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가까이] ㉕ 돌봄과 환대의 공유지, 거실을 여성은 어떻게 다스려왔나?

집 안에서 가족의 공유지라고 할 수 있는 거실을 돌보는 여성의 역할을 생각해 봅시다. 공유지를 가꾸는 지혜는 전통적으로 여성들이 이어왔습니다. 여성의 돌봄과 정동의 흐름은 공유지를 만드는 근본적인 원동력이 됩니다. 남성중심적인 매체의 지배에서 벗어나 돌봄과 정동과 환대의 공유지로서 거실을 되찾아보면 어떨까요?

공유지를 지키려는 여성들

집을 사람의 몸이라 생각해 보면, 각 방은 내장기관의 어디에 해당할까요? 현관을 폐라고 한다면, 화장실은 항문이고, 공부방은 두뇌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집의 심장부는 어디일까요? 뭐니 뭐니 해도 그것은 거실(Living Room)일 것입니다. 대부분 거실에서 집안의 대소사와 희노애락(喜怒愛樂)의 정서순환이 이루어지니까요. 거실이라는 공간은 스토리와 놀이와 재미, 환대의 기쁨, 축제 등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강렬해지기도 뜨거워지기도 하고 서로의 숨이 들락날락하며 공유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거실은 가족의 공유지이기도 합니다. 가족 모두의 공간이기 때문에 너의 공간, 나의 공간 나눌 필요가 없으며 영토의식이나 범위한정기술에 입각한 행동양식이 자리 잡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족의 공동생활에 관한 대부분의 이미지는 거실로 연상됩니다.

예로부터 여성은 공유지인 삼림에서 여러 지혜를 형성했다.
사진 출처: Joshua_seajw92

아이들이나 어머니들, 형제자매 중 누군가가 나서서 판을 벌이면, 그 판이 지속되는 시간 동안만큼은 그가 바로 주인공이 되는 공간이 바로 거실입니다. 그러나 그 판이 배치될 수 있도록 예스(yes)와 노(no)를 결정하는 사람은 바로 어머니 즉, 여성들입니다. 거실에 어머니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은 판이 짜이면, 야단과 호통 소리를 들으며 곧장 정리모드로 들어가야 하니까요. 하지만 대부분의 거실은 어머니의 허락 하에서 늘 축제와 파티의 공간이지요. 욕망, 재미, 놀이, 먹거리로 가득하며, 풍요의 대지와 약속의 땅과 같습니다. 여성의 부드러운 촉감과 교감, 상호작용이 미치는 공간이면서 오감을 자극하는 공간이 거실인 셈이지요.

이제까지 인류의 역사를 볼 때, 여성은 공유지와 아주 특별한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특히 15세기 영국의 존 왕이 〈마그나카르타 선언〉을 통해, 전쟁 중 과부가 된 여성들에게 삼림이라는 공유지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합니다. 당시의 영국에서 삼림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는 생존권 보장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로부터 여성은 삼림에 대한 여러 가지 지혜를 형성했는데, 예컨대 약초, 발효, 저장, 식생, 보관, 버섯, 벌레퇴치, 요리 등에 대한 생태적 지혜가 그것입니다. 그것은 대부분 삼림이나 하천 등 공유지에서 만들어지고 사용되어온 지혜입니다.

공유(共有)라고 하면 누군가는 공산주의라는 단어를 떠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 공유(共有)라는 한자를 쓰기는 하지만, 공산주의의 공유(共有)는, 공동체소유를 뜻하는 공유(共有)보다는 국가소유를 의미하는 공유(公有)에 가깝습니다. 공산주의로 대변되는 공유에 대한 생각은 국가소유가 공유의 전부일 것이라는 착각을 불러옵니다. 공유라는 단어에 딱딱하고 강제적이며 차가운 남성의 이미지가 덧씌워진 이유는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동체소유라는 의미의 공유에는 완전히 다른 인류 역사의 전개가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공유(common)는 여성의 부드러운 돌봄과 사랑과 욕망의 흐름 속에서 ‘네 것도 내 것도 아닌 공통의 것’을 생성하고 창조하는 과정이니까요. 공통의 것은 무엇인가? 바로 공유자산, 생태적 지혜, 집단지성, 공통의 아이디어이겠지요. 최근 주목받고 있는 공유경제의 붐도 사실은 여성이 갖는 돌봄의 부드러움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성의 돌봄과 정동의 흐름은 마찬가지로 공유지를 만들 수 있는 근본적인 원동력인 셈이기 때문입니다.

