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키움 특집] ① 얽힘과 말걸기 – 『도플갱어』를 읽고new

클라인은 『도플갱어』를 통해 극우 성향을 보이는 음모론자들을 별세계에서 온 이들이 아니라 이 사회에서 배태된 이들로 바라보고자 한다. 다시 말해 저자는 도플갱어를 ‘타자화’하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와 연결한다. 그래서 우리는 깨닫게 된다. 결국 우리가 알던 그리고 살던 이 세계 자체가 거짓말이며, 극우 세력의 “개소리”는 그 거짓말의 또 다른 버전일 뿐이라는 것을.

돌봄의 정치: 무엇을 돌볼 것인가?new

현재의 질서 안에서 수행되는 생산 노동이 문제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재생산 노동이 그 문제적인 노동을 계속해서 뒷받침하는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재)생산 노동의 평등한 접근/분배 이전에 노동 자체를 문제화하는 것 아닐까? 그러니 돌봄을 보편화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돌봄의 불평등한 분배만이 아니라 돌봄의 사회적 기능 자체를 문제화해야 한다.

커먼즈와 사회 전환

커먼즈는 다른 무엇보다 ‘우리’를 만드는 일이다.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돌보며 ‘우리’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그 ‘우리’는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까? 커먼즈는 물론 ‘우리’를 만들어가는 일이지만 ‘우리’에 갇혀서도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활동이 만들어낸 균열선을 따라 계속 확장되어야 한다. 이것은 ‘권력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지배 질서를 그 내부에서 ‘오염’시키는 아래로부터의 전략일 것이다.

[탈성장과 기본소득] ④ 정치적 관점으로서의 기본소득과 탈성장

기본소득은 스펙트럼이 넓은 주장이다.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사람은 좌우파를 가로지르며, 기술 가속주의자부터 탈성장 활동가를 아우른다. 그 주장이 종종 혼란스럽게 다가오는 이유다. 이 글은 기본소득을 (정책이 아니라) 하나의 관점으로 이야기하면서 이것이 오늘날 생태 위기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 본다.

투쟁을 배우다 – 오뻬라이스모와 페미니즘 사이에서 나의 이야기 – by 레오폴디나 포르뚜나띠

포르뚜나띠는 이탈리아 페미니스트 이론가/활동가로 이탈리아 우디네 대학교 교육학부에서 커뮤니케이션 사회학과 문화 과정 사회학을 가르치고 있다. 포르뚜나띠는 이 글에서 자신의 활동 이력을 되짚어 가면서 맑스주의와 페미니즘을 동시에 혁신하고자 했던 자신의 작업(특히 〈재생산의 비밀〉)의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번역] 여성-자연 연결로 본 에코페미니즘의 다양한 갈래들과 그 함의 –캐런 J. 워런

에코페미니즘은 여성 억압과 자연 억압이 연결되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하나의 페미니즘이 있지 않은 것처럼 하나의 에코페미니즘도 없다. 캐런 워런은 여성-자연 연결에 대한 여덟 가지 관점을 검토하면서 에코페미니즘의 다양한 갈래들을 살피며 그것이 인간중심적이며 남성중심적인 주류 철학에 제기하는 도전을 보여준다.

[번역] 애나 이슬라 「교토의정서의 대가를 치르는 것은 누구인가? – 코스타리카의 산소 판매와 성 판매」

이 글을 쓴 애나 이슬라는 코스타리카 사례를 통해, 우림의 나무를 '탄소 흡수원' 혹은 산소 발생기로 종획(enclosure)하여 자연자본화하는 교토 의정서의 청정개발체제가 어떻게 코스타리카의 자급 공동체를 파괴했는지, 특히 여성의 신체에 대한 종획으로 이어졌는지 보여준다. 그의 결론은 분명하다. 지구 온난화 감축을 위한 전략이 타자의 자급 경제 수탈에 의존한다면 지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도시에서 예술하기] ② 일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연마하기

‘예술하기’는 대상화된 예술이 아닌 과정으로서의 예술을 드러낸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은 어떻게든 ‘정상적인’ 삶에 균열을 내는 것, 새로운 삶 형태를 만들어가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술하기는 공통하기와 다르지 않다. 그것은 다른 삶에 대한 요구며 실천이다.

[도시에서 예술하기] ① 공통하기와 예술하기

‘예술하기’는 대상화된 예술이 아닌 과정으로서의 예술을 드러낸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은 어떻게든 ‘정상적인’ 삶에 균열을 내는 것, 새로운 삶 형태를 만들어가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술하기는 공통하기와 다르지 않다. 그것은 다른 삶에 대한 요구며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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