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100호 특집] 편집위pick #돌봄

‘돌봄’은 생태적지혜 웹진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키워드 중 하나입니다. 대개 돌봄은 노동과, 특히 역사 속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여성 위주의 재생산 노동과 연결됩니다. 그러한 돌봄 노동의 가시화는 매우 중요합니다. 웹진에 기고된 다양한 돌봄 관련 글에도 그러한 글이 많습니다. 다만, 이번 편집위pick에서는 그러한 돌봄 노동의 재정의 너머에 있는 여러 이야기들을 꼽아보았습니다. 돌봄은 더 이상 가족 내에서만 이뤄지거나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차원에서 모두의 일상 속에서 내재되어야 할 가치일지 모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돌봄은 기본적으로 비용의 문제지만, 꼭 돈만으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비인간 동물들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듯, 아니 도리어 인간들의 삶이 좀 더 유기적 연결의 총합일 수밖에 없듯이,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 돌봄 의제의 키워드는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가 되어야 한다. 또 연결의 주체는 누구인지, 주민센터 공무원 몇 명이 마을 전부를 관리하고 있는 현실에서 어떻게 확장해 나갈 건지, 돌봄의 단위는 세부적으로, 시스템의 속도는 높아져야 할 지금 그 시작과 배치는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구상이 준비의 첫 단추가 아닐까. 이미 공동체를 이룬 아파트라는 거주지를 왜 활용하지 못하는지 궁금하다. 물론 각종 커뮤니티를 결성해 연결은 되어있지만, 그 시스템을 활용해 돌봄의 문제까지 이어줄 가치들은 존재하는지 고민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사생활은 보장되고 도움은 용이한 시스템 만들기를 구체적으로 고민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서로돌봄의 시대, 우리는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 by 오영주 2023년 3월 26일


대성의 생명 존중은 곧 돌봄이기도 하다. 대성은 살생을 뉘우치며 곰이 내세에 극락왕생하기를 기원하였는데 이는 돌봄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대성은 이승의 부모와 전생의 부모가 내세에 극락왕생하기를 기원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사람이 아닌 동물을 돌보는 것을 바탕삼아 돌봄을 전생과 이승에서 내세로 넓혀 사고한 셈이다. 이런 면들을 보면, ‘대성이 전생과 이생의 부모에게 효도하다’라는 이야기 속에서 대성은 돌봄의 확장을 통하여 도덕적 삶을 보다 고차원적으로 승화시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자신이 놀이의 소재로 삼았던 곰의 사후를 걱정하는 마음은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이 되어 전생과 이생의 부모의 사후를 염려하는 태도가 단지 자기와 유사한 존재들만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확장 가능한 태도가 되게 한 셈이다.

역사 속 어떤 돌봄과 지금의 돌봄 – 기후 위기 속에서 『삼국유사』 「효선」 ‘대성이 전생과 이생의 부모에게 효도하다’ 읽어보기 by 이유진 2023년 2월 12일


다들 알겠지만, 누군가를 보살피는 행위는 그 대상에게 도움을 주는 것 이상으로 나 자신을 성숙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특히 동물처럼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에 더더욱 그러하다. 또박또박 합리적인 말로 의사전달이 안 되다보니, 상대방이 보내는 소리, 냄새, 몸짓, 색깔, 눈빛 등등에 온통 신경을 집중하게 된다. 오늘 변 색깔을 보니 상태가 좀 나아진 걸까? 저 울음소리는 배가 고프다는 걸까, 놀아달라는 걸까? 배를 문질러주면서 눈꼽을 떼주면서 조심스레 이런저런 신호를 살핀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신호일수록, 성급하게 판단한 내 짐작이 틀릴수록, 그 다음번에는 더 많은 고민과 더 미세한 배려가 뒤따르게 된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그 시간 동안 그 녀석 또한 나와의 교감을 위해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서 세심하고도 복잡한 내면의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나는 그 과정이 마치 시(詩)와 같다고 느꼈다. 더 예민한 촉수와 미학적인 감각을 바탕으로 한 고도의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말이다. 관계는 그렇게 성숙해 가는 것이 아닐까?

우리 사이에 詩가 피어난다 by 시루 2019년 3월 11일


외상성 경막하 출혈, 그의 최초 진단명이다. 첫 번째 뇌수술을 받고 얼마 못 가 그는 다시 머리를 열고 뇌수술을 받아야 했다. 뇌압이 높아져 출혈이 또 발생했기 때문. 그렇게 두 번의 뇌수술을 받고도 한 달 넘게 의식 없는 채로 누워 있었다. 중환자실에 있는 동안 하루 두 번 면회할 때마다 동생과 나는 의식 없는 아버지에게 간절한 마음 담은 기도와 힘내시라는 응원을 귓전에 속삭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게 언제까지 기다리고만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채로 텅 빈 시골집과 병원을 오가며 장기전을 대비해야 했다. 한 달 여가 지나자 그는 자가 호흡과 의식을 조금씩 되찾았다. 적어도 일방적 전달로만 그치지 않을 정도로 나의 말에 어떤 반응을 보였다. 반사적 반응이 어떤 의미를 담은 불완전한 메시지가 되기까지는 또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다. 돌봄의 장기화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나와 동생은 놀라고 당황하고 어찌할 줄 모르고 슬프다가 억울했다가 기뻤다가 온갖 감정들을 헤집으며 ‘한부모가족’에서 ‘돌봄청년’이 되었다.

– 가정과 돌봄-영케어러의 아버지 돌봄 기록지➀ by 동그랑 2023년 2월 23일


한국 사회에서 돌봄을 주목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코로나19로 인해 돌봄의 공백이나 돌봄 노동을 통해 돌봄 논의가 가시화되지만, 새로운 가족형태의 돌봄은 여전히 낯설어한다. 다양한 요인들이 있겠으나 선행연구와 한국의 가족 돌봄 담론을 분석했을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가족 돌봄이 효자든 불효자든 개인의 서사이자 가정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때문에 돌봄이 공적영역에서 논의된 이후에야 영 케어러와 같이 가시화되지 않았던 돌봄자가 사회에 보이기 시작했다. 둘째, 가족과 돌봄에 관련된 기존의 제도와 인식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와 가부장제의 관점에서 접근해왔기에 새로운 가족형태의 돌봄에 적용시키기 데는 한계가 있다. 이제부터 논하게 될 영 케어러를 비롯한 비혼 돌봄자, 남성 돌봄자, 생활동반자 돌봄 등 새로운 돌봄의 형태는 아직까지도 사회가 소화하기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 소년소녀가장이 아닌 영 케어러, 효자효녀가 아닌 돌봄자 by 조명아 2021년 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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