여성의 지혜와 공유지의 신비

지금 우리집 거실을 한번 둘러볼까요? 여성의 돌봄과 살림이 이루어지는 공유지로서의 영토라는 점이 재발견되나요? 거실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고 시끄럽고 음악과 색채, 냄새가 가득해서 정신이 어지러워진다면, 여성의 공유지에서 사랑과 욕망의 강렬도와 밀도, 온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성의 시선에서 바라볼 때, 거실의 색다른 면이 발견될 것입니다. 여성의 부드러운 손길에 의해서 반질반질해진 가구며 소품 등을 발견하게 됨은 물론이거니와, 거실이 여성의 시선 내에서 모든 동작과 행위가 촉각적으로 배열되는 공간이라는 점이 드러납니다. 거실은 프랑스 철학자들인 들뢰즈와 가타리의 개념인 배치(agencement)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성들은 대부분 거실에서의 배치에 대해 신중한 결정을 하는 미시정치가들입니다.

특히 동물이며 아이들이 마음 놓고 재미있는 놀이를 할 수 있는 장소라는 점도 여성의 공유지가 갖는 성격을 보여줍니다. 장난꾸러기에 수다스러운 아이, 동물, 소수자의 향연이 벌어지는 것은 거실이라는 공유지가 보여주는 일상입니다. 또한 거실은 다른 방들처럼 프라이버시(privacy)가 존중되는 공간과 달리, 개인이 사생활의 영토에서 벗어나 어우러져서 색다른 축제와 파티의 판이 펼쳐졌다 사라지는 그러한 잠재성의 영토입니다. 잠재성은 나타났다 사라지는 특이한 사건으로 드러나지만, 사건에 앞서 전제되어 있는 내재적인 영토입니다. 그래서 잠재성은 자꾸 퍼내도 마르지 않는 우물의 깊이 있는 아래 지층과도 같습니다. 마치 우리의 신체 속에서 잠재성의 비밀을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여성의 공유지에는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잠재성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비를 증오와 배제로 느끼는 파시스트들도 존재합니다. 최근 여성비하나 혐오발화와 증오는 심각한 미시파시즘의 행태를 드러냅니다. 그것은 공통성(common)에 대한 공격과 궤도를 같이 합니다. 그것을 두고 ‘마녀사냥’이라고 부르는 데는 역사적 맥락이 있습니다. 여성에 대한 억압의 역사는 공유지로부터 여성을 분리시키려는 역사와 함께합니다. 피터 라인보우는 『마그나카르타 선언』(2012, 갈무리)에서 공유지 이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땅이 없는 노동자 가족들은 종획[운동]에 반대했다. 그들은 땔감을 모았고 추수 이후에 이식을 주웠으며 아이들은 나무 열매를 줍고 딸기류를 따고 까마귀들을 쫓아냈으며 너도밤나무 열매 수확 철에는 돼지들을 돌보았고 양을 지켰으며 양털을 모았다.(…) 커머너들은 박하로부터 멘톨을 추출하였고 디기탈리스에서 디기탈리스 제제를 추출하였으며 버드나무 껍질에서 아스피린을 추출하였다.”(2012, P136~137)

16~17세기 영국 사회에서 방직산업이 막 산업적 형태를 띠기 시작하자 양모생산을 위해 원재료가 될 양들의 대규모 목축의 필요성이 절실해졌습니다. 그 결과 야산, 벌판, 삼림 등의 공유지에 대한 약탈과 착취가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엔클로저(enclosure)운동입니다. 그 과정에서 여성을 공유지로부터 떼어놓고 분리하기 위한 음험한 음모와 학살(genocide)의 행동이 나타났지요. 그중 하나가 바로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는 ‘마녀사냥’입니다. 예를 들어 의학적인 전문가들과 생태적 지혜를 갖고 있는 산파를 대비시킬 수 있습니다. 산파들은 경험과 관계 속에서 지혜를 획득하고 축적했으며 약초요법에 대한 깊은 통찰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여성들의 생태적 지혜를 마녀들의 괴상한 의례나 행동으로 몰아붙이고, 여성의 공유지가 갖는 비밀과 신비의 생명력을 마녀의 마술과 신의 신비로움을 범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대단히 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피터 라인보우가 인용한 아드리엔 리치의 시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둡게 뒤얽힌 숲이 표시가 없는 밝은 곳과 만나는 곳,/나는 당신에게 그곳이 어딘지 말하지 않으련다/유령이 출몰하는 교차로, 부엽토의 낙원/나는 누가 그곳을 사고, 팔고, 사라지게 하고자 하는지 이미 안다/”(2012, p127)

