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공연 예술과 기후 운동 퍼포먼스 사이에서] ③ 풍족함 속에서 선물을 주고받기, 균형을 맞추기

숲을 살리는 균사체의 방법에서 기후 운동 퍼포먼스의 영감을 깨달은 비커밍 스피시스와 함께 협력하며, 현대예술에서의 공동체성과 기후운동의 연결성을 깨닫게 된다.

[보성댁 이야기] ⑯ 40년 만에 찾아간 소록도

젊은 시절, 보성댁은 남편 상덕씨의 일자리를 따라 소록도에서 살았었다. 11개월간의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곳에서 지난 시간은 꿈 같았다. 소록도와 녹동 사이에 다리가 놓이고 사람들이 구경을 간다는 소식을 들은 딸과 사위는 보성댁을 모시고 소록도를 방문한다.

『리게티, 횡단의 음악』 을 읽고 ② – 지나가고 순환하는 강렬함 속 횡단의 선

이번 글의 중심은 사실 쇤베르크가 연 무조성의 음악을 어떤 형식을 가지고 담느냐의 문제입니다. 음렬주의 작곡가들은 그것을 구조화된 순서의 나열로 해결하려 했다면 리게티는 그것의 문제점을 넘어 아니, 딛고 평준화를 통한 음들의 덩어리, 음향 음악으로 돌파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단지 느슨하게 소리 울리는 조직으로 짜여지는 형식형상화 방식으로 말이죠.

‘바다 빗질’ 첫 번째 이야기, “흔들리는 지구별 위에서 노래하자.”

태풍이 지나간 자리마다 엄청난 쓰레기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쓰레기를 발견했고, 나와 비슷한 사물들에게 희망의 자리를 내주었다. 몸을 굽혀 쓰레기를 줍는 즐거운 노동과 명랑한 이야기를 만드는 몸짓에서 숨꽃이 피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했다.

[보성댁 이야기] ⑮ 학교 다녀왔습니다

보성댁 가족은 순천에서 가까운 밤골로 이사하고 순천에 있는 중고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은 기차를 타고 통학한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를 놓친 큰딸을 기다리며 보성댁은 초조한 시간을 보낸다. 큰딸은 두 시간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데 보성댁은 딸의 겁없음이 더 걱정된다.

[현대 공연 예술과 기후 운동 퍼포먼스 사이에서] ② 작가와 작가 없음, 혹은 모두가 작가

지난 10년 간 예술계에서는 공동체성, 다양한 존재들에 대한 돌봄과 포용성, 공동체성의 회복의 내러티브들을 주목하고 있다. 한 개인에게 요구되었던 효율성과 생산성, 그 생산성 아래 숨겨져 있던 재생산의 노동, 돌봄의 책임과 의무가 실제로 공동체와 나누어져야 한다는 것을 최근의 코로나 및 지구적 위기로 인해 다시 기억하게 되었다. 여기서 근대의 작가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현대의 예술계에서 이 공동체주의는 얼마만큼 실현 가능하고 어떤 부분은 불가능할까 라는 질문이 든다. 동시에 근대 미학에 아직도 뿌리를 두고 있는 현대 예술이 새롭게 변화할 수 있다는 희망도 든다.

[현대 공연 예술과 기후 운동 퍼포먼스 사이에서] ① 극장과 공공장소

무용공연과 기후 퍼포먼스 작업의 차이를 묻는 질문을 통해 둘을 돌아보게 되었다. 극장이라는 장소에서 관객의 제한 등 한계를 가질 수 있는 무용공연과 달리 기후 운동 퍼포먼스는 주로 공공장소에서 이루어져 연령이나 경제적 조건에 관계없이 경계를 넘어 함께할 수 있는 차이가 있었다.

[보성댁 이야기] ⑭ 그래도 죽을 병 아니고 입덧인께 다행이요

셋째 딸네 손녀가 성장하여 혼인하게 되고 보성댁은 자식들과 함께 결혼식에 참석한다. 결혼식 끝나고 딸은 이바지 음식 들어온 것을 친정어머니인 보성댁에게 나눠준다. 받아 온 이바지 음식에는 한우 소고기가 들어 있고 식구들과 고기를 나눠 먹으며 막둥이 아들을 가졌을 때를 회고한다.

[보성댁 이야기] ⑬ 엄마는 먼 쓸데없는 오지랖을 그리 피우고 계세요?

나이가 많고 쇠약해져 요양보호사의 돌봄을 받으며 지내는 보성댁은 칠십 초반의 큰집 셋째 조카가 죽었다는 소식을 받는다. 자신보다 나이가 적은,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의 부고에 보성댁은 쓸쓸하고 허전하다. 혼자 남은 조카사위가 안타까워, 큰집 큰조카에게 가보라고 하겠다는 말을 딸에게 했다가 그런 오지랖 부리지 말라는 핀잔을 듣지만 보성댁은 단념이 되지 않고, 딸은 그런 어머니를 걱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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