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의 마주보기] ⑨ 흐르는 강 따라 산 따라

새미(솔빈)는 숲정이의 딸이다. 숲정이는 새미의 엄마이다. 엄마는 딸이 살아가는 세상을 자연답게 가꾸기 위해 시민운동을 하였다. 정성스럽게 ‘선과 정의’를 지키려 노력하지만 좌절과 허탈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의지를 잃은 엄마가 그동안의 경험과 생각들을 딸에게 이야기한다. 숲정이와 새미의 딸이자 언니인 백진솔(파랑새)은 6월 19일 부산 백산초 스쿨존 횡단보도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의지를 잃어버린 숲정이와 새미는 지친 서로를 바라본다.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길

너를 눕혀 놓고 산에 들었다. ‘가팔라서 억수 힘들어예. 조심해서 다녀 오이소.’ 미진이 이모의 그득한 눈빛을 뒤꼭지로 받아 들며 산을 올랐다. 닫힌 폐 안으로 바삐 숨이 들락날락. 주욱 잡아 끌어주는 굴참나무가 잠시의 위안. 오를 뿐.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갈림길에서 발끝을 돌렸다가 세웠다가 틀었다가 비틀고를 거듭거듭. 가파르게 꼭대기로 가는 길. 갈팡질팡도 사랑은 사랑이다. 삶도 죽음도 같은 꼭짓점을 가졌다. 어미가 잡고 늘어진 건지. 네가 붙잡고 말갛는지.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길에서 쓰러지는 가을 구절초를 본다.

새미야1, 나의 새미야. 사랑하는 솔빈아, 힘들지? 우리 집 막내는 누구보다 가볍고 밝은 일상을 즐기길 엄마 아빠 언니가 그렇게 응원하고 바랐는데. 지금의 고통과 삶의 무게를 어떻게 하면 좋겠니. 파랑새의 동생아. 파랑새의 달콤한 짝꿍아.

언니를 눕혀 놓고 지난 10월 14일. 해반천2에서 어린이 생태 놀이 동아리 ‘흐르는 강 따라 산 따라’를 진행했단다. 엄마가 무슨 정신이 있었겠니. 봄에 만난 동무들 부모님이 가을 만남에 대해 문의가 와서 짧게 고민하다가 길을 나섰단다. 봄에 봉황대3에서 헤어지면서 가을 일정을 약속했었거든. 파랑새4의 고통을 고스란히 보고 있는 엄마는 6월 19일5 이후 시간을 잃었단다. 그날로 엄마 세상은 멈춤이란다. 무의식과 의식의 틈새, 이미 가을이더구나.

파랑새를 눕혀 놓고 나온 지난 10월 14일, 해반천에서 어린이 생태 놀이 동아리 ‘흐르는 강 따라 산 따라’를 진행했다. 사진 제공 : 숲정이

아카시 향이 향긋한 4월 29일, 파랑새와 같이 봉황대에서 아이들을 만났었다. 엄마에게는 ‘숲정이’란 애칭도 있지만 ‘흐르는 강’이라는 별명도 있지. ‘강물처럼 끊임없이 흐르며 나를 성찰하고 위에서 아래로 낮아지며 결국 넓은 바다의 포용으로 죽어간다’란 나름의 의미를 가졌단다. 숲정이보다 더 오래된 엄마의 별명이란다. 물론 너도 잘 알겠지. 어린이 생태 놀이 동아리 ‘흐르는 강 따라 산 따라’를 언제부터 시작했는지는 기억이 없네. 파랑새가 이십대 후반이니까 이십 년 전은 확실하구나.

엄마는 자연이 최고 철학이고 최상의 예술이며 학문이라는 신념이 있단다.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자라야 한다는 확신도 있지. 무엇이나 돈으로 해결될 것 같은 자본주의에 타협하지 않고 아이들을 이웃사촌으로 보듬으며 자연 속 놀이로 기쁘게 이끌었지. 너도, 파랑새도 언제나 작은 선생님이었지.

그러나 지금, 파랑새를 자본주의가 질겅질겅 씹어 삼키고 있구나. 엄마의 불복종이 정의롭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 더 큰 고통으로 너희들에게 다가선 것은 아닐까? 엄마는 심란하단다. 죽을 이유도 없고, 살아갈 자신도 없는 엄마는 봄날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키는 가을의 순간이지만 몸과 마음의 물기가 이미 말랐단다. 퍼석퍼석한 몸과 마음을 감추기 위해 6월 19일 이후 처음으로 낯짝에 로션을 발라봤지.

