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의 마주보기] ⑩ 이상한 사회를 바꾸는 이상한 이상주의자

새미(솔빈)는 숲정이의 딸이다. 숲정이는 새미의 엄마이다. 엄마는 딸이 살아가는 세상을 자연답게 가꾸기 위해 시민운동을 하였다. 정성스럽게 ‘선과 정의’를 지키려 노력하지만 좌절과 허탈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의지를 잃은 엄마가 그동안의 경험과 생각들을 딸에게 이야기한다. 숲정이와 새미의 딸이자 언니인 백진솔(파랑새)은 6월 19일 부산 백산초 스쿨존 횡단보도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의지를 잃어버린 숲정이와 새미는 지친 서로를 바라본다.

이상한 이상주의자

새미1야! 엄마 딸. 언니 파랑새2를 잃어가는 내 딸아! 엄마의 갱년기를 이겨 먹던 너의 길고 차가운 사춘기는 어디로 갔니? 엄마에게 위안이 되길 안간힘으로 위장하는 네 앞에 엄마는 버티지도 못하고 무너지는구나. 엄마가 너의 의지가 되어 줘야 하는데, 오히려 네 가슴에 안겨 숨을 쉬는구나. 미안하다. 네가 오늘 엄마에게 선물한 젊은 팝업 스토어, 계수나무 단풍잎, 억새 일몰, 그리고 영화까지 잠시라도 세상으로 엄마를 끌어내려는 갸륵한 마음. 너무 고맙다. 번지는 네 눈물들을 엄마는 바라만 보고 있구나. 쉽게 내뱉는 충고들과 쉽게 던지는 위로들에 상처를 숨겨야만 하는 네 힘겨움에 엄마는 속상하구나. 파랑새와 새미 그리고 엄마, 아빠는 세상 곳곳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세상의 정의를 환상하지 않지. 우리만의 고통이라고 특별히 내세우는 마음도 없지.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고통으로 고통은 고통이고 슬프지. 우리는 우리가 품고 지키고자 하는 가치를 잘 알며 평범하게 생활하는 그냥 가족이잖니. 서로를 너무 사랑하고 존중하는 우리들이라 아름다운 파랑새를 애끓이며 후회 없이 애정을 퍼붓고 있을 뿐이잖니. 대단하고 훌륭한 세상이 사람의 입으로 몸짓으로 손쉽게 공감하는 척하며 우리를 더더욱 지치게 하는구나. 엄마아빠야 어떨 땐 웃을 수도 있고 ‘네. 네. 고맙습니다.’ 할 수도 있지만 너는? 사랑도 공감도 자기가 중심이면 폭력일 뿐이라는 간단한 사실을, 사람은 동물이라 세상은 종말이라 무지하고 무식한 모양이다. 너를 잃지 말며 너를 지독히 사랑하기를 바란다. 사람의 시선 따위 부수어 버리고, 세상의 주변머리를 치워 버리고 너는 자유롭거라. 순종과 편견에 길들여지지 말거라. 예절이란 것이 기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관습일 수 있단다. 예의 바른 사람 하지 말거라. 착한 기준도 복종을 길들이는 도구일 수 있단다. 선한 사람 하지 말거라. 관계에 얽매이지 말거라. 어떤 네 모습이더라도 엄마 아빠는 절대적으로 너를 지지한단다. 새미야! 자유롭거라.

무생물인 사회제도보다는 생물인 사람의 성찰을 아름다운 세상살이의 기준으로 삼고 싶다. 사진 출처 : Rebecca Swafford

엄마의 새미는 청년이 되면서 점점 더 자본주의의 횡포에 분노하더구나. 제도의 한계와 정의롭지 못한 법의 개선을 주장하더군. 네가 성질내며 “엄마, 제도적으로 사회가 약자의 권리를 강제적으로 보장해야 해. 여성, 장애인뿐만 아니라 성소수자, 비정규직, 청년도. 제도적으로 권리와 자유를 보장해야 된다니까. 엄마, 그러니까 말이야…” 너의 그런 모습이 엄마는 귀엽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고 뿌듯했었지. 사실 마음속으로 풋 웃기도 한단다. 맞아. 그렇지. 엄마도 충분히 동의한단다. 엄마는 정의로운 사회 실현을 위해 제도적 개선이 효율적이고 합리적이란 정답을 너와 공감하며 확신한단다. 정의의 기준인 법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 이면의 사회현실에 화가 나기도 하지. 그러나 새미야. 엄마는 사회제도만으로 따뜻한 사회를 만들 수는 없다고 판단한단다. 사회를 신뢰할 수 없는 이유도 있지만 엄마는 개인의 성찰을 더욱 중요한 가치로 생각한단다. 사회구성원인 개인의 정의와 실천이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단다. 선한 개인은 저절로 정의롭고, 따뜻한 행동은 당연히 사회적 실천으로 표현되지. 제도가 복잡하게 강제하지 않아도 선하고 따뜻한 개인이 사회 곳곳 가득하다면 수월하게 사회가 정의롭고 우애롭지 않겠니? 엄마도 청춘 시절, “어떻게 살 것인가?” 너만큼 심란하게 고심했단다. 엄마는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 개인, 자기 역할에 성실한 사회구성원이 되는 길을 선택했단다. 엄마 젊음의 한편이었던 야학생활에서 얻은 엄마의 해답이라고나 할까. 다음 기회에 더 깊게 이야기 나누기로 하고. 하여튼, 엄마는 무생물인 사회제도보다는 생물인 사람의 성찰을 아름다운 세상살이의 기준으로 삼고 있단다.

