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덩야 일지] ④ 최초의 돌봄

서울혁신파크에 있는 보도블럭 하나에 쿵덩야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매일 만나서 닦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을 일지로 기록합니다.

23.08.28

핑킹가위로 자른 듯 뾰족뾰족한 두상, 앞으로 튀어나온 크고 동그란 눈, 머리에 비해 너무 작은 몸에 가늘게 붙어 달랑거리는 팔다리. 어릴 적 내가 가장 좋아해서 내 이름을 따 ‘이중이’라고 이름 붙인 봉제인형. 사람들은 그 인형을 ‘바트 심슨’이라고 부르지만,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나는 심슨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있는지조차 몰랐고 그저 날 닮은 인형이 마냥 좋아서 늘상 함께했었다. 그 인형을 목욕해 준 것이 내가 기억하는 내 최초의 돌봄이며 단순히 청소나 위생을 이유로 무언가를 닦는 것이 아닌, 한 존재를 나와 동일 선상에 놓고 아끼는 방식으로 닦는 것의 시초였던 것 같다. 물론 목욕은 실패해 이중이에게서 이상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지만, 그 마음만은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누구나 어릴 때 함께한 인형 하나 정도는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인형은 동생으로서 내가 돌볼 아이였고, 밥 먹을 때나 놀이할 때 함께 수다 떨던 친구였으며 깜깜한 밤에는 나를 지켜주는 수호자였다. 나와 관계했던 그 인형은 한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생산되는 사물이 아니고 다양한 역할을 가지며 나를 추동하는 동료이자 동시에 한 존재로서 ‘자기’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과거의 나는 이중이를 정성 들여 목욕시킨 것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인간이, 인간 아닌 다른 존재를 정성을 들여 닦는 행위는 인형에서부터 오지 않았나 싶다. 선사시대에도 인형이 있었으니 말이다.

인형을 목욕해 준 것이 내가 기억하는 내 최초의 돌봄이며 한 존재를 나와 동일 선상에 놓고 아끼는 방식으로 닦는 것의 시초였던 것 같다. 사진: Marina Shatskih

다시금 쿵덩야를 생각한다. 지금 쿵덩야와 나는 어떤 관계일까? 나의 주체성을 지나치게 숨겨 쿵덩야를 부각한다거나, 나를 그대로 쿵덩야에 투영해 나의 복제 및 확장으로 생각하는 이분법적 방식을 벗어나 어린 시절 나와 이중이의 관계처럼 될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해지려면 우선 쿵덩야를 아는 것이 중요하겠다. 그는 나와 함께하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으며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이를 받아들여 인간중심의 틀을 넘는다면 ‘자기’들의 세계 속에서 그와 동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비가 계속 오고 있다. 우산을 쓰고 공원으로 가서 아련하게 쿵덩야를 바라보려고 했는데 비가 그쳤다. 그래서 달리기하러 가서 쿵덩야를 만났다. 그런데 멈춰서 관찰하지는 않았다. 달리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달리기 막바지에는 쿵덩야를 까먹고 그냥 집으로 왔다.

23.08.29

아침부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해야 할 일을 안 하고 집에서 뒹굴뒹굴했다. 저녁 즈음 비가 그쳤고 친구와 함께 혁신파크에 가서 잠깐 달렸다. 쿵덩야가 있는 쪽으로 갔는데 친구가 쿵덩야를 찾아본다며 그 근처를 돌아봤다. 그러나 앞서 온 비로 모든 보도블록이 젖어있었기 때문에 친구는 그를 찾지 못했다. 친구는 나에게 “그냥 아무거나 막 닦는 거 아니야?” 라며 웃으며 말했다. 나는 쿵덩야의 위치를 알려줬다. 비가 막 그친 참이라 쿵덩야는 젖어있었다. 칫솔질과 걸레질을 하고 달리기를 하고 집에 왔다

23.08.30

비가 아주 조금씩 내렸다. 5km 달리기를 하고 혁신파크에 갔다. 세척 도구는 챙기지 않았다. 대신 이번에는 쿵덩야의 앞에 우두커니 서서 1분 정도 말없이 쿵덩야를 쳐다봤다. 그의 몸엔 눈에 띄는 구멍이 하나 있는데 이 위치를 글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사람은 눈코입 팔다리 등 신체의 구석구석을 언어로 구분해 놓아서 만약 얼굴에 있는 점의 위치 같은 것을 설명해야 한다면 비교적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데 반해 쿵덩야는 기준에 따라 상하 좌우가 달라지기 때문에 그가 있는 공간에 가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특징을 설명하려면 말이 길어진다. 쿵덩야의 몸에 특징들을 잘 관찰해서 부분부분 이름을 붙이는 것은 어떨까? 이런 생각을 하다 우리 집에서 함께 살다가 이제는 본지가 좀 오래된 그리마를 떠올리며 만약 그리마가 지구를 지배하는 종이라면 30개나 되는 모든 다리에 각자의 이름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23.08.31

우리는 이 세상에 어떤 식으로든 살아간다. 정글 속에서 동물을 연구하는 학자. 위대한 모험을 하는 사람도 특별하지 않다. 우리 모두 이 세상을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관찰하고 있다. 내가 느끼는 것 모두가 너무나도 중요하며 또한 아무것도 아니다. 장 보는 길에 쿵덩야를 만나서 닦았다. 오늘도 힐끗 쳐다보는 사람은 있었으나 말 거는 사람은 없었다.