김해에서 매달 ‘흐르는 강 따라 산 따라’를 꾸준히 오래 했었다. 이 푸르른 자연에서 아이들과 뒹굴며 깔깔깔 큰 소리로 웃기를 작정하였지. 물론 지금 생각하면 그 열정이 어디에서 솟았는지 알 수 없고, 지금은 어디로 쭈글 사라졌는지 모를 일이다. “아이들 평화가 온 지구의 평화다.”란 믿음은 변함이 없단다. 노동자로서 삶을 마치고 농부의 삶으로 가는 길. 그 틈새 여유로 올해 봄 다시 어린이 생태 놀이 동아리를 시작하였지. 사서선생님이신 파랑새가 특별하게 오셔서 응원해 주셨단다. 진솔아!

아카시 꽃 향을 삼키는 봄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날이었단다. 봉황대에서 만난 우리들은 언제나 시작은 자기소개로 꼬물꼬물 시작 하지. 파랑새는 아이들 뒤에 빙긋 웃으며 계셨단다. 진솔아! 이팝(쌀밥)나무, 이팝 아래에선 신천리, 천곡리 김해의 천연기념물인 그를 소개하였단다. 모감주나무 열매를 주워 들고는 서해바다를 헤엄쳐 금관가야 땅을 만나서 발아하였을 수도 있다 상상도 하였지. 조개무지에 섞여 있을 가야의 씨앗 살구나무도 살펴보고, 해당화와 해국을 만났을 때는 염생식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지. 해반천은 바다로 나아가는 길목이었으니까. 가야의 배가 띄워져 있는 웅덩이 둘레로 운치 있게 서 있는 버드나무를 보며 물을 정화하는 수생식물에 대해 설명하였단다. 물론 억새와 갈대의 구별법도 알려주었지. 자연의 역할과 있는 그대로 존중에 대해 은근슬쩍 여운을 흘리기도 했지. 가위바위보 하며 아카시 잎 띵구기 놀이도 하고, 괭이밥 시큼한 잎도 맛보았단다. 설익은 팽나무 열매는 초록맛이라고 하더구나. 여덟 명의 아이는 올망졸망 꽃송이 같았단다. 한두 송이는 꼭 삐죽거리기도 하고 불쑥 튀어 나오기도 하잖니? 파랑새 선생님, 상냥하게 아이들을 토닥거렸지. 맞아. 진솔이는 따뜻한 딸이었고, 언니였고 선생님이었다.

파랑새와 새미이가 요만한 아이였을 때 서잿골 산불이 난 자리에 돌 이름표를 만들어 박으며 나무를 심었잖아. 기억나니? 지금은 숲이 되었겠지. 대포천에서 첨벙거리며 갈겨니를 쫒아 다녔잖아. 분성산 꼭대기를 헉헉 올라가기도 했었지. 새미와 파랑새에게 엄마는 어떤 엄마였을까? 어느 날 네가 ‘흐르는 강따라 산따라’를 가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였지. 엄마가 이유를 궁금해 하니까 너는 “내 엄마인데 왜? 나는 엄마를 다른 친구들에게 뺏겨야 하는데? 싫어.” 했단다. 엄마가 어찌나 미안하던지. 너희들은 책임감 있는 작은 선생님으로서 놀이 보조를 해야 했고 또래랑 같이 놀지를 못했거든. 엄마의 딸이라는 이유로 엄마는 괜히 너희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고. 네가 12살 즈음 때의 일 같다. 미안하다. 엄마라는 존재가 너희들의 자유를 속박하는 사슬이었을지도… 정말 미안하다.

더러운 대한민국에게 엄마의 온 삶을 부정 당하는구나. 엄마의 비현실적인 가치 때문에 너희들은 대한민국의 적당한 교집합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어물쩍 적당히 ‘네네’ 굽신도 했다면, 할 줄 알았다면 너희들 일상이 휠 수월하지 않았을까? 미안하다. 새미야! 파랑새야! 적당히 교집합을 타협하는 태도, 어물쩍 미적거리는 행동이었다면 정의롭지 못한 대한민국에서 너희들이 숨쉬기가 더 쉬웠을 텐데. 엄마는 남들이 불편해 하는 동시에 인정하기도 하는 원칙주의자란다. 엄마가 추구하는 가치와 실천은 엄마에겐 평범한 사람의 기본이지. 파랑새 일을 겪으면서 엄마의 대부분은 평범한 기본값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 번 확인하였단다. 엄마는 이상한 이상주의자이더구나. 비현실적인 엄마의 이상 때문에 너희들이 더욱 힘들었겠더구나. 그렇다고 적당히 타협해라. 인 척해라 할 수도 없고. 너희들의 아픔에 엄마가 보탬을 한 것은 아닐까 엄마는 아프단다. 대한민국 국민이라서 세상이 더욱 원망스럽다. 아꼬운6 엄마 딸, 파랑새와 새미를 이 어미가 어찌할꼬. 아이고. 아이고.

