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적 활동으로 자본의 세계 관리를 가로지르려 하는 개체의 애환 – 브라이언 마수미 『가상계』 1장 「정동의 자율」 독후기

무상(無常). “일정한 모습을 유지하지 못한다”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 기원전에 인도에서 만들어진 개념이라고 한다. 변화가 가속화하는 세계에서 이 말은 새삼 주목받을 수 있다. 긴장[서스펜스]이란 무엇일까? 건강에 나쁜 걸까? 그럴 런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러하다. 그러나 번득이는 욕망들, 무수한 광고판과 함께 울고 웃는 사람이 긴장을 놓을 때 그것은 곧 죽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노동에 경의를 표하고, 빚을 갚고, 어린 양 되기를 권하다 –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관람 후기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내가 직접 만든 것을 꼽아보면, 내 삶이 타인에게 얼마나 심하게 의지하고 있는지, 사람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강하게 연결되어있는지를 느낄 수 있을 듯하다. 내가 직접 만든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느낌에 예민한 사람은 연대라는 가치를 중하게 여길 것이고, 적어도 받은 만큼은 베풀고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세계를 실재적이지만 추상적인 것으로 파악하기 위한 설계 ; 브라이언 마수미 《가상계》 〈서문〉 독후기

형식논리를 핵심적인 도구로 하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세계를 대체로 ‘예측 가능한 곳’으로 만들고, 사람들은 예전보다 훨씬 안전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모든 것이 예측되고 결국은 관리되는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점차 편해지고 안전해지기도 하였으나,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추세가 급격히 진행되어버린 사회에서는 진작부터 의지를 발휘하여 자유롭게 사는 맛을 잃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앞서 핵심적 도구라고 하였던 형식논리에서, 두 발이 아니라, 한 발 빼기를 시도하였다. 아마도 “실재적 추상”이라는 말이 이러한 시도를 대변하는 말로 적합할 듯하다.

육식은 메탄을 발생시키고 연민의 대척점에 선다 ; 영화 《카우스피라시》 관람후기

공업화에 수반되는 환경오염은 기후 위기의 원인 가운데 하나다. 그에 못지 않게 육식도 기후 위기의 원인 가운데 하나다. 공장형 목장, 방목장, 가사농장이 모두 열대우림을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재배한 유전자 조작 옥수수나 콩으로 만든 사료, 공유지의 목초지화, 메탄의 발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육식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직간접으로 살생을 피할 수 없다.

웃고 즐기며 해양을 오염시키는 동안 노예제는 계속되고 있었다는 이야기 ; 영화 《씨스피라시》 관람후기

이 다큐멘터리는 알리 타브리지가 아름답고 생명력 넘치는 바다를 기록하는 해양 다큐 작가가 되려다가 알게 된 각종 해양 오염의 실태와 해상에서 벌어지는 노예노동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이 다큐가 보여주는 해양 오염 실태는 편파적이며 과장되었다는 지적들과 함께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그러나 고깃배에서의 노예노동은, 적어도 남한 사람들에게는 논란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나는 다큐 속 태국 고깃배의 노예노동을 보며 즉각적으로 멍텅구리배에서의 새우잡이, 멸치잡이 그리고 염전노예를 떠올렸다. 이 다큐는 다양한 해양 오염과 해양 생물 학살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대서양에서 18세기에 성행했던 해적질과 노예매매가 아직도 변형된 형태로 이어져 오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도 한다.

17~19세기 대서양 자본주의가 오늘에 보내는 소식 : 『히드라』 독후기

17~19세기 대서양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었던 대륙들, 즉 영국과 아일랜드를 포함한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에서는 혁명, 식민지 쟁탈, 노예매매, 플랜테이션 등으로 표상되는 변화와 교류가 전개되었다. 그것은 대서양 자본주의라고 집약하여 말할 수 있으며. 오늘날에 까지 영향을 주고 있음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야기로 남아있다.

1935년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탈성장 담론의 실마리를 보여주다 ;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독후기

버트런드 러셀의 수필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문자 그대로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기도 하지만, 여가의 중요성을 힘주어 말하는 글이기도 하다. 이 수필에서 러셀은 노동의 신성함이라는 거짓 이야기가 노동을 노예적인 것으로 만들어서 유지시켜왔으며, 그 거짓을 유포해서 이득을 본 사람들의 의식마저도 병들게 하였다고 보았다.

음악과 춤과 축구와 두 교황 ; 영화 《두 교황》 관람 후기

삶을 지속가능하게 하여주는 변신이 필요할 때, 누구도 그것을 대신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궁극적 절대자나 종교적 지도자에게 그것을 기대했던 듯하고, 놀랍게도 그런 기대가 이루어진 느낌을 사람들은 받고 있다. 그러한 기대와 그 결과가 허상일지라도 그때의 그 종교적 지도자가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더 나아지려는 자라면 사람들이 덜 속고 부수적 피해 또한 덜할 것 같기는 하다.

풍경 속에서 이웃 건져서 모으는 나날 –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관람후기

사람이 삶의 위기를 맞이하여 그 위기 속에서 간신히 삶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어떤 이웃은 풍경 속으로 쑥 들어가 버리고 풍경 속에만 있던 몇몇 사람은 이웃이 된다. 이웃은 비장한 결의나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에 의하여 되는 것은 아닌 듯하다. 그들은 아주 작은 이끌림을 차마 거부하지 못하였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약간 더 가까이에서 누군가의 편이 되어주게 되는 듯하다. 누군가가 끊임없이 뭔가를 평가하거나, 정의하거나, 설명하는 것을 그치는 기색을 보이면, 그에게 이끌리는 사람이 생길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불완전성과 살아가는 방식을 보여준 세계 – 『마그나카르타 선언』을 읽고②

사람들이 모두 다른 존재들이라면, 똑같은 글을 읽은 결과도 다를 가능성이 크고, 다른 결과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세계의 다른 면들을 엿볼 수 있게 하여줄 것이다. 〈마그나카르타〉와 〈삼림헌장〉은 그 자체로 ‘불완전성과 살아가는 방식을 보여준 세계’일 수 있다. 〈마그나카르타〉와 〈삼림헌장〉 속의 온갖 멋진 말들은, 문서 속에서부터 갖가지 조건에 걸려, 현실 세계에 던져졌을 때는 슬며시 힘을 잃게 될 것만 같아 보였다. 그러나 그 말이 던져진 세계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그 말에 담긴 미약한 가능성을 지켜내고자 노력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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