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가까이] ㉔ 실험실은 사회와 뚝 떨어져서 존재할 수 있는가?

의약품과 화장품 등 개발에 필수로 자리잡은 동물실험. 그러나 사회에서 격리된 과학기술만의 논리로 이루어지는 실험은 과연 인간에게 필요할까요. 또 통제된 환경에만 도출되는 결론은 옳은 것일까요. 격리와 통제의 무균실에서 도출되는 진리가 인간과 환경에게 도움이 될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폐쇄된 동물실험실에서

모 대학에서 실험동물윤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동물실험실을 방문할 일이 많아졌습니다. 처음 들어가 본 동물실험실은 깨끗하고 위생적이며 청결한 곳이자 외부와 격리되어 학교, 군대, 감옥, 시설과 같은 느낌을 주는 폐쇄 환경이었습니다. 실험실 감독을 위해서 에어샤워를 하고 실험실 안으로 들어가자 쥐와 생쥐, 토끼 등 동물들이 저를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부지런히 수선스럽게 움직이는 그들의 등이며 허리에 암 덩어리가 달려있거나 상처 난 것을 묵묵히 쳐다봤습니다. 숨이 막히고 머리가 어질어질했지만, 겉으로는 태연하게 관리감독을 했습니다. 고통받는 동물들이 안타까울 따름이었지요.

실험실은 위생적인 곳이자 격리된 폐쇄환경이다.
사진출처 : Belova59

제가 실험실 환경에 대해서 처음으로 눈뜬 것은 황우석 사태 때였습니다. 그전까지 주류 신문들의 보도는 황우석의 줄기세포기술이 그저 옳다고 하였고 저는 그렇겠거니 믿고 있었지요. 하지만 모든 것이 폭로되었을 때, 줄기세포에 대한 현란한 모든 보고서와 논문, 신문 기사가 머릿속으로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이 황당한 사건을 믿을 수 없었고, 과연 이런 거짓말을 만든 실험실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서야 동물실험실이 사회와 공동체와 접촉경계면이 없는 폐쇄 환경임을 알게 되었지요. 사회와 완벽하게 분리된 이런 환경에서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과 유사 파시즘적인 욕망이 서식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실 동물실험의 전제조건은 매우 간단합니다. ‘인간과 동물이 유사한 반응을 보인다’라는 간단한 원리로 되어 있지요. 질병 치료를 위한 의약품이나 음식, 화장품 등 화학물질의 사용이 인간에게 적용되기 전에 그와 비슷한 동물에게 미리 시험해서 부작용 여부를 보겠다는 의도입니다. 그러나 인간과 동물의 독성편차는 5~25% 정도로 꽤 큰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인간과 동물이 공유하는 질병은 1.16%에 불과합니다. 유전학적으로 인간과 가장 가까운 사촌지간이라는 유인원의 경우만 하더라도 DNA의 97~99%가 인간과 일치한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인간과 거의 흡사하다고 말할 수치입니다만, 하지만 중요한 것은 보통 생명공학에서는, 1%의 차이에도 유의미한 결과를 낳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편차가 1~3%라면 기본 전제부터 취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황우석 사태 이후 동물실험실에서 실험동물윤리위원회를 설치하게 된 이유도 바로 실험실을 고립무원의 지대로 놔두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이 실험실에 개입하여 숙의되고 심의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출발합니다. 황우석 사태 때 참여연대가 주장했던 ‘합의회의’도 그런 맥락일 것입니다. 사회와 공동체와 분리되고 윤리적인 합의의 맥락에서 벗어난 채로 과학기술을 방치해선 안되며, 과학기술은 시민의 손에 재전유되어야 한다는 발상입니다. 그것이 심의민주주의, 숙의민주주의라고도 불리지요. 과학기술이라면 무조건 객관적인 진리라고 바라보던 시각은 이제 낡은 논리입니다. 폐쇄 환경을 사회와 분리된 채 그대로 놓아 둔다면 이미 경험한 것처럼 그 안에서 온갖 맹목적인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과 파시즘이 똬리를 틀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생명과 자연을 무시한 채 이루어지는 실험과 과학기술의 발전만이 절대선일 수만은 없습니다.

