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성장의 사회상에 대한 역사적 시나리오적 접근new

‘탈성장이 미래다’라는 말은 너무 쉽다. 그 미래를 어떻게 만들지를 말하지 않으면 루저나 별난 취향의 게토에서 벗어나기 어려울지 모른다. 탈성장은 도덕률이 아니며 경제 이론인 것만도 아니다. 탈성장은 규범이기도 하고 방법이기도 하고 느낌이기도 할 것이다. 미래를 그리는 시나리오에는 이런 요소들이 다 있어야 한다.

왕들의 마음 씀이 중요했던 시절을 들여다보기 – 기후 위기 속에서 『서경집전』 「우서」 읽기new

중국 역사 속 요・순시대 왕들의 마음 씀은, 역사의 맥락에서 떼어놓고 보면 간결하고 매력적인 개념들로 보여서 지금까지도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들을 살펴보는 일은, 그 마음 씀 가운데 몇몇이 지금의 기후 위기 시대에 요청되는 정동일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중요한 일일 수 있다. 알고 보면 요・순시대도 기후 위기 시대였으니, 그 시대는 지금의 우리가 가장 먼저 돌아보아야 할 시대일 수도 있다.

거리낌 없다는 것을 새삼스레 짚어 보다 – 기후 위기 속에서 『중용』을 읽고

예로부터 사람이 남의 눈치를 보는 모습은 비겁해 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다가, 개인의 욕망이 존중되고 그것을 중심과 추동력으로 움직이고 발전하는 세계가 전개되자. 사람들은 비겁해 보이지 않으려는 것을 넘어, 거리낌 없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주체가 되고자 하였다. 그러나 기후 환경 위기가 빠른 속도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지금, 더 이상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것을 찬양할 수도 지켜만 보고 있을 수도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어떤 특정한 경우에서의 거리낌 없음은 자원의 과소비를 가져오고, 그것은 분명 기후 환경의 악화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에, 유교 경전 『중용장구』는 거리낌 없음을 새삼스레 재조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는 것 같다.

재난자본주의는 ‘위험한 구원의 순간’을 기다린다

자연재난과 위기, 전쟁을 돈벌이 기회를 삼는 자본주의를 ‘재난자본주의’라 부른다. 『쇼크 독트린』(2008)을 쓴 나오미 클라인은 자유시장주의자가 보기에 ‘마음껏 그릴 수 있는 백지를 만들어 내는 위험한 구원의 순간은 홍수, 전쟁, 테러 공격이 일어날 때다’라고 주장하였다.

[지구 환경의 경계선, 티핑포인트 시리즈] ② 창백한 푸른 점

나날이 악화되는 기후위기로 인해 생태환경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습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복잡한 과학 용어와 비극적인 예측은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상황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에, 현 상황을 명료하게 설명하는 개념인 ‘티핑 포인트’를 기준으로 현재의 상황과 미래 예측을 정리하는 시리즈를 기획했습니다.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모범을 따라 배우기’를 지금, 여기라는 맥락에 놓기 : 기후 위기 속에서 『대학』

‘모범을 따라 배우기’는 낡은 공부 방법으로 평가되곤 하는데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엄정한 논리도, 객관적 기준도 없어 보인다. 이 공부 방법은 값비싼 위험부담을 안고 있다. 모범이 되는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었다가, 그에게 영육 양면으로 종속되거나, 엄청난 환멸 속에 모범과 결별하고는, 영웅에게 불필요한 모욕을 가하게 되는 등의 이유에서다. 그런데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어서, 이 방법이 세상의 변화의 어느 국면에서는 빛을 발할 수도 있으니, 한 번쯤은 일부러 살펴볼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홈, 스웻 홈(Home, Sweat Home)

모래시계의 하얀 모래가 아래로 서서히 빠져나간다. 모래시계를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치 주거의 유효 기간이 정해진, 집인 것 같다. 시간에 쫓기는 순간, 불안은 밀려온다. 내 안의 불안은 나를 삼킨다. 불안함은 땀방울이 되어 집마다 가득 채운다. 불안과 희망의 분열 그 사이에서 내 집이 아닌, 모두의 집은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그 물음을 독자에게 던진다.

기후정의에서의 제도와 정책대안

그동안 한국의 기후운동은 과감한 온실가스 감축 목표 설정과 이행을 요구하는 것에 치중되어 왔다. 게다가 재생에너지와 전기차 확대로 상징되는 녹색성장론에 기댄 기후운동이 주류적 위치를 차지하고, 민관 거버넌스라는 이름 아래에 급진적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이런 운동이 온실가스 배출을 지속적해서 증가시키고 있는 사회경제 체제를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기에 부족함이 많다. 이들이 쉽게 동원하고 있는, ‘기후악당’ 국가의 시민으로 부끄러워서 못 살겠다는 마음만으로는 체제를 변화시킬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 기후정의는 어떤 방식이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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