가해자를 만나러 가는 길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무슨 말을 할 수나 있을까. 가해자를 만나러 가는 길. 엄마아빠는 그 길에 나서지 말라고 한사코 말렸지. 나도 꿈에 나올까 무서웠지만. 살 떨릴 아빠를 도저히 혼자 보낼 수 없었어. 아빠 곁을 지키고, 언니를 대신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역류할 듯 떨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하고 싶은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가 보였다. ‘안전제일’이라 새겨진 저 허름한 작업복은 원래 입던 옷일까. 살짝 붉어지는 눈시울은 진실일까. 마주치지 못하는 눈과 떨어지는 고개는 무엇 때문일까. 가족이 있을까. 아, 가족은 없다네. 돈 많은 부자일까. 아, 큰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잃었다네. 하필이면. 어찌하여. 마음 속 아주 깊은 곳에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렇다면, 저 사람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저 사람 인생과 심장에 박고 싶었던 대못. 그냥 거둘까.

그 순간 몰려들어 왔지. 내 언니가 건너지 못할 신호등. 언니가 듣지 못할 엄마 목소리. 언니가 먹지 못할 25살 생일 케이크. 언니가 듣지 못할 2024년에 나올 노래… 내 언니가 누리지 못할 모든 것들이. 사진출처 : Priscilla Du Preez 🇨🇦

그 순간 몰려들어 왔지. 내 언니가 건너지 못할 신호등. 언니가 듣지 못할 엄마 목소리. 언니가 먹지 못할 25살 생일 케이크. 언니가 맛보질 못할 공차 신메뉴. 언니가 듣지 못할 2024년에 나올 노래. 언니가 끼지 못할 예쁜 목걸이. 언니가 읽지 못할 정세랑 신작 소설. 언니가 꾸미지 못할 2030년 다이어리. 언니가 마주치지 못할 평생 짝꿍. 언니가 가보지 못할 일본 여행. 언니가 보지 못할 내 결혼식. 언니가 만나지 못할 언니 자식. 언니에게 생기지 않을 주름. 언니가 알지 못할 여든이 된 자기 모습. 언니가 깨닫지 못할 삶의 가치. 내 언니가 누리지 못할 모든 것들이.

흔들리는 그 사람 눈동자를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붙잡고 말했다. “죽을 죄를 지었다고 말하지 마세요. 사셔야죠. 우리 언니는 피해자로 죽을 거고. 그날 이후 우리들은 쭉 피해자 가족으로 살고 있습니다. 당신도 사셔야죠, 가해자로 사셔야죠. 평생 죄를 뉘우치며 꼭 살아 주세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 눈 앞에 펼쳐진 붉은 노을이 불덩이처럼 타올랐어. 차에서 목이 쉬어라 고함을 꽥 질렀지. 꺼져가는 노을과 함께 슬픔을 식혔어.

엄마, 나는 요새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해. 근데 아무리 일상으로 되돌아가고 싶어도 그러기가 쉽지 않아. 사람들은 날 낙인찍었어. 이상을 쫓았던 불쌍한 피해자 가족. 그게 나에게 부여된 새로운 이름인가봐.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동정. 손쉬운 충고와 위로를 애써 삼켜봐.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소란스러움에 온몸을 맡긴 채. 그저 잿덩이가 된 가족을 바라본다. 아빠야. 엄마야. 언니야. 불쌍한 언니야. 같이 가자. 흐르는 강 따라 산 따라 같이 흐르자.


  1. 솔빈의 별명. 우물’의 경상도 사투리. 행복의 샘.

  2. 경남 김해 소재 하천.

  3. 경상남도 김해시 봉황동의 금관가야 지배집단 취락지.

  4. 솔빈의 언니 진솔. 백산초 스쿨존 횡단보도 교통사고 피해자.

  5. 백산초 스쿨존 횡단보도 교통사고 당일.

  6. 제주도 사투리. 사랑스럽다는 뜻. ‘소중히 여기는 것을 잃어 섭섭하거나 어떤 대상이 가치 있는 것이어서 내놓기가 싫다’는 뜻도 있다.

숲정이

우리 동네를 낮게 아우르는 숲

솔빈

그 순간, 녹색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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