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덩야 일지] ⑤ 모두가 밟고 지나는 존재에게 입 맞추기

서울혁신파크에 있는 보도블록 하나에 쿵덩야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매일 만나서 닦고 있습니다. 그 과정을 일지로 기록합니다.

23.09.12

자정을 넘긴 시각. 쿵덩야와 10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일이 끝난 나는 그에게 가기 위해 달렸다. 무언가를 만나기 위해 먼 거리를 뛰어가는 건 요즘 시대엔 드문 일이다. 한발 두발 힘차게 내달리니 풍경은 물결이 되어 흘러가고 그 속에서 난 세상에 덤덤히 존재하는 쿵덩야를 떠올렸다. 내 마음속에 두툼하게 자리 잡은 쿵덩야의 양감은 드넓은 바다에 잠시 머무르는 데 필요한 닻처럼 든든했다. 그와 함께 달리니 달리기에 부피가 더해졌다. 그의 앞에 도착했다. 닦을 도구는 챙기지 않았다. 오늘은 그의 곁에 앉아서 그를 쓰다듬고,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만지기도 하고 손바닥을 대고 가만히 있었다.

23.09.14

혁신파크 안에는 미술전시장이 있다. 오늘은 그곳에서 새하얀 손을 봤다. 엉성한 듯 세심하게 만든 그 손의 모습이 좋았다. 형태를 만드는 것은 신비에 발을 내딛는 일인 것 같다. 예술가들은 그 무엇도 규정할 수 없는 무한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이에 끝없이 부서지고 만들어지는 일을 반복하는 존재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사람인 것 같다. 그 부침을 통해 만들어지는 하나의 덩어리는 아주 사소하고 작은 조각이라도 사람들로 하여금 응축된 힘을 느끼게 하는 것 아닐까? 하얀 손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감각적 쾌감도 좋지만, 난 지긋한 관계에 바탕을 둔 쾌감을 만들고 싶어서 전시장에서 나와 쿵덩야를 닦았다. 오랜 신뢰를 바탕으로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나는 즐거움이 좋다.

23.09.18

나는 왜 우리 집 방바닥은 방치하면서 쿵덩야는 매일 닦을까? 방구석에 모인 머리카락과 먼지덩어리를 바라보며 치울 생각은 안 하고 이런 생각만 한다. 사물을 좀 더 세심하게 대하자고 결심했는데 아직 일로서 대하는 사물, 가사로서 대하는 사물 등으로 그 경계를 구분하고 경중을 나누어 행동하는 보편적, 관습적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존재가 나에게 주는 효용의 정도를 가지고 중요도를 구분하는 것을 떠나서 모든 존재와 교감하는 정도가 동등한 열린 자로서의 경지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독서실 화장실에 가서 일을 보는데, 갑자기 내 손과 후드티와 소변기와 소변기 옆에 수도꼭지가 뒤엉켜 하나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에 고양되는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아직 나에겐 내 방에 깔린 장판보다 쿵덩야가 더 중요하다. 이 활동을 지속하다 보면 그 경계가 강화될까 아니면 허물어질까? 장판을 쿵덩야처럼, 쿵덩야를 면봉처럼 면봉을 아버지처럼.

