. 오이풀 향을 잃어버린 나의 아이야! 알콜솜 향이 애처로운 나의 아이야. 철사줄에 감긴 소사나무 줄기가 된 네 팔의 뻣뻣한 꺾임은 놀란 그 시간의 징표이더냐. 말랑한 네 머리는 차가운 겨울을 거역하지 않는 홍시가 된 네 심장이구나. 아이야! 견디지 말거라. 흰구름 둥둥이는 가을 하늘은 이내 흩어지고 꼭 사라진단다. 애틋한 사랑은 너와 나 사이에 꽉 차 비집을 틈도 없나니. 아이야! 견디지 말거라. 쇠별꽃 내 아이야. 아침 이슬 내 아이야. 너의 비틀어지는 고통. 너의 울컥거리는 슬픔. 견디지 말거라 !내 아이야.

나무가 된 파랑새에게 가는 길, 탄천을 걷다가 만난 나무. 사진제공 : 솔빈

단단하고 안전한 동그라미 안으로 파랑새의 뇌를 감싸고 싶었지만 실패 하였다. 낭자한 세상의 고통을 이미 알고 있지만 내게 닥친 이 아픔에 어미는 정신줄을 잃어 버렸단다. 내 딸 새미야 미안하구나. 새미1를 어미품으로 포근히 위로도 못해주고 사방팔방으로 찢어지는 어미 가슴을 가다듬을 수가 없구나. 네 아픔의 크기가 결코 작지 않는데, 어미가 네게 위로가 되지 못하는구나. 애처로운 나의 새미야. 애달픈 나의 파랑새2야.

백산초 스쿨존, 떼어간 신호등을 붙이고 신호등을 켜주세요. 동무들의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수 차례 넣고 백산초를 빙둘러 현수막으로 포위를 해도 행정은 끄떡도 없구나. 대한민국이 우리의 파랑새를 질겅질겅 씹어 삼키고 있구나. 민주주의란 환상을 주민여론조사로 포장하면서 자본주의의 본성을 광속으로 구축시키는구나. 생명을 무시하는 대한 민주 자본주의의 제도적 뻔뻔함에 어미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의지를 잃게 하는구나. 휘두르는 폭력에 저항이 의미가 있을까?

어미 일생에서 일관성 있는 꾸준한 행동에 대한 확신, 방향에 대한 신념이 옅어진 적이 없었단다. 그러나, 어미의 가치가 요즘은 참 한심해 보인단다. 오만가지 상념이 들고, 사유 한단다. 엄마의 굳센 마음과 집중된 열정에 대해 후회는 없단다. 온갖 상처들이 흉터가 덕지덕지 하지만 그래도 순조로운 타협보다는 엄마는 양심이 떳떳하단다. 다만, 너희들이 보다 힘겹게 세상을 만날 수밖에 없는 전제조건이 엄마가 아니었을까 그런 미련을 떨쳐 버릴 수가 없구나. 파랑새와 새미가 만나고 있는 지금을 어미가 되어서 견디어 낼 힘이 없구나.

어미는 ‘탈핵 운동가가 아니다. 어미는 환경 활동가가 아니다.’라고 여러 번 반복해서 사람들에게 밝혔다. 단순하게 자연을 사랑하고 내 딸들을 사랑하는 엄마란다. 사랑은 책임이란다. 사랑하는 나무들과 날아다니는 새들의 아픔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니? 사랑하는 딸들이 살아갈 지구별을 소비만 할 수 있겠니? 사랑을 내 입장에서 즐기기만 한다면 어떻게 그것이 사랑이라 할 수 있겠니? 사랑하는 강과 숲들이 안전한 세상, 사랑하는 딸들이 살아갈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엄마는 성실하게 사랑을 실천 했단다. 지금의 이 고통이 어미의 사랑에 대한 형벌일까?