실험실 환경의 기원

실험실의 기원은 작은 실험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파스퇴르의 ‘구부러진 플라스코’라는 작은 실험도구, 아마 생물 시간이나 자연 시간에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겁니다. 외부와 밀폐된 플라스코에 담긴 음식물에 미생물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실험이지요, 그 후로 여러 가지 방식으로 과학 실험이 행해졌고, 실험실이 설립되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실험실이 문명에 설립되면서, 어느 시점 이후부터인가 사회 자체도 거대한 실험실과 같이 간주 되는 경향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학교, 군대, 감옥, 시설, 정신병원 등은 실험실처럼 폐쇄된 무균질의 환경을 조성하였고, 사회과학이나 인류학, 생물학, 의학 등이 인간에게 적용되는 실험의 장으로 활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최종적인 모습은 위생적으로 이루어졌던 서류 한통이 유발한 위생적인 절멸 캠프인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실험실은 내부와 외부를 철저히 구분하며, 블랙박스와 같은 폐쇄된 내부 환경을 만들어냅니다. 실험실은 진리가 서식할 수 있는 절대선의 공간연출인양 내세웁니다. 말하자면 반드시 외부와 격리되고 분리된 내부에서의 실험이 이상적인 평균값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설정하는 것입니다. 외부의 영향을 제거하고 조건을 같게 하면, 똑같은 수치의 결과값을 갖게 되리라는 믿음이지요. 그런 점에서 문명은 분리, 격리, 폐쇄, 범위한정기술 등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즉, 다른 것과 연결되고 연관되는 모든 관계망의 요소를 끊고 이상적인 평균값을 제시할 분리된 공간이 필요하게 된 셈이지요.

실험실의 진정한 기원은, 파스퇴르의 구부러진 플라스코에서 까마득하게 거슬러 올라간 고대로부터 유래합니다. 바로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그 출발점이지요. 이데아는 이상적이고 완결적이고 원형적인 세계입니다. 그리고 현실의 감각적인 질서로부터 분리된 세계이기도 하지요. 이데아 세상은 수많은 차이 나는 것 중에서 원형이고 완결된 원본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플라톤의 추론 결과로서 도출한 개념입니다. 세상에 완벽하고 이상적인 삼각형이 있을 수 있느냐는 질문이 들어온다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저는 대학생 시절 플라톤에 관한 수업에서 F학점을 세 번 연달아 맞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감각의 세계, 접촉의 세계, 흐름의 세계를 중시하면서 이와 분리된 이데아를 엄청나게 비판했던 반항적인 학생이었습니다. 그래서 담당 교수는 자신에게 반항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보기 좋게 F학점을 주었지요. 그 일이 세 번 연달아 있은 이후 아주 어렵게 대학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를 다시 생각해보면, 저는 세상의 모나고 삐뚤빼뚤한 삼각형이 아니라, 완결적이고 이상적인 삼각형이 따로 있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용납할 수도 긍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학생 때 헤라클레이토스의 흐름의 원리를 제시하면서, 플라톤의 아카데미와 이데아론에 대해서 전쟁 선포를 하였습니다. 감각의 세계는 진실일 수 없다는 플라톤의 생각은 신체, 동물, 소수자, 민중 등을 무시하고 배제한 엘리트주의였습니다. F학점을 연속해서 맞게 된 것은 아쉽지만, 그때 그런 원칙을 유지했기 때문에 현재의 삐딱한 사상을 전개하고 있는 저도 있을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플라톤은 추론과 논증 능력을 가진 엘리트를 양성하는 아카데미아를 설립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현존 아카데미의 모태가 됩니다. 아카데미는 남성적인 진리, 즉 분리, 격리, 폐쇄 등을 통한 진리의 거주집니다. 반면 여성적인 진리는 접속, 접촉, 감각, 연결에 기반합니다. 아카데미는 “~은 ~이다”라는 정의(definition)을 내릴 수 있는 전문가들을 양성하였던 교육기관입니다. 이렇게 전문가가 단정내리고 의미화함으로써,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고정관념을 생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모델화=의미화=표상화=상품화=자본화라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현재의 인지자본주의는 “~은 ~이다”라고 의미화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상품으로 만들어버리고 자본화될 수 있는 질서입니다. 이에 따라 플라톤의 아카데미의 질서는 현존 문명의 주춧돌이면서, 동시에 문명의 병폐와 부패의 기원이기도 합니다.