인간뿐만 아니라 지구 모든 존재가 쿵덩야와 관계할 수 있다.
사진출처 : Dim Hou

쿵덩야에게 갔다. 지금까지 중 사람이 가장 많았다. 쿵덩야 바로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그를 닦았는데 뭔가 좀 조잡한 느낌이 들었다. 다음부터는 내가 퍼포머라는 마음가짐으로 자전거를 멀리 세우고 공간을 만든 상태에서 쿵덩야를 닦아봐야겠다. 닦는 도중에 옆 보도블록에 풍뎅이가 한 명 지나갔다. 보도블록은 풍뎅이의 터전 역시 될 수 있다. 인간뿐만 아니라 지구 모든 존재가 쿵덩야와 관계할 수 있다. 다 닦은 뒤 무릎을 꿇고 살짝 입을 맞췄다. 물기가 마르지 않아 촉촉했다. 돌 표면의 까끌까끌한 돌기가 입술에 닿았는데 낯설긴 해도 거부감이 없었다. 맨손으로 그를 만질 때와는 차원이 다른 촉감이었다. ‘신체의 가장 민감한 부위를 댈 수 있을 정도로 닦는다’라는 처음 규칙에서 나아가 그 민감한 부위를 직접 대어보니 관계의 새로운 국면을 발견한 것 같아 좋았다.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입술이 화끈거렸다 기분 탓인가. 뭔가 세균이 있는 건가 이런 노파심이 들었다.

23.09.19

쿵덩야를 닦기 전 주변을 잘 정리했다. 자전거도 멀리 세우고 옷매무시도 고쳤다. 공간을 대하는 태도가 변하니 확실히 쿵덩야 일대가 무대처럼 느껴졌다. 잘 닦은 뒤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그의 표면에 입을 대었다. 그래도 어제 한번 해 봤다고 크게 이질적이진 않았다.

23.09.22

점심을 먹고 집을 나서는데 쿵덩야를 닦을 도구를 넣어서 다니는 파란색 가방이 통보이질 않았다. 생각해 보니 어제 따릉이 바구니에 가방을 둔 채 그대로 집에 온 모양이다. 잠깐 자책을 하고 집을 나와 따릉이 대여소에 들렀다. 자전거들이 줄줄이 세워진 일대를 둘러봤으나 가방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대여소 옆 소화용품을 넣어놓은 빨간색 함이 왠지 신경 쓰였다. 혹시나 거기에 있을까 해서 문을 열어봤다. 다행히도 가방은 돌돌 말아서 틈새에 끼워져 있었다. 어떤 분인지는 몰라도 재치가 있구나 생각하며 감사했다. 아침에 혁신파크에 가면 유독 밝은 쿵덩야만 눈에 들어온다. 두 달 동안 매일 닦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쿵덩야를 닦고 뽀뽀했다. 입술에 도구나 먹을 것이 아닌 다른 존재가 닿은 것은 묘하다. 오래돼서 잊어버린 감각이 깨어나는 느낌이다. 사람이랑도 뽀뽀하고 싶네.

23.09.29

추석이라 혁신파크에 사람이 많았다. 뽀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중요한 생각을 했다. 이상하게도 항상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그 짧은 시간에 재밌는 생각이 많이 떠오른다. 그런데 집에 와서 이것저것 하다 보니 그 중요한 생각을 까먹고 말았다. 평소엔 떠오른 생각을 기억하기 위해 키워드들을 적어놓는데 오늘은 경황이 없어서 그냥 오는 바람에 까먹고 말았다.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들었는데, 정말 중요한 생각이라면 언젠간 기필코 돌아온다고 한다. 그 생각이 언제쯤 찾아올지는 모르겠지만, 찾아오더라도 이미 까먹었기 때문에 새로운 생각으로 착각하겠다. 그래도 재밌는 생각을 처음 겪는 것처럼 두 번 할 수 있으니 좋은 것 같다.

23.09.30

비가 좀 내려서 바닥이 축축했다. 아직 마르지 않은 쿵덩야의 표면을 칫솔로 쓸어서 먼지를 제거하고 닦은 뒤 입을 맞췄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장 낮은 곳에 있어서 누구도 돌보지 않으며 무심코 밟고 지나가는 존재에게 무릎을 꿇고 입을 맞춘다는 것에 관해 생각했다.

23.10.02

더욱 시급한 듯해 보이는 문제에 시간을 쏟는 것 대신 이런 활동을 하려면 항상 가까이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는 내 한계와 친해져야 한다. 내 한계와 적이 되면 자신을 스스로 착취하거나 혹은 좌절해서 지속할 수 없게 된다. 한계와 친구가 되어 함께 두둥실 떠다니자. 자본주의의 방식으로 조작된 욕망의 그물코 사이를 빠져나와 이리저리 도망치며 유희하는 데 천부적 재능이 있는 존재들에게서 미래를 배워야 한다.