삼림이라는 공유지를 파괴하는 17세기 유럽의 상황은 전면적으로 여성을 공격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낙원과 같은 여성의 영토는 점차 지배와 소유에 의해서 훼손되고, 여성의 신비스럽고 비밀스러운 공간은 지배의 강권에 의해서 가시적이고 시각화되는데, 이는 격자 모양으로 구획되고 계산되고 노출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신비스러운 여신의 대지는 초기 자본주의 시기의 사업가들이 설치한 울타리에 의해서 갈기갈기 찢겨야 하는 고통의 영토가 됩니다.

공유지를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

공유지가 갖는 신비로움의 비밀을 파헤치다보면, 그것의 기원이 여성성으로 표현되는 ‘사랑과 욕망의 부드러운 흐름’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여성의 공유지에 대한 공격은 오늘날 가정 안에서도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과거에는 가부장제의 얼굴을 하고 나타났지만 지금은 우리의 마음을 예속시키는 더 강력한 것으로 출현합니다. 여성의 사랑과 욕망의 흐름과 가족공동체의 수다스러움을 단번에 개인의 고립된 환상을 분비하는 이미지-영상의 흐름과 미디어의 수다스러움으로 전도시켜 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텔레비전입니다. 텔레비전은 지극히 남성적인 매체입니다. 일방적이고 시각중심적, 중앙집중적이지요. 여성의 촉각적이고 국지적으로 분산된 이미지는 여기서 바로 공격당합니다. 남성적인 텔레비전이 거실의 중앙을 떡 차지하고 나서부터 여성의 공유지로서의 거실의 신비로움과 생명력을 마비시키고 혼자서 쉴 새 없이 떠들어댑니다. 즉, 텔레비전은 가장 이기적인 매체며 남성적인 매체기 때문에 자기만을 봐주기를 원하고 다른 생각을 배려하거나 다른 얘기를 할 수 없도록 가로막으면서 가족들을 전반적으로 침묵으로 이끕니다. 또한 보통의 가정에서 채널선택권이 남성 중심적으로 편재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텔레비전이 지배하는 거실은 남성지배적인 모습을 띤다. 사진 출처: Ron Lach

텔레비전이라는 매체는, 직접 쓰다듬고 어루만지는 촉각적인 여성의 손길이 아니라 시각적이고 일방적인 이미지와 영상으로 이루어진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남성적 매체입니다. 특히 카우치포테이토족(Couch Potato)처럼 거실에 누워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고 있는 남성들의 나태하고 방종한 이미지는 여성의 공유지를 점령한 남성들의 사드(Sade)적인 정복욕을 대변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런 공간연출의 장면은 대부분의 가정에서 숱하게 연출되는 장면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성의 영토는 거실로 이르지 못하고 주방에서 맴돌게 되거나 혹은 남성적 질서에 편입됩니다. 가족들은 미디어의 일방적이고 압도적인 이미지-영상에 침묵을 지키면서 공통적인 생각이나 공유지의 지혜가 아닌 각자 고독한 개인으로 분해된 채 매체에 접근합니다. 제리멘더의 『텔레비젼을 버려라!』(2002, 우물이있는집)에서의 통찰처럼, 텔레비전은 원자화된 개인만을 상대하는 매체인 것은 분명합니다. 가족이 함께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 속에 있어도 가족구성원은 텔레비전을 보는 순간만은 매우 고독하고 외로운 존재로 전락합니다. 각자의 생각과 삶을 공유할 수 있는 거실이 미디어에 의해서 장악된 상황이라면, 지극히 고립되고 외로운 사람들로 전락하게 마련일 것입니다. 최근 1인 가구의 증대의 경향도 이러한 맥락의 연장선에서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거실이 가족공동체의 수다스러움이 아니라 이미지-영상의 수다스러움으로 전도된 상황에서 가족들은 함께 있어도 굉장히 외로워지고 저마다 환상의 분비물에 따라 각자의 방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운명으로 여기게 됩니다. 여기서 가족은 공동체적 질서를 해체당하며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서 침묵을 지키는 원자화된 개인들(individuals)로 향합니다. 가족들이 서로 욕망을 교감하기보다는 미디어의 최면상태 속에서 꿈꾸는 인간이 되고 환상의 분비물을 소비하면서 결핍을 채우려는 인간이 되는 것은 거실을 완전히 황무지화하는 길입니다.