지난해 11월, 엄마 생일 즈음, 봉림일반산업단지 예정지였던 무척산 자락을 다녀왔었지. 물론 네가 동행해주어 무척 신났단다. 김해는 가야의 고도(古都)로서 문화와 역사를 자랑하는 인구 50만이 넘는 큰 도시란다. 김해평야로 일찍 알려져 있지만 도농복합 도시라는 구색을 잃은 지 오래란다. 도심 외곽 골골 공장들이 무질서하게 빽빽하지. 난개발 교과서 같은 곳이 김해 아닐까. 일반산업단지란 국토교통부의 ‘산업 입지 및 개발에 관한 법률’에 따라 산업의 적정한 지방 분산을 촉진하고 지역 경제에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해 시, 도지사 또는 대통령령으로 지정하는 산업단지란다. 봉림일반산업단지는 김해시 생림면 봉림리 무척산 자락 16만 5000㎡ 규모로써 2011년 5월 반려된 지역이었으나 2013년 4월 다시 추진됐단다. 그래서 엄마는 2013년부터 적극적으로 주민들과 함께 반대운동을 했단다. 엄마는 환경운동이 거창하고 대단한 단체의 운동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단다. 나 자신, 내 이웃과 작은 공동체로 움직이는 실천력이야말로 진짜라고 판단했지. 그래서 어린이 생태 놀이 동아리로 아이들과 자연에서 만나길 오래 했고, 우리 동네 이웃사촌들의 환경모임 ‘숲정이’를 통해서 지역 환경문제를 실천할 수 있는 일관성을 추구하고 있었단다.

그러던 중 무척산 허리를 잘라 일반산업단지를 계획한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지. 특히 이곳 입주업체가 화학물질, 고무제품 등을 다뤘기에 환경 파괴 가능성이 높은 공장들이었단다. 설상가상 봉림일반산업단지 예정지 아래로는 생림초등학교가 위치해 아이들의 환경권과 교육권을 직접적으로 위협하기도 했지. 당시 김해시는 ‘김해시 도시계획조례’에 의해 경사도 11도 이상엔 개별공장을 들일 수가 없었지. 하지만, 이미 두리화학 등 개별공장이 2곳 있었고, 그 과정에서 김해시의 수상한 특혜 의혹을 의심 받고 있는 실정이었지. 산업단지는 김해시 조례보다 상위법이 적용되어 11도 이상이더라도 공장들이 들어설 수 있다는 거야. 당시 김해시는 텅텅 빈 일반산업단지 부지들이 있었고, 심지어 봉림일반산업단지 주변으로도 휑한 산업단지가 있었단다. 그래서 엄마는 김해시가 봉림일반산업단지까지 허가하려는 걸 쉽게 이해할 순 없었지. 허가 과정에서 김맹곤 김해시장 막말사건으로 여론이 들끓었고 결국 김해시장은 선거법 위반으로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시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단다. 후에 도시개발사업자에게서 뒷돈을 요구하고 받기까지 하여 징역 8년을 구형을 받기도 했더구나. 물론 봉림일반산업단지는 허가를 받지 못했단다.