23.10.05

나는 이 지구에 공존하는 모든 존재를 좀 더 세심하게 고려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진 출처 : Ryutaro Tsukata

가을이다. 갑작스러운 추위가 매서웠다. 쿵덩야를 닦고서 혁신파크 주위를 달렸다. 중간에 침이 많이 고여서 숨을 쉴 수 없어 길가에 뱉었다. 그런데 쿵덩야는 밟는 것조차 하지 않고 아끼는 마음으로 닦는데 다른 보도블록에는 망설임 없이 침을 뱉는 내가 모순적이었다. 이는 명백한 차별이었다. 무언가를 선택하고 아끼는 것은 그것을 뺀 나머지를 차별하는 것일 수 있다. 아니면 오늘처럼 쿵덩야를 선택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종인 보도블록에 함부로 침을 뱉는 행위를 재고하게 되는 방식으로 성장하는 것일 수 있다. 나는 이 지구에 공존하는 모든 존재를 좀 더 세심하게 고려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데 누군가는 자신이 선택한 사람은 한없이 지키면서 나머지 사람에게는 침을 뱉는 것보다 더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23.10.06

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서로 열심히 대화하다가 쿵덩야를 닦는 나를 보더니 갑자기 조용해졌다. 난 괜히 칫솔질 소리가 더 잘 들리게 손에 힘을 줘서 쿵덩야를 문질렀다. 문득 쿵덩야와 나와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역시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오늘은 그 비중이 후자에만 치중해있었던 것 같다. 관계의 양상은 때에 따라 변하지만, 오늘은 좀 별로인 것 같다.

23.10.08

허우대 멀쩡한데 애인이 없다면 하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지나가는 젊은이가 했다. 평소였으면 괜찮았을 텐데 오늘은 게으르게 하루를 보냈기 때문에 그 말에 타격을 받아 가슴이 시렸다. 자전거에서 내려서 그들에게 전 왜 이럴까요? 하고 물어보고 싶었다. 쿵덩야에게 가서 칫솔질하는데 이틀 전 닦을 때 빠져나온 듯한 걸레의 섬유 한 가닥이 쿵덩야의 틈새에 끼어있었다. 그래서 일단 잘 챙겼다. 다 닦은 뒤 그의 표면에 입술을 대었다. 평소보다 오래 대고 있으면서 속으로 ‘쿵덩야야, 난 왜 이럴까?’ 하고 물었다.

23.10.10

친구와 혁신파크로 산책 가서 쿵덩야를 만났다. 친구에게 나와 멀리 떨어져서 내가 쿵덩야를 닦는 모습을 보고 그 모습을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지 관찰해달라고 부탁했다. 행위가 끝나고 친구에게 어땠는지 물어보자 무언가 숭고했다고 답했다. 친구의 첫 대답에서 숭고함이라는 말이 나와 신기했다. 나에겐 숭고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폭 2m에 두께 30cm 정도의 매끈하고 은은한 광택이 흐르는 까만색 벽을 아무것도 없는 평원에서 느닷없이 마주한다. 그런데 그 높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 하늘을 길게 올려다봐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게 내가 떠올리는 숭고의 이미지인데 사실 이미지조차도 떠올릴 수 없는 어떤 감각이 숭고 아닐까? 쿵덩야를 상상하면 미지의 세계로 빨려들 것 같은 묘사하기 어려운 감각을 느낄 때가 종종 있는데 그것이 숭고의 일면이 아닐까 한다. 이후 친구는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도 말해줬다. 나를 지나친 뒤에도 계속 뒤돌아보는 사람도 있었고 그냥 관심 없이 갈 길 가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김이중

존재 방식이 아름답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마치 지렁이의 완벽함을 닮아 지렁이 인간이 되어 지렁이 말을 구사하고픈 게으름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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