후쿠시마 핵 오염수 해양투기 반대 4차 범국민대회. 소리는 있었지만 사람이 없다. 사진제공 : 솔빈

그래도 ‘후회 없는 삶이다’ 결심하며 후쿠시마 핵 오염수 해양투기 반대 4차 범국민대회에 참석했었단다. 소리는 있었지만 사람이 없더구나. 좀 의아했지. 뭐지? 범국민대회인데? 최소 대한민국 절반은 들썩이면서 맹렬하게 물어뜯어야 될 건데. 뭐지?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 몇몇과 띄엄띄엄 앉은 사람 몇몇. 행사장 배경으로 인증 사진 찍는 무더기 몇몇. 헐렁한 분위기에 엄마는 충격을 받았단다. ‘우리는 지금 보다 더 강하게’ 노랫말이 씁쓸했단다. 우리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보다 더 강할까? ‘빨갱이는 물러가라’에 밀리는 이 분위기는 뭐지? 데모인생 좌절이 오더구나. 광화문 오기 전, 나무가 된 파랑새에게 가는 길, 탄천을 걸을 때, 기후위기 행사를 만났었단다. 엄마가 진행했던 행사들을 떠올렸단다. 이벤트 같은 들뜬 분위기가 생동감이 있더구나. 생로병사의 한가운데 있는 까닭일까? 절실함이 결여된 마트 세일 행사 같았단다. 뭐, 그러면 어때. 대중과 일반성으로 기후위기를 함께 인식하는 흥겨움이 뭐 어때서? 속 좁은 엄마가 여유가 부족하구나 생각했단다. 핵 오염수 해양투기 반대를 주장하는 종교계와 시민들의 목소리가 있었단다.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꼭 밝히고 선동이 있었단다. 핵오염수 해양투기 범국민대회가 느슨한 이유가 다른 목적 집회들이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란 사실을 알았단다. 교권을 위해서, 현정부 탄핵 등을 위해 갈래가 찢어져 있더구나. 엄마는 왜? 핵오염수의 절실함이 꼴찌 정도일까? 가슴이 아리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현재 보여지는 것이 사실 아니겠니? 세월호를 기억하며 박근혜 정부를 탄핵했던 시민들의 하나로 드높았던 민주의식은 제대로 보상을 확인하지 못했잖니. 세월호가 진상규명 되었니? 박근혜 정부보다 더 정의로운 대한민국이 담보 되었니? 하나로 묶일 수가 없지. 명랑쾌활한 광고판만이 절대 강자로 팽팽 돌아가더구나. 갈래갈래 주장들과 만족들이 활발한 지구는 폭망하지 않을 것 같더구나.

여름도 없고 가을도 없는 엄마의 갇힌 시간 속에서 편견에 찬 엄마를 보았단다. 파랑새를 물컹하게 눕혀 놓고 앉은 혼술 자리 옆. 교감선생님들의 이야기를 엿듣게 되었단다. 속초 땅 투기 실패는 전 정부 탓이고 정선 땅을 지금 살까 말까 고민하고, 법무부장관에 대한 칭송이 대단했단다. 5만의 교사들을 비하하고 ‘철도청 데모 새끼들’을 개무시 하더구나. 엄마는 깊이 반성했다. 나는 다름에 대해 너무나 안일 했더구나. 엄마는 차별에 대해 무식했구나. 편견과 냉소는 사회를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나의 협소함이더구나. 허탈하였단다.

대한 사회는 스쿨존 꺼져 있는 신호등 횡단보도 한가운데에서 생명을 잃어 가지만, 달리는 차를 존중한다는 주민여론과 상냥한 행정을 가졌더구나. 외부 압력에 대한 부당함에 떨쳐 일어나 똘똘 뭉쳐서 커지는 교권에 대해 확실한 요구를 하더구나. 당사자의 책임과 품위가 담보 되었을 때, 주장은 설득력이 있단다. 공감이 더욱 커진단다. 엄마는 학부모와 교권 사이의 갈등이 정의롭게 해결되기를 당연히 지지한단다. 또한 우리가 그렇게 관철시키고 싶었던 교권 내에서 비민주적인 노동환경에 대해서도 자발적 성찰이 있기를 기대했단다. 교권에 대한 주장은 당연하게 교권 내에서의 평등한 인권의 문제 아니겠니? 존엄한 인권은 관리교사, 평교사, 비교과교사, 학생, 학부모까지 동등하게 가치로운 당위성이란다. 왜? 아름다운 본질을 외면하면서 동료의 죽음을 자칫 수단화하는 듯한 추악한 집단 이기주의적 행동의 오해를 여지로 남기는 걸까? 파랑새의 일기장 곳곳 신입교사의 힘겨움, 비교과교사의 차별은 교권에서 배제되어야 할 관심사일까? 오래전에 대한민국을 제대로 소외시키는 일상을 적극적으로 선택하지 않은 엄마가 아쉽구나. (엄마는 이민을 희망했었다.) 대한민국을 버리고 싶다.