본질은 모르고 작동만 하는 기계들

저는 어릴 적 텔레비전이 작동하지 않으면 그것을 내 손으로 뜯어내서 고치는 상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당연히 고장난 텔레비전은 전파상 기술자 아저씨에게 맡겨놔야 겨우 고칠 수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고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곤 했습니다. 전파상에 진열되어 있는 신기한 기계들과 부품들이 저의 상상력을 자극했던 것이지요. 이따금 아저씨 심부름도 하면서, 납땜 하는 법, 라디오 쉽게 만드는 법, 간단히 고칠 수 있는 방법 등을 배웠지요. 그래도 저의 어릴 적은 디지털 시대가 아닌 아날로그 시대라서 수리에 물리적인 방법이 많이 동원되는 편이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사용법과 수리법 등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계가 고장 났을 때, 직접 뜯어내고 조립해서 얼추 움직일 정도의 상태를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물론 정확히 고친 건 아니고, 그냥 이리저리 소리를 내며 제멋대로긴 했지만 말이지요.

고대 철학의 질문은 대부분 “이 세계가 있기까지의 원인은 무엇인가”였습니다. 이를테면 탈레스는 물을, 아낙시메데스는 공기를,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을, 엠페도클레스는 물, 불, 흙, 공기를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를 세계의 원인으로 보았지요. 근대 철학에서는 세계의 원인을 묻던 실체 논의가 갑자기 사라집니다. 즉, “세계가 움직이는 원인이 무엇인가?”라는 본질 대신 작동을 묻게 되는 질문으로 이행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시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본질은 알 수 없지만, 작동은 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질에 대한 질문은 전문가들과 엘리트들의 손에 맡겨집니다. 이에 따라 전문가 이외에는 이유와 원인, 본질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소외되어 있으면서도, 작동, 구동, 작업에 사람들이 동원되는 상황이 빈번히 벌어집니다. 이러한 현실은 바로 실험실의 등장과도 긴밀한 관련을 갖습니다. 마치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블랙박스와 같은 가전제품이 작동되는 상황이 오늘날의 상황이지요. 이제 가전제품 하나만 고장 나도 작동이유를 알고 있는 전문가들에게 요청해야 합니다. 직접 자기가 고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게 되었지요. 이와 같이 본질에 대한 질문이 전문가들과 엘리트들의 손에 맡겨지면서 과학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 되고, 작동으로만 존재하는 신체, 욕망, 생명, 사랑, 정동 등을 지배할 수 있는 진리임을 보증하려고 했습니다. 근대 사회에서의 과학은 신학을 대신할 지위를 갖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생각해보면, 생명에 대해서 “~은 ~이다”라고 이유와 본질을 규정할 수 있는 전문가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생명이 보여주는 작동은 아름답고 위대하며 경외로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미명 하에 생명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고 설계할 수 있다는 오만함이 황우석 사태를 불렀지요.