23.09.01

서로 길들이게 되면 각자가 세상에 대체 불가능한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다. 아무리 다른 보도블록이 쿵덩야와 유사한 모양이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다른 보도블록을 지금과 같은 과정으로 만난다 해도, 쿵덩야를 만날 때와는 전혀 다를 것이다. 오늘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문득 이 공간엔 언제 사람이 가장 많을지 궁금해졌고 다음엔 사람이 제일 많은 시간에 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23.09.05

그 아저씨의 발길을 잠시 멈추게 한 것은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아이일적 품었던 순수한 호기심의 불씨가 아직 남아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사진출처 : Japheth Mast

쿵덩야에게 가는 도중 <아홉살 인생> 이라는 책을 반납했다. <아홉살 인생>에는 내 오래된 기억 속에 강렬하게 자리매김하고 있어서 어쩌면 내 지금의 정체성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골방철학자’ 라는 단어가 나온다. 그러나 그 등장인물의 서사에 대해선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확인하고 싶어서 빌렸다. 항상 소수에 자리하고 싶은 내 성격의 근원이 이 ‘골방철학자’에서부터 왔다고 평소 생각하고 있었다. 골방에 틀어박히는 것을 좋아하고 철학자를 동경하는 나에게 골방철학자라는 말은 나에겐 완벽한 단어의 조합이지만, 막상 책을 보니 골방철학자라는 인물은 내 예상과는 많이 달랐고 나에게 울림을 주는 요소는 거의 없었다. 초등학생 시절 그저 그 단어 자체에 꽂힌 것일까? 하여튼 책을 반납하고 혁신파크로 가서 쿵덩야를 닦았다. 닦는 도중 인기척이 느껴져서 고개를 들었는데 어떤 머리가 반쯤 벗겨지고 선글라스를 쓴 중년 남성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순간 눈이 마주쳤다. 난 이내 다시 닦기 시작했는데 그 사람이 자리를 떠나질 않았다. 나는 ‘왜 이 아저씨는 내 행위를 지켜보고 있을까?’ 라는 물음과 동시에 나에게 말을 걸었을 시에 관한 대답을 준비하고 있었고 추측건대 그 아저씨는 ‘왜 이 사람은 보도블록을 닦고 있지?’ 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우리 사이에는 왜? 에서 오는 묘한 긴장감이 있었다. 그런 긴장감이 예술에서 참 중요한 것 같다. 일방적이지 않은, 서로의 공기를 침범하는 긴장감. 공공의 영역에서 일상적으로 접하는 사물과 관련된 퍼포먼스라서 그런 긴장감이 종종 생기는 것 같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 아저씨의 발길을 잠시 멈추게 한 것은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아이일 적 품었던 순수한 호기심의 불씨가 아직 남아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아저씨는 나에게 말을 붙이지 않은 채 가버렸고 나도 자전거를 타고 갈 길 갔다.

23.09.06

저녁 먹고 독서실에 왔어야 했는데 너무 짜게 먹는 바람에 푸드 코마가 왔다. 잠깐 자고 일어나니 친구와 약속한 달리기 시간이 다가와서 도서관에 들러 책을 빌리고 달렸다. 3km를 달리고 혁신파크에 가서 쿵덩야를 닦고 11시 10분에 독서실에 도착했다. 독서실에서 두 시간 만이라도 책을 읽든 글을 쓰든 해야 달력에 멋진 동그라미를 칠 수 있다.

23.09.07

독서실에서 나와 쿵덩야를 만났다. 닦는 와중 주위에 사람이 드문드문 있었고 난 항상 그렇듯 약간의 긴장감을 가졌다. 그리고 혹여 누군가가 이유를 물었을 때 할 대답을 상기했다. 그런데 어떤 대답이든 이렇다 할 명확함이 없었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친해져서요. 사람들이 너무 당연한 듯 밟고 보도블록을 밟고 지나가서요. 아니면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등장하는 영혜처럼 “꿈을 꿨어요” 라고 말해볼까? 어떤 소설 속의 한 장면처럼, 어떤 극의 한 장면처럼, 그 속에 등장인물처럼 행동하면 어떨까? 아주 초반에 물어본 그 아주머니를 제외하곤 아직 아무도 내 행위에 관해 물어보질 않았다. 내일은 혁신파크 사람들이 밥을 먹으러 나오는 점심시간에 가 봐야겠다.

23.09.08

12시 40분에 혁신파크에 도착했다. 예상과는 다르게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곳은 해 지고 8시에서 10시 사이에 사람이 가장 많은 것 같다. 다음엔 그 시간에 가서 알아봐야겠다. 독서실에 와서 쿵덩야를 생각했다. 문득 다 닦은 뒤 입맞춤을 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했다. ‘신체의 가장 민감한 부위로 쿵덩야와 접촉한다’ 라는 규칙을 추가해도 좋겠다.

23.09.11

쿵덩야 주위의 인간군을 상상하자. 만나지 않아도 존재하는 사람들. 사람들은 무엇에 가장 골몰하나? 당신이 가장 골몰하는 것이 당신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을까? 나처럼 쿵덩야와 만나는 식의 관계를 만드는 사람들은 있을까? 주말을 보내고 쿵덩야와 만났다. 오랜만은 아니지만, 왠지 반가웠다. 쿵덩야에 ‘혼’이라고 부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뭔가가 있다면 우리는 혼으로서 연결되는 과정을 겪는 것일까? 이 만남을 지속하고 고조되면 미처 몰랐던 새로운 생명을 발견하게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쿵덩야를 닦고 똥막대기로 쓸 나뭇가지를 주워서 집에 왔다.

김이중

존재 방식이 아름답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마치 지렁이의 완벽함을 닮아 지렁이 인간이 되어 지렁이 말을 구사하고픈 게으름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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