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모두가 억울하다 -이야기 ‘바리공주’를 읽으며 더 나은 공동체를 생각하기

평생을 완벽하게 행복만 누리면서 살아서 여한이 없는 죽음을 맞이하는 삶은 지극히 드물 것이다, 여한은 그저 개인의 차원에서 만들어지고 쌓이는 것이라기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얽히고 쌓여가는 것이기에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여한 없는 삶 아니 여한 없는 죽음에 근접한 더 나은 공동체의 조건은 무엇일까? 이야기 ‘바리공주’를 읽으며 그 조건을 생각해 봤다.

가정과 돌봄-영케어러의 아버지 돌봄 기록지 ⑦

2023년 설날 연휴, Covid-19 펜데믹 이후 3년 만에 위험과 절망을 끌어안은 아버지와 내가 서로의 곁에 머무르기로 했다. 3년 만에 3박 4일의 병원 내 아버지 돌봄이 서로에게 어떤 시간이 될지 기대하며 글을 맺는다.

내 발톱은 누가 깎아줄까? – 볼 수 없는 것들의 윤리와 미학

병원을 집처럼 드나들던 시기, 어느 날 엄마의 발톱이 길게 자란 것이 보였다. 손톱깎이로 깎아드리며, 그제야 엄마가 엄마였을 때 그런 경험이 없었던 것이 생각났다. 노인들, 환자들, 지워진 사람들, 소수자들, 비인간 생명들, 우리 모두가 한국 사회라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으면 좋겠다. 좀 더 존엄하게 서로를 위로하며 서로를 돌볼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가정과 돌봄-영케어러의 아버지 돌봄 기록지 ⑥

‘영 케어러’들의 자조모임에서 아버지의 고관절 골절 상황과 함께 병원에서 들었던 ‘속설’을 나눴다. “어르신들이 고관절 골절상을 입으면 3년을 못 넘기더라”는 속설. 아버지를 돌보던 간병인과 간호사들의 이야기였다. 비록 직접 내게 말하진 않았지만 엄연히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하던 말들이다. 썩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덜컥 겁을 먹게 됐다. 아버지가 3년 안에 돌아가신다면?

돌봄에서 상호작용을 높이는 구조를 생각하며

돌봄에서 상호작용을 높이기 위해서는 돌봄에 대한 인식을 먼저 바꿀 필요가 있다. 이 토대 위에 삶과 비전, 관계와 공동체 등을 잘 버무리면 단순한 서비스로 인식되던 돌봄이 우리 삶의 중심으로 조금 더 들어올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우리 삶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 지구와 함께 연결되어 있음을 상기하는 것도 곁들이면 좋겠다.

가정과 돌봄-영케어러의 아버지 돌봄 기록지 ④

2020년, Covid-19 팬데믹 기간 동안 일상의 풍경은 변해갔다. 그해 4월, 치매 증상이 심해진 할머니가 아버지와 같은 요양병원에 입원했다. 엄마와 아들이 마주 보고 있는 병실에 각각 입원해 있는 현실. 같은 공간이라 할 만큼 가까이 있지만 그 둘은 자기 힘으로 서로를 보러 갈 수 없었다. 유난히 힘없이 누워있던 할머니를 면회하고 돌아오던 길에 걸려온 한 통의 전화, 할머니의 부고(訃告)였다.

스스로를 먹어치우는 식인자본주의를 넘어 – 『좌파의 길』을 읽고

미국의 정치철학자이며 사회 이론가인 저자는 건강한 사회를 위하여 ‘좌파의 길’을 제시한다. 먼저 저자는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식인 자본주의라고 말한다. 식인 자본주의란, 현 체제의 자본주의가 그 본성상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문명적 토대를 포식함으로써 자본 자체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파멸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서로돌봄의 시대, 우리는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

서로가 서로를 버티고 있는 모양이 사람 인(人)자라고 하듯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야 한다. 오늘의 상상력이 내일엔 서로를 돌보는 모습이 되어, 각자도생의 삶을 가로지르는 피로사회를 넘어 서로의 존재를 바라볼 수 있는 안전 사회에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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