사회의 실험실화, 실험실의 사회화

실험실과 같은 고립의 환경이 사회 도처에도 작동하고 있다. 사진출처 : Engin_Akyurt

사회조사사업, 통계사업, 인구조사, 앙케이트, 인류학 등을 보더라도 사회는 이제 실험실과 유사한 것으로 다루어집니다. 평균적인 삶, 평준화된 행복, 균질화된 욕망이 이 사회를 다 설명해준다는 미몽에 사로잡혀서 말이지요. 이것은 과학과 기술을 사회에 적용하는 것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사회 자체의 모습을 실험실 환경과 유사한 환경으로 만듭니다. 즉 위생적이고 탈색된 공간으로, 간섭과 개입이 없는 무균질의 공간으로, 이상적 평균값이 도출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회가 실험실 유형으로 바뀌게 되면, 결국 1인 가구 유형의 삶이나 우주선 유형의 삶 즉 세상과 분리된 공간연출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제 내밀한 사생활 공간인 가정에 대해서조차도 작은 실험실과 같은 것으로 감시되고 관찰되고 실험됩니다. 사회적 장치나 제도들은 온갖 과학기술의 적용될 수 있는 깨끗한 공간, 동질적인 공간, 평균적인 공간이 재탄생 됩니다. 이에 따라 군대, 감옥, 학교, 정신병원, 시설 등은 더 첨예하게 실험실 환경이 갖는 특징들을 복제하고 이식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학교는 실험실이자, 정신병원이자, 수용소이자, 감옥으로 기능하기 시작합니다. 자유를 찾아 탈학교, 탈시설 등을 하더라도 우리 사회 도처에 실험실 환경은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벗어나기란 힘듭니다. 프랑스 철학자 미쉘 푸코의 통제사회, 감시사회 등에 대한 진단은 매우 예리하게 이러한 지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1994, ㈜나남)은 일상의 생활세계까지 장악한 통치 권력, 규율 권력의 사회의 실험실화를 날카롭게 조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실험실에 사회가 개입하는 것은, ‘사회의 실험화’에 대한 반대의 경향 즉 ‘실험실의 사회화’라는 방향을 강화할 것입니다. 이에 따라 근세 초의 길드가 과학기술을 제어했던 것처럼 시민사회가 윤리적인 제어를 가능케 됩니다. 이에 따라 이유를 모른 채 작동시켰기 때문에 전문가들과 엘리트들, 관료들에게 호소했던 현재의 문명이 아니라, 사람들이 통제하고 제어할 수 있는 적정한 수준의 기술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심의민주주의는 단지 몇 명의 전문가들이 심의하는 실험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시민사회가 개입하여 연구기획 단계에서부터 제어하고 통제하는 바로 향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실험실의 사회화 국면은 과학기술의 맹신과 기술 진보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사회의 실험실화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탄소고정술의 아킬레스건

기후변화의 상황이 이제 코앞까지 다가왔습니다. 기후변화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겪지 못한 스콜성 호우와 가뭄, 열대야, 식생의 변화, 생물 종 대량멸종 등을 일으키는 중입니다. “기후변화에 대한 해결방안이 없을까?”를 고심하다가 언젠가 탄소고정술에 대한 기사를 읽고 마치 가느다란 희망의 끈처럼 여겼을 때도 있었지요. 기술이 지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술낙관론에 빠져들었던 시기였습니다. 당시는 잘 알지 못하지만 막연하게 기술이 지구를 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나 2014년 미국 정부는 탄소고정술에 대한 프로젝트 지원 중단을 발표합니다. 탄소고정술로는 기후변화가 극복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알려주는 사건입니다. 저는 실망과 좌절을 느끼고 그리고 다른 모색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지요. 그때 근본적인 문명의 전환, 사회시스템과 삶의 변화가 아니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습니다. “실험실에서의 탄소 분자와 생태계에서의 탄소 분자가 같을까요?” 성분이나 본질로는 같다고 볼 수는 있지만, 탄소 분자가 작동하고 순환하는 바는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생태계에서의 탄소순환은 실험실에서의 탄소 입자의 추출과 같을 수 없습니다. 생태계에서의 탄소 분자는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원소 혹은 탄소들끼리의 결합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물질로 존재합니다. 실험실에서의 탄소 분자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탄소 분자만 보더라도 실험실 환경이 만능열쇠일 수는 없다는 점이 드러납니다. 물론 파스퇴르는 백신을 만들어서 인류의 목숨을 많이 구했습니다. 그러나 그 관점을 모든 것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겠지요. 그것을 모든 것에 적용하려는 것은 과학기술에 대한 헛된 맹신과 망상입니다.