살아갈 자신이 없단다. 그렇다고 끝낼 이유도 없구나. 끝내지 않을 이유는 있더구나. 여름 뒤에 가을이 스며들 듯 그렇게 밀리며 살아가겠지. 9월 23일 기후행진을 하였단다. 삶의 질을 주장하지 못하고 생명의 생존을 요구해야 하는 현실을 확인했단다. 변함없는 마음으로 생명의 평온한 생존을 주장하고 행동한 엄마로서 슬픔만 가득하단다. 사랑하는 자연을 지키기 위해 엄마 스스로 충분히 고통스러웠다고 생각했거든. 이제는 사랑하는 자연과 즐겁게 살아야 엄마 삶이 공평해진다고 믿었거든. 그래서 엄마는 지리산을 헤매며 감탄했고 제주 곶자왈과 바당3을 즐기기도 했단다. 그러나, 온전히 즐길 수도 없는 현실을 만나 외면하지 못해 받아들이는 데모 일상을 제주에서 선택했고 그랬지만, 결국 파랑새를 잃어가는구나. 대한민국이 파랑새를 잡아먹고 있구나. 내 아이를 씹어 삼키고 있구나.

언제나 기다린 당신

불쌍한 사람. 당신은 언니만을 바라보고 있지만, 나는 내 엄마를 바라본다. 초등학교 시절, 어느 날 저녁이 생각나. 숲정이 씨가 우리들을 위한 저녁을 차려 놓고, 봉림 일반 산업단지를 막으러 나갈 채비를 마쳤을 때였지. 언니랑 남겨진 나는 네게 물었다. “왜 우리 두고 나가는 거야? 왜 맨날 데모 하러 가? 그게 우리보다 더 중요한 일이야?” 당신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지. 너희들을 위해서 하는 거라고. 너희들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을 조금 더 괜찮게 만들기 위해 데모하는 거라고. 나는 그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어. 당신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으니까.

나에겐 당신이 바로 핵 오염수가 퍼부어진 바다, 새만금 수라 갯벌, 녹조 낀 낙동강, 사라지는 가을이다. 사진제공 : 솔빈

남겨진 언니와 나는 나무 벽지가 발려진 방에서 뒹굴거렸지. 커다란 푸딩에 풍덩 빠져서 헤엄치는 상상을 하며 조잘댔어. ‘날씨가 이상해’란 자작곡을 만들어 언니한테 어떠냐고 물으며 깔깔댔지. 어떨 땐 크게 한바탕 싸우기도 했어. 언니한테 맞은 부위에 케첩을 묻혀, 피인 척 우기기도 했어. 엄마가 나갔을 때, 언니는 특히 다소곳이 앉아 책을 주로 읽었지. 언니는 나이 보다 어려운 책들을 주로 읽었잖아. 나는 언니를 따라하려 자리에 앉았지만, 어려운 책은 절대 안 읽었어. 무조건 글자가 크고 그림이 많은 책들만 읽었거든. 엄마를 세상에 내어준 시간에 우리는 나름 재밌었어. 재밌었지만 언제나 당신을 기다렸어. 맞아. 기다렸던 것 같아.

당신이 더 나은 세상을 기다렸던 시간에, 우리도 함께 기다렸어. 어느 순간부턴 그 기다림이 당연해졌지. 언니도, 나도 당신을 당연히 기다리는 시간이 참 자랑스러웠어.

세상이 당신한테 돌려준 건 왜 이따위일까. 세상은 ‘자식에게 더 나은 삶을 주기 위해 평생 투쟁한 사람’의 자식을 오히려 빼앗아 갔지. 숲정이 씨가 요즘 느끼는 허탈함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이유야. 나에겐 당신이 바로 핵 오염수가 퍼부어진 바다, 새만금 수라 갯벌, 녹조 낀 낙동강, 사라지는 가을이다. 그런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 나는 뭘 해야 할까. 막막하기만 하다.

엄마야. 아무것도 할 수 없겠지만, 하나만 해 주면 안돼? 세상을 의심하되, 엄마의 삶을 의심하지 마라. 엄마 삶을 의심하면 언니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온갖 것들이 흔들린단 말이야. 그러면 언니를 빼앗아간 세상을 받아들여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그냥 엄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엄마 삶을 의심하든, 후회하든. 나는 엄마 삶을 믿는다. 딸은 엄마가 옳다는 걸 믿는다. 엄마가 우리를 사랑한 방식이 자랑스럽다.


  1. 솔빈의 별명. 행복의 샘

  2. 숲정이의 첫째 딸이자 솔빈의 언니 진솔의 별명. 행복을 가져다 주는 파랑새.

  3. 바다의 제주어.

숲정이

우리 동네를 낮게 아우르는 숲

솔빈

그 순간, 녹색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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