더불어 삶의 공간으로서의 거실

가족공동체가 열린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소수자에 대한 돌봄과 이방인에 대한 환대가 함께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돌봄과 환대는 거실에서 보통 이루어집니다. 사실 가족공동체가 외부로부터 문을 닫고 이기적인 집단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그 내부에 있는 소수자에 대해서 돌봄과 정동, 사랑으로 대하는지, 그 외부에 있는 이방인에 대해서 우정과 환대로 대했는지가 결정적입니다. 돌봄과 환대라는 이러한 두 가지 태도가 교차하면서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공간이 바로 거실인 점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가정을 열린 공동체로 만들려는 노력은 거실을 어떻게 돌봄과 환대의 공간으로 연출할 것인가에 달려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래서 거실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그 손님들과 아이, 동물, 소수자들이 어우러지도록 면밀히 배치하는 것은 여성의 몫입니다. 반대로 가족이 열린 공동체가 아니라 고립무원의 영토로 전락하고 성공과 승리를 향해 줄달음질 치는 예속집단으로 나타나는 것의 결과물은, 바로 앞으로 달려가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면 혼자인 현실로 나타납니다.

또한 많은 나라들에서는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는 관혼상제(冠婚喪祭)의 공간이 바로 거실이라는 점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예전에는 시체를 안치하는 곳이 거실이었고,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구분은 병풍이 그 역할을 하고 상을 치렀습니다. 2012년에 들었던 〈한겨레 두레 공제조합〉의 박승옥 대표의 강연에서도 집에서 상을 치르는 전통의 중요성이 언급된 적이 있습니다. 즉, 성당이나 교회, 절에서 상을 치르거나 그조차도 어려울 경우에는 거실에서 상을 치르는 것이 가족공동체가 삶의 연장선으로서 죽음을 온건히 받아들인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박 대표는 ‘공동체와 죽음’이라는 화두를 던지면서, 공동체가 죽음의 의미를 온건히 책임질 때 사람들은 비로소 죽음을 공포나 두려움이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의 삶의 일부로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현재의 우리의 장례문화는 상업화되어 있어서, 남은 가족을 위로하고 떠나는 사람을 편안히 모시는 것이 아니라, 각종 리베이트와 폭리와 불합리가 판친다는 것입니다. 가족공동체의 더불어 삶의 공간인 거실이 제 기능을 한다면, 가족공동체가 자신의 끝 즉 유한성을 홀연히 깨닫고, 죽음의 의미를 온건히 책임질 것입니다.

거실의 기능과 유래, 현실에 대해서 말하다보니, 거실이 이제 많은 잠재성을 품고 있는 신비의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거실의 재발견은 삶의 재발견입니다. 여성이 거실의 사용이나 용도, 기능 등에 대해서 개입하는 것은 여성이 공유지의 사용권을 유지하기 위한 커머너(commoner)의 기본적인 행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실에서 어머니의 잔소리와 간섭을 피해 자신의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컴퓨터에 매달리는 청소년들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공간에서 가족공동체의 색다른 공간연출과 풍부한 소통의 가능성과 잠재성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버섯, 약초, 벌레, 꽃, 나무, 덩이줄기식물, 새, 원숭이, 모기와 거미 등이 가득한 숲이라는 공유지에서 생태적 지혜를 발휘했던 17세기의 마녀라고 불렸던 여성들의 세계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거실이 그러한 공간일 겁니다. 그래서 신비롭고 비밀스러움이 가득한 거실에서 축제와 어울림의 향연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지금 여기 가까이] 시리즈는 총25회에 걸쳐 단행본 『저성장 시대의 행복사회』(삼인, 2017)의 내용을 나누어 연재해왔으며, 이번 편은 이 시리즈의 마지막 회이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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