그러나, 새미야. 너도 보았겠지만 지금 무척산 그곳이 숲으로 복원되진 않았단다. 오히려 개별공장이 5곳 정도 더 들어서 있더구나. 몇몇 사람들은 엄마가 봉림일반산업단지를 막아내는 데 애썼다고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단다. 또 요란했던 만큼 ‘내가 이렇게 했는데’라고 내세우며 뿌듯해하시는 분들이 곳곳에 계시지. 하지만 엄마에게 봉림일반산업단지는 이상한 이상주의자로서 가슴 아픈 현장이란다. 엄마는 김해시가 밀리는 여론이 확실히 형성되었을 때, 직접 행동을 그만두었단다. 왜? 엄마의 행보를 생림초 학부모님들께서 섭섭해 하셨거든. 엄마는 주변의 질문과 의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었지.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밝혀 보자면, 일반산업단지 사업설명회를 같이 무산시켰던 주민 움직임이 후반엔 조금 알쏭해졌단다. 학교 옆 빌라에 편의 시설이 설치되는 등 엄마는 뭔가 자본의 회유를 느꼈단다. 힘차게 반대 여론을 몰아주던 언론까지 낌새가 이상했지. 고맙다 격려하며 잔치상 차려 주셨던 마을 분들의 변화라 엄마는 당황하며 표현을 아낄 수밖에 없었단다. 그분들이 선택한 마을공동체 결정이니까. 마을 내부는 끝까지 반대하는 소수와 갈등까지 느껴졌단다. 그래서 해당 지역 당사자가 아닌 엄마는 침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지.

봉림일반산업단지는 들어서지 않았지만, 끝내 숲은 황폐해진 그대로 개별공장이 들어섰지. 엄마에게는 가슴 쓰라린 경험이란다. 엄마는 산업단지가 들어서지 않으면 개별공장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숲이 복원되기를 기대하였단다. 당연히 마을은 고난을 같이 이겨내며 우애로운 마을공동체가 단단하게 다져지리라 기다렸단다. 이상한 이상주의자인 어리석은 엄마의 환상이었다. 자본은 이익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며 이기적인 인간의 마음을 이간질시키지. 이타적 자아를 자본을 미끼로 박탈시키기도 한단다. 엄마는 사람과 사회에 대한 불신과 냉정한 현실세계를 확인했던 경험이란다. 물론 그 일을 계기로 김해양산환경운동연합이 태어났지. 작은 환경공동체론 세상을 설득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며 우리 동네 이웃사촌들의 환경모임 ‘숲정이’를 바탕으로 김해양산환경운동연합을 창설하는 계기가 되었단다.

그럼 사람 이야기를 더해볼까. 엄마는 봉림일반산업단지를 반대하려 김해시청 앞에서 출근길 피켓팅을 했단다. 어느 날, 김맹곤 시장이 나에게 눈을 흘기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는데 갑자기 젊은 수행비서관이 되돌아 나와서는 엄마에게 악담을 하는 거야. 엄마는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도 하지 않았지. 엄마는 엄마의 할 일만 하면 되니까? 그 청년이 어찌나 가엾던지. 청춘의 혈기로 썩은 늙은이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똥이나 치워야 했으니까. 잘 차려입은 양복이 너무 슬프더구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봉림일반산업단지 옆 산성마을의 분열을 엄마가 짐작했듯이 밀양 송전탑 반대지역의 마을공동체 붕괴를 엄마는 아프게 목격했단다. 당시 엄마는 밀양을 매주 1회 1박 2일 연대를 하고 있었지. 밀양송전탑 반대 다큐에서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눈물을 흘렸던 마을이장님 댁으로 어느 날 동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더구나. 배신했기 때문이지. 그 이장님은 마을 사람들을 주거침입으로 경찰에 고발을 했단다. 함께 송전탑 반대운동을 하며 같이 동고동락 했던 이웃을 당당하게 거절하며 끊어 내더구나. 반대 주민들은 분노로 쓰러지시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엄마는 어느 탈핵 단체에서 왕따 같은 것을 당하기도 했단다. 그들은 엄마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엄마에게 예의가 없다고 나무랐지. 엄마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조차 엄마를 소외시키더구나. 탈핵의 길 위에서 공동체 식사시간을 알려달라 부탁해도 반응이 없고, 엄마가 기록용 사진을 찍을 때, 대신 현수막을 거둬 주지도 않더구나. 자신에게 말 걸지 말라고까지 하고. 그 외는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더구나. 친목 도모를 위한 계모임도 아닌데 무리를 만들어 엄마를 험담하고 평가하더구나. 엄마는 분위기를 대강 알고 있었지만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단다. 문제가 있다면 당사자인 엄마에게 우선 이야기하고 대화로 해결을 시도하는 것이 상식 아닐까? 유치찬란한 일이었지. 끊임없이 누군가를 배제하고 편가르며 나만 옳다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란다. 사랑이 빠진 정의는 올바른 정의가 아니란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더구나.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우애로운 공동체를 정답으로 내세우면서 실제는 선별적인 우애와 선택적인 공동체를 지향하더구나. 조금 다름에 대해 인색하고 배척하더구나.

