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애나 이슬라 「교토의정서의 대가를 치르는 것은 누구인가? – 코스타리카의 산소 판매와 성 판매」

이 글을 쓴 애나 이슬라는 코스타리카 사례를 통해, 우림의 나무를 '탄소 흡수원' 혹은 산소 발생기로 종획(enclosure)하여 자연자본화하는 교토 의정서의 청정개발체제가 어떻게 코스타리카의 자급 공동체를 파괴했는지, 특히 여성의 신체에 대한 종획으로 이어졌는지 보여준다. 그의 결론은 분명하다. 지구 온난화 감축을 위한 전략이 타자의 자급 경제 수탈에 의존한다면 지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뉴스레터 100호 특집] 편집위pick #탈성장

기후위기 해법의 어려움은 온실가스 배출과 경제성장이 동조화되어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지속가능 성장, 그린뉴딜 등은 탄소배출을 줄이면서도 세계경제의 성장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심지어 탈탄소로의 산업전환의 과정 자체를 통해 경제 성장을 견인할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하지만 그레타 툰베리의 최근작 『기후책』을 비롯한 다양한 보고서들은 탈성장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장의 한계》 50주년 보고서인 『모두를 위한 지구』의 소제목이 ‘인류 생존을 위한 가이드’이다. 인류는 전환이냐 생존이냐의 선택 앞에 놓여 있으며 여기서 전환의 방향은 의심할 필요도 없이 탈성장이다. 탈성장은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의 오래된 주제였고 탈/성/장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하더라도 다양한 주장에 전제된 방향이 아닐 수 없다. 2019년 이래 탈성장에 관한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

[뉴스레터 100호 특집] 편집위pick #기후위기

뉴스레터 100호를 맞이하여 뉴스레터에서 그간 다뤄온 주요 키워드를 중심으로 핵심 문장을 모아 다시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기후위기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희망을 품고 새로운 발자취를 남길 것인가를 중점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이어 나가보겠습니다.

[몸살 앓는 제주] ① ‘불 없는 들불축제’라고?

지구가 불타는 마당에 기름과 화약을 이용해 오름에 불을 놓고 불구경하자는 들불축제는 이제 폐지해야 마땅하다. ‘불 없는 들불축제’라는 말로 도민들을 현혹하지만, 사실은 기후위기에 역행하면서 지속가능성마저 우려되며 각종 논란만 재현되고 있는 실상을 이 글을 통해 파헤치고자 한다.

[923 기후정의행진 특별판] 기후위기의 말들

2022년 6월부터 2023년 9월까지 약 1년간 게재된 글들 중 기후위기에 대해 언급한 구절들을 모아서 〈기후위기의 말들〉이라는 제목 아래 재구성했다. 이 내용은 2023년 9월 23일 기후정의행진에서 웹진 《생태적 지혜》 특별판으로 발행하여 배포되었다.

저부터 먼저 탈성장하겠습니다

세계 각국 정부는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탄소배출을 급격하게 줄이겠다고 약속하면서 동시에 탄소배출 산업에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탄소배출이 실질적으로 감축되는 시점은 무한하게 지연되고 있다. 그 속에서 한 개인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특히 물질조건과 행복을 동조화하는 수 많은 개인들이 어떻게 탈성장을 선택할 것인가?

서로에게서 자연에까지 존엄한 관계를 확대하기-『존엄하게 산다는 것』을 읽고

『존엄하게 산다는 것』을 통해 저자는 ‘존엄함이란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하는 방법, 인간이 인간을 위해 책임을 지는 태도의 문제’라고 말한다. 인간은 개인의 의도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것이 결국은 자신의 존엄성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존엄이라는 것은 비단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고, 타인뿐만 아니라 자연을 포함하여 우리가 맺고 있는 주위의 모든 관계로 확대되어야 한다.

현세대가 미래세대의 미래를 빼앗고 있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현재세대들만의 민주주의이다. 현재의 민주주의와 정치시스템은 미래세대와 비인간존재의 권리를 보장하지 못하고 현재세대의 이익만으로 모든 결정을 할 뿐이다. 이제 우리의 정치와 민주주의는 미래세대와 비인간존재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민주주의로 진보해야 한다.

[만화리통신] ㉝ 6월의 제철음식 감자

기후위기 공부하는 마을동아리 ‘지구손수건’은 여섯 가정이 모여 생태적 삶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알고 보면 모두가 억울하다 -이야기 ‘바리공주’를 읽으며 더 나은 공동체를 생각하기

평생을 완벽하게 행복만 누리면서 살아서 여한이 없는 죽음을 맞이하는 삶은 지극히 드물 것이다, 여한은 그저 개인의 차원에서 만들어지고 쌓이는 것이라기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얽히고 쌓여가는 것이기에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여한 없는 삶 아니 여한 없는 죽음에 근접한 더 나은 공동체의 조건은 무엇일까? 이야기 ‘바리공주’를 읽으며 그 조건을 생각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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