생태계라는 전일적인 연결망

아이같은 눈빛을 가진 실험실의 동물들. 사진출처 : tiburi

다시 동물실험실에서 있었던 일로 돌아가 보려고 합니다. 동물실험은 개체가 항상 일정한 수치로. 즉 다시 말해 이상적인 평균값으로 생체 반응을 한다는 설정에 존립 기반을 삼고 있습니다. 사실 개체중심주의와 연결망중심주의는 환경 담론에서 끊임없이 논쟁해 온 주제이기도 합니다. 생태계로부터 분리된 개체라 할지라도 신체 내부에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속성을 갖기 때문에, 그 생체 반응의 대부분은 이상적 평균값을 보인다는 주장은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실험실 환경을 생각해보면 그럴듯하지 않다는 것도 드러납니다. 자연생태계 어디에도 없는 분리된 실험실 환경이, 이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제대로 된 답을 줄 수 있을까요? 더욱이 인간과 동물은 종간 차이를 갖고 있는 개체들로서 독성 편차나 유전자 편차 등이 드러나기에, AIDS 치료제 개발, 담배 위해성, 석면 위해성, 암 치료제 개발, 소아마비 백신 개발 등에서 동물실험은 유의미한 결과를 낳지 못했습니다. 또한 수많은 동물실험은 그저 관행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즉, 인간실험 이전 과정의 일부로서 자리 잡았기 때문에, 유효성 여부와 무관하게 무분별하게 시행되고 있는 셈이지요. 1960년대 전 세계를 뒤흔들었던 탈리도마이드 사건은 잘 알려진 비극입니다. 입덧치료제로 개발된 탈리도마이드는 동물실험을 통해 안전성이 입증되었지만, 정작 인간에게 있어서는 팔 또는 다리가 없는 기형아를 출산하게 만들었고, 그 피해 규모는 전 세계 46개국에서 1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험동물의 평가 방법은 3R입니다. 개체수를 줄이고(reduction), 대체법을 찾으며(replacement), 고통을 줄이는(refinement)의 방법입니다. 결국 되도록이면 동물실험을 하지 말자는 얘기지요. 저는 불필요한 동물실험이 없도록 최선의 선택을 강조하며 평가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 곳에서는 생명이 도구화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죄책감, 허무감에 시달리고 있지요. 왜냐하면 그날 실험실에서 마치 ‘야 인간이다!“라는 눈빛으로 저를 구경하던 실험쥐와 생쥐가, 아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수선스러움, 장난기를 보였던 기억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동물실험의 배후에 숨어 있는 이데아의 논리, 문명의 논리, 아카데미의 논리가 초래한 작금의 상황–기후변화, 생물 종 대량멸종, 생태계 위기-에 대해서 많은 문제 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공간은 실험실의 공간일 수 없습니다. 생활과 생태, 생명의 공간입니다. 그래서 이런 강팍한 실험실환경을 만든 문명을 대안적으로 전환시킬 방법에 대해서 궁리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회와 공동체는 실험실을 제어하고 관리하고 감독하고 규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과 망상, 파시즘이 더 싹트지 않도록 늘 조심하고 신중하게 견제하고 통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준점을 바로 생명권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 가까이] 시리즈는 단행본 『저성장 시대의 행복사회』(삼인, 2017)의 내용을 나누어 연재하고 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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