나와 다름에 배척하는 모습은 엄마의 모습이기도 하지. 엄마는 차마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지 못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 사람의 민낯인가보다. 때때로 활동가들은 자신의 활동에 대한 자부심을 넘어 우상화로 자기자신을 환상하며 활동의 원동력으로 삼기도 하는 것 같더구나. 자기만족이 원동력인 영웅주의는 독단과 독선의 시작이란다. 물론 물은 흐르고 사람은 변하지. 지금도 변화하며 실천하는 시민들의 발걸음으로 세상은 점점 더 아름다워진단다. 세상도 사람도 따뜻하게 나아가는 과정이지만 엄마는 때때로 그 과정에서 충격을 받기도 했단다. 이상한 이상주의자로서 엄마도 세상으로 따뜻하게 나아가길 포기해서는 안되겠지. 그러나, 사회의 폭력으로 파랑새를 잃어가는 지금, 어미의 따뜻함을 품어내는 것이 인생의 가치일까 의문이란다. 새미야 그래도 너는 따뜻한 사람이 되거라. 그것이 더 좋은 사람의 품위고 더 정의로운 사회의 첫발이란다. 사랑해.

이상한 사회

나는 참 이상해보이더라. 근데 이상하다는 건 특별한 거잖아. 퀴어(queer)한 건 아름다운 거라고 네가 알려줬잖아. 사진 출처 : Louis Maniquet

솔직히 나도 당신을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있어. 문장 끝엔 꼭 느낌표가 새겨져 있던 피켓을 들고 집 나선 후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을 때. 경찰과 대치 상황에서 머리끝까지 빨갛게 열 올리며 욕 퍼부을 때. 네가 참 이상하다 생각했어. 며칠 집을 비우다 돌아와선, 사회와 관계로부터 받은 상처를 회복하려 또다시 며칠을 쓸 때도 마찬가지지. 모든 진이 다 빠졌음에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느낌표 붙은 피켓 들고 집 나설 때도 그랬어.

이럴 때도 네가 참 이상했어. 캄보디아에 있는 나무들에 매료돼 길 잃은 네가. 길에서 처음 만난 개들이 한참을 따르는 네가. 산에 들에 있는 온갖 생명들 이름을 아는 네가. 나는 참 이상해보이더라. 근데 이상하다는 건 특별한 거잖아. 퀴어(queer)한 건 아름다운 거라고 네가 알려줬잖아.

언니가 켜지지 않는 신호등이 선 스쿨존 횡단보도 위에서 쓰러진 날 이후 당신은 가끔 좁은 우리에 갇힌 저 생명들처럼 이상 행동을 보였지. 잠들지 못하고 온 집안을 휘젓고 돌아다녔지. 언니 카톡에 접속한 아빠와 ‘진솔아’ 부르며 이야기 나눴지. 놀이터에서 아이들과 시소 타며 깔깔 웃다가 뒤돌아서서 처절히 울었지. 이때는 당신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어.

진짜 이상한 건 뭔지 알아? 지금 우리 언니에게서 아가씨 냄새가 아니라 생콩 냄새가 난다는 거야. 언니 사고 이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 학교 관리자가 골프장에서 김치 하며 찍은 사진을 프로필로 설정했다는 거야. 사고 지점 신호등은 켜지지 않았고 오히려 사라졌다는 거야. 뒤집혀진 세상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이상한 이상주의자로 치부되는 거야.

“네가 겪은 고통은 이 세상에 너무나 많고,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단다.” 어떤 사람이 조언해주시더라. 이 말에 완전 동의해. 근데 전제가 틀렸지. 나는 이미 쉽게 바뀌지 않는 세상을 견디려 용쓰는 중이고, 애초에 내 고통이 제일이라 생각할 수 없거든. 내 눈 앞엔 당신과 언니가 숨 쉬고 있는걸.

저 너머 있는 이상이란 과연 뭘까. 어떤 세상이 결코 다가올 수 없길래 우리가 이리 괴로운 걸까. 그렇다면 현실은 뭔데. 우리 사회에서 관찰되는-혹은 전시되는-수많은 고통은 뭔데. 우리가 겪고 있는 허망함은, 우리가 느끼고 있는 빈자리는 뭔데. 엄마, 정신 차리고 똑바로 다시 생각해봐. 우리는 이상을 쫓는 몽상가가 아니야. 아주 정확히 현실을 살고 있잖아. 자연이 시들도록 장치돼 있는 이곳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결과값을 온몸에 새기고 있잖아. 생콩 냄새가 나는 언니라는 자연이 점점 더 시들고 있잖아.


  1. 행복의 샘. ‘우물’의 경상도 사투리.

  2. 행복의 새. 솔빈의 언니이자 스쿨존 횡단보도 교통사고 피해자.

숲정이

우리 동네를 낮게 아우르는 숲

솔빈

그 순